선악과의 양면성
아래의 꿈은, 내게 3년가 분석을 받아 온 내담자가 꾼 꿈이다. 꿈주인은 상담자이다. 이 꿈은 바로 지난주에 상담 중 위기 상황을 맞이하였으나, 그 위기가 분석을 통해 오히려 상담자로서 한 차원 올라가게 만드는 결정적인 일이 있었다. 다음 꿈은 그 이후에 꾼 꿈이다.
내담자 관점(1인칭)에서 쓴 꿈분석이다.
분석가(나)와 그의 자녀들, 아들 딸이 나왔다. 분석가 옆에 아들이 있는데, 잠시 후 딸이 왔다. 내가 과일 같은 것을 준비했는데, 같이 먹는다. 딸이 과일에 대해서 칭찬한다. 좋은 과일이라고,,, 사과처럼 생긴 열매다. 아들이 질문이 있단다. 주저하면서 질문... 그러다가 분석가가 등장하면서 같이 먹었다. 맛있다고 했다.
3년 동안의 분석을 채워가는 무렵, 하나의 꿈이 찾아왔다. 분석가의 자녀들이 등장하고, 분석가와 함께 자리하는 꿈이었다. 나는 과일 같은 것을 준비해 놓았다. 그 열매는 사과처럼 생겼다. 분석가 딸은 그 과일을 보고는 “좋은 과일이에요”라고 말하며 칭찬했다. 아들은 조심스럽게 질문이 있다고 했다.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순간, 분석가가 등장하였다. 그는 나와 함께 과일을 맛보았고, “맛있다”라고 말했다.
이 평화롭고도 상징적인 꿈은 단지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안의 여러 조각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인정하며, 함께 무언가를 나누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과일’, 하나의 결실이 있었다.
꿈은 종종 말보다 깊은 이해를 가져온다. 그 과일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내가 지난 시간 동안 감내해 온 감정, 질문, 상처와 회복, 그리고 분석을 통해 얻은 내면의 통찰들이 응축된 결실이었다. 사과처럼 생긴 그 과일은 나에게 지극히 성경적인 상징을 떠올리게 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표상하는 것이었다.
선악과는 금기의 열매이자, 동시에 인간됨을 획득하게 한 열매다. 불순종과 타락의 상징이지만, 인간이 선과 악을 구별하게 되는 '지혜가 응축된 과일', ‘성숙의 출발점’이기도 한, 이중적 의미가 중첩되어 있는 과일이다. 인간은 결함을 가진 존재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로 창조하였다는 메타포 속에는 인간을 결함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과 그 극복을 전제로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완벽함은 성장이 없고, 결함 속에야 비로소 진짜 지혜가 움트기 때문이다.
나의 분석적 여정은 그런 결함과의 화해의 여정, 모든 상처에 대한 극복의 과정이었다. 이제야 나는, 내가 먹은 그 과일이 단순한 사과가 아니었다는 걸 안다.
꿈속에서 딸과 아들이 함께 등장한 것은 흥미롭다. 정신분석적으로 볼 때, 자녀는 종종 내면의 자아 일부를 상징한다. 딸은 내 안의 여성성,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자아다. 그녀는 과일을 보고 예쁘다고, 맛있다고 칭찬했다. 그녀는 감탄을 아끼지 않으며, 나의 결실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분석가의 자녀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분화와 성숙을 의미한다. 지금 나는 분석가의 분화된 삶을 함께 즐기고 나누고 있는 것이다.
아들은 나의 남성성,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측면이다. 그는 무언가를 묻고 싶어 했다. 그러나 쉽게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삶에 대해, 나에 대해, 아직 말로 꺼내지 못한 질문들. 어쩌면 그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오래전부터 질문을 품고 있었지만, 이제야 조심스럽게 입을 떼려는 찰나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들이 질문을 머뭇거리는 것은, 나의 남자 친구에 대해 결혼의 문제에 대해 머뭇거리고 있는 지점을 상징하는 것인지 모른다. 분석가의 아들이 질문을 머뭇거린다는 것은, 내가 그 질문을 받았을 때 흔쾌하게 답할 수 없고,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나의 심리적 상태를 반대로 비춰준 모습일 수 있다. 질문할 수 있는 마지막 결단을 못 내리는 것은, 내가 답변할 수 있는 상태에 있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다. 바로 결혼 문제일 것이다.
