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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감정이 흐를 뿐이다

기억과 몰입,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지는 시간에 대하여

주여!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묻지 않으면 안다고 생각하지만, 누가 묻기만 하면 설명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시간>의 개념은 뭔가 절박함이 서려 있다. 그의 이 질문은 단순한 철학적 탐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탄식이다. 우리는 시간을 살아가지만, 그 본질을 붙잡을 수 없다. 우리는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염려하며, 현재를 놓치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며, 우리를 그 시간 속에서 구속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다.

우리는 시계를 보며 시간을 측정하고, 달력을 넘기며 물리적 시간을 구분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살아내는 시간은 외부의 물리적 흐름이 아니라, 내면의 감정과 기억, 몰입의 정도에 따라 구성되는 심리적·영적 장이다.


오늘날 심리학과 뇌과학은 이 점을 점점 더 명확히 밝혀내고 있다.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 그리고 그 흐름은 우리의 상처, 몰입, 기억의 밀도, 감정의 정도에 따라 편집된다. 신학적으로도 시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지는 것이며, 기도의 구조 안에서 회개(과거)와 나를 의탁함(현재), 그리고 소망(미래)이라는 리듬으로 짜인다.


시간은 내면에서 살아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시간의 세 차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과거는 기억 속에,

- 현재는 주의 속에,

- 미래는 기대 속에 존재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학자임을 감안하면, 이것은 단순한 철학적 정의가 아니라, '기도의 구조'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과거를 회개하며, 현재를 의탁하고, 미래를 소망한다. 시간은 외부의 시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지는 내면의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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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뇌과학은 이 통찰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한다. 우리의 뇌는 외부의 물리적 시간보다, '기억의 밀도, 감정의 강도, 몰입의 정도'에 따라 시간을 편집한다. 즉,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깊이 머무르느냐에 따라,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예를 들어, 감정적으로 풍부한 하루는 기억할 요소가 많아져 '시간이 길게 느껴지고', 단조롭고 무감각한 하루는 뇌가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짧게 편집된다'. 이는 시간이 물리적 흐름이 아니라, 내면의 감정과 인지 구조에 따라 재구성되는 심리적 장임을 보여준다.


몰입의 순간에는 시간의 흐름감이 사라진다. 우리는 하나님과 깊이 교제할 때, 그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반대로 '고통 속에서는 시간이 멈춘 듯' 느껴지기도 한다. 이처럼 시간은 '감정이 흐르는 방식에 따라 살아지는 것'이며, 우리의 의식과 영혼이 하나님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느냐에 따라 그 흐름은 달라진다.


과거를 길게 살아가는 사람: 트라우마와 시간의 고착


정신분석학은 시간의 흐름을 '감정의 구조와 무의식의 반복'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과거의 감정을 현재에 반복하며, 미래를 그 감정의 연장선으로 상상한다. 시간은 선형적이 아니라, '기억과 욕망, 몰입과 기대가 엮어내는 내면의 직물'이다.


트라우마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시간 속에 고착된 감정의 덩어리'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억압된 기억은 무의식 속에서 현재처럼 작동한다”라고 말했으며, 라캉은 이를 “실재(the Real)의 침입”으로 설명했다. 트라우마는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감정과 인식을 '지배하는 구조'를 만든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과거를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현재를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고,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 이는 시간의 선형적 흐름이 '감정적 고착에 의해 파괴된 상태'다.


과거를 길게 살아간다는 것은, '기억의 밀도와 감정의 강도가 과거에 집중되어 있다'는 뜻이다. 트라우마는 반복적으로 떠오르며, 현재의 인식과 감정을 '과거의 감정으로 덮어버린다'. 이때 현재는 얇아지고, 미래는 닫힌다.


현재의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 : 몰입의 결핍과 감정의 단절


몰입(flow)은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제시한 개념으로, '자기와 시간의 경계가 사라지는 상태'를 말한다. 몰입은 현재의 감정을 풍성하게 만들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반대로 몰입이 결핍된 상태에서는 현재가 '얇고 단절된 순간'으로 느껴진다.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은 몰입하기 어렵다. 그들은 현재의 자극에 집중하지 못하고, 과거의 감정에 끌려간다. 이때 현재는 '심리적 두께를 잃고', 시간은 단절된다.


현재의 시간이 짧다는 것은, '감정의 강도가 낮고, 기억의 밀도가 희박하다는 뜻'이다. 이는 뇌가 현재를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는 상태이며, '심리적 무감각 또는 정서적 마비'로 이어질 수 있다.


미래의 시간이 없다는 것: 상상력의 붕괴와 희망의 결핍


심리학에서 미래는 '기억과 상상력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기대하며, 계획한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상상력을 억압한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위협적인 것으로 느껴지며, '기대 대신 회피가 작동한다'.


우울증 환자들은 흔히 “앞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라고 말한다. 이는 '미래의 시간 자체가 사라진 상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이는 '리비도(생의 에너지)의 위축'이며, 삶의 방향성과 의미가 상실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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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하나님 안에서 재구성된다


신경과학자 바렐라는 후설의 현상학을 뇌과학으로 연결하며, '작동 모듈(OM)'이 유지되는 짧은 시간(100~300ms)이 바로 '의식의 ‘지금’을 구성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신학적 묵상에서는 이 리듬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에 몰입할 때,


- 시간은 멈춘 듯 흐르고,

-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시간의 장'이 열린다.


이 시간은 단순한 ‘지금’이 아니라, '영원과 연결된 현재'이다. 우리는 그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자기 존재를 정화받으며', '성화의 길을 걷는다.'


마무리 :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감정이 흐른다


우리는 시계를 보며 시간을 측정하지만, 실제로는 '감정을 통해 시간을 살아간다'. 과거의 상처는 시간을 고착시키고, 현재를 얇게 만들며, 미래를 닫는다. 그러나 감정이 회복되고, 몰입이 생기며, 희망이 다시 피어날 때,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시간은 외부의 것이 아니라, '내면의 감정이 만들어내는 흐름'이다. 그리고 그 흐름은 치유와 회복, 사랑과 의미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지는 시간은 단순한 흐름이 아니라, '은혜의 직물'이며, 우리는 그 위에 기도의 흔적을 남기고, 회개의 실을 엮으며, 소망의 무늬를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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