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외로움 : 통합되지 않은 상태의 경험

https://youtu.be/jNP26EjR2iI


고독 vs 외로움


삶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때로 홀로 남겨진 듯한 감정을 느낀다. 어떤 이는 이를 '고독'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외로움'이라 칭한다. 이 두 감정은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특히 도널드 위니캇의 이론을 빌려 살펴보면 그 뿌리와 의미는 사뭇 다르다.

고독은 내면의 풍요로움과 충만함에서 오는 성숙한 상태인 반면, 외로움은 근원적인 결핍과 대상에 대한 허기짐에서 비롯된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이 근본적인 차이는 유아기 발달 과정에서 경험하는 '통합되지 않음(unintegration)'의 질과 깊이에 따라 결정된다.


유아기의 '통합되지 않음'과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의 씨앗


위니캇은 갓 태어난 아기가 처음에는 '통합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는 아기가 자신의 신체 감각, 감정 경험, 그리고 외부 세계를 아직 하나의 통일된 '나'로 인식하거나 조직화하지 못하는 원초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아기는 배고프면 울고, 졸리면 잠들며, 불편함을 느끼면 몸부림치는 등 개별적인 감각과 욕구에 따라 즉각적으로 반응할 뿐, 이 모든 파편적인 경험을 통합하여 '내가 배고프다'거나 '내가 불편하다'라고 인지하지 못한다. 이러한 상태는 마치 조각난 퍼즐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과 같다.

이처럼 취약하고 '통합되지 않은' 아기의 상태는 '충분히 좋은 엄마(good-enough mother)'에 의해 절대적으로 보호되고 지지될 때 비로소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 충분히 좋은 엄마는 아기의 미묘한 신호와 욕구를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이에 즉각적이고 적절하게 반응함으로써 아기가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통합하거나 외부 현실에 적응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도록 환경을 제공한다. 아기는 엄마의 품 안에서 아무런 목적이나 의식적인 노력 없이, 그저 '존재(being)'할 수 있는 안전하고 수용적인 공간을 경험한다.


바로 이 안전한 환경 속에서 아기는 외부의 요구에 맞춰 자신을 억지로 조직화하거나 통합할 필요가 없으므로, 자신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순수한 '자발성(spontaneity)'과 '참 자기(True Self)'의 씨앗을 싹 틔울 수 있다. 위니캇이 강조한 '엄마가 옆에 있다는 전제 하에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capacity to be alone)'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는 고독의 근원이다.

아기는 엄마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고 언제든 필요할 때 반응해 줄 것이라는 내면의 확신(내면화된 엄마의 존재) 속에서, 외부에 대한 불안이나 분리 불안 없이 자신의 심연으로 깊이 내려가 아무 생각 없이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 경험을 통해 아기는 자신 안에 타인(엄마)의 존재가 안전하게 내면화되고, 외부 대상이 물리적으로 부재하더라도 내면에서 안전함과 충만함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이는 진정한 고독을 위한 필수적인 심리적 기반이 된다.


외로움: 대상에 대한 허기짐과 내면의 공허


반면, '외로움'은 고독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외로움은 외부 대상에 대한 허기짐, 즉 타인과의 깊은 연결이나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느끼는 심각한 공허감과 고통을 의미한다. 이러한 외로움은 주로 유아기에 '통합되지 않은 상태'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거나, '충분히 좋은 엄마'의 보살핌 속에서 안전하게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내면화하지 못했을 때 그 뿌리가 형성되기 쉽다.

아기가 충분히 좋은 엄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너무 일찍 외부 현실에 적응하거나 자신을 '통합'하도록 강요받으면, '거짓 자기(False Self)'를 발달시켜 외부의 요구에 맞추어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경우, 아이는 자신의 내면에서 만족을 찾고 진정한 자기를 발현하기보다, 외부 자극이나 타인의 인정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된다. 그 결과, 외부의 경쟁 대상이 사라지거나, 자신을 채워줄 타인이 부재할 때, 내면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한 심각한 공허함과 함께 존재론적인 불안감이 밀려온다.

'아버지의 딸'이 여성성과 남성성을 제대로 분화시키지 못하고 남성성만으로 살아왔다면, 그녀의 내면에는 온전한 '대상(object)'이 내면화되지 않아 외부 대상 없이는 자신의 존재를 느끼기 어렵고, 결국 외로움밖에 남지 않을 수 있다는 정신분석학적 지적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자신의 내면에 타자를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또한 외부 자극에 대한 불안한 반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변화하는 세상에 대해 유연하게 반응하고 소통하기보다 스스로를 닫아걸고 갇혀 버리며, 외부와의 단절 속에서 더욱 고통스러워한다. 이는 진정한 자기와의 연결이 약화되고, 외부 대상 없이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기 어려운 상태를 반영한다. 외로움은 단순히 혼자 있는 물리적 상태가 아니라, 내면의 결핍과 단절감에서 오는 심리적 고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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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사랑으로 홀로서기, 그리고 노년의 성숙


고독은 외로움과 달리, 외부 대상에 대한 허기짐이나 결핍에서 오는 감정이 아니라, 내면의 풍요로움과 충만함에서 비롯되는 평화로운 상태이다. 유아기에 엄마가 옆에 있다는 전제 하에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내면화한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진정한 고독을 경험할 수 있다. 그들에게 홀로 있는 시간은 고통이 아니라 재충전과 성장의 기회가 된다.

이러한 고독은 '사랑으로 홀로서기'를 가능하게 한다. 이는 외부 대상에 대한 사랑과 동시에, 자신 안에 안전하게 내면화된 타자(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고독한 사람은 물리적으로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다. 오히려 홀로 있는 시간을 통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내려가, 억압되었던 감정이나 무의식적인 욕구를 탐색하고, 진정한 자기와 연결되며, 창조적인 에너지를 얻는다. 그들은 내면의 풍경을 탐험하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며,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시간을 즐긴다.

특히 노년기에 이르면, 우리는 사회적 역할이 줄어들고 물리적으로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경우가 흔하다. 이때 유아기에 '통합되지 않은 상태'에 충분히 머물렀던 경험이 있는지 여부가 고독과 외로움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어린 시절 엄마의 품 안에서 안전하게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내면화한 사람은 노년에도 진정으로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한다. 그들은 외부 대상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나 허기짐 없이, 자신의 내면에서 충만함을 느끼며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성숙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들의 고독은 지혜와 평화가 깃든 깊은 존재의 상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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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고독과 외로움은 한 끗 차이처럼 보이지만, 그 기원과 의미는 천지 차이다. 외로움이 근원적인 결핍과 대상에 대한 허기짐에서 오는 고통이라면, 고독은 내면의 풍요로움과 충만함에서 오는 평화롭고 성숙한 상태이다. 이 근본적인 차이는 유아기 '통합되지 않음'의 상태에서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얼마나 충분히 발달시켰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의식적으로 '멍 때리기'와 같은 '통합되지 않음'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바쁜 일상 속에서 잃어버렸던 내면의 평화와 진정한 자기와 다시 연결될 수 있다. 이는 외로움의 허기짐을 넘어 진정한 고독의 깊은 평화를 경험하게 하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를 지탱해 줄 내면의 힘이 될 것이다. 결국, 진정한 고독은 우리 자신과의 가장 깊은 만남이자, 삶을 온전히 수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성숙한 자아의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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