그 질문이 무엇이든, 나는 안다. 진짜 질문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때로는 무력하며, 그러나 결국은 삶을 바꾸는 힘을 가진다.
그 순간 등장한 분석가. 그는 마치 이 장면의 증인이자 조율자처럼 등장한다. 그는 과일을 먹으며 “맛있다”라고 말했다. 그 말 한마디는 나에게 큰 울림이 되었다. 내가 준비한 것을, 누군가가 받아들였다는 감각. 그것이 내가 상담자와 함께 나눈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징표가 되어 내게 돌아왔다.
꿈속의 분석가는 단지 외부의 인물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 자리한 현명한 존재, 통합된 자아, 또는 치유된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 분석을 통해 내가 도달하고자 했던 ‘나’는 그렇게 나를 반겨주고, 나의 열매를 함께 맛보며, 나의 질문들에 묵직한 신뢰로 답해주고 있었다.
한국의 경제 성장 과정은 ‘부실 공사’의 은유로 자주 불린다. 빠르게 세워졌지만, 그 안엔 무수한 틈과 균열이 있다. 나 또한 그런 부실함을 안고 살아왔다. 애써 완벽한 사람처럼, 튼튼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지만, 실은 누구보다 흔들렸고 약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지어진 것보다, 부실함을 보완해 가며 살아남은 구조물에 더 깊은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성숙이란 그런 것이다. 성장하지 않은 사람은 부서지기 쉽지만, 부서져 본 사람은 유연하다. 그는 스스로를 용서할 줄 알고, 타인의 결함을 사랑할 줄 안다.
그 부실함이 선악과가 주는 의미이기도 하다. 선악과는 한편으로 유혹과 타락, 영적 범죄와 관련되지만, 다른 한편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지혜와 성숙을 상징한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죄짓지 않고 순진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락 후 십자가를 통해 죄와 악을 극복하고 종말에 이르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영화로운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좋은 가문, 훌륭한 혈통, 풍요로운 집안에서 태어나 왕자와 공주처럼 철없는 만족감으로 주인도덕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북한의 김정은처럼)이 아니라, 결핍과 부실함 속에서 태어나 이를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삶의 지혜를 축적해 가며 성숙해 가는 삶을 살아가는 노예도덕이 나에게는 더 필요한 것인 것 같다.
신은 에덴동산에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뚝딱 만들어 낸 아담보다 종말론적 상태에서 죄와 악을 이겨내는 반성능력을 가진, 상처와 결핍을 극복한 보다 성숙한 형태의 거듭난 아담을 원하는 것 같다.
이제 내면의 자녀들과 함께, 분석가와 함께, 나는 하나의 식탁에 앉았다. 처음엔 내가 음식을 준비했지만, 실은 그들도 나를 준비해 왔다. 이제는 누군가의 질문 앞에 멈추지 않고, 누군가의 칭찬 앞에 움츠러들지 않는다. 나는 먹고, 말하고, 나눈다.
그리고 그런 내가, 누군가의 삶에 기꺼이 과일 한 조각이 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맛있는 삶일 것이다.
이 글은 나의 꿈과 분석 과정을 바탕으로 한, 자기 성찰의 기록이다. 내면의 다양한 자아와 화해하고, 결실을 나누는 이 여정이 당신에게도 울림이 되기를 바란다. 당신도 지금 어디선가, 하나의 열매, 당신의 선악과를 준비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 꿈을 꾼 후, 나는 분석가의 분석을 받으면서 주변 사람들이 달라지고 있고, 주변 환경이 재편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 나를 늘 힘들게 했던 어머니의 상태가 달라져 있었다. 가까이 있는 남자친구의 상태도 달라져 있다. 그만큼 투사를 덜 할 만큼 불안 지수가 안정적으로 낮아졌고, 자기애적 수준 또한 낮아져 자기애가 많이 채워진 것으로 보인다. 안정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내 삶의 변화, 자기(self)의 발달에 따른 열매인 것 같다. 그 열매는 선악과로서 타락과 성숙의 양면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 양면의 긴장과 갈등은 나의 남은 여생 동안에 끊임없이 화학적 변화와 성숙을 가져다줄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