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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시간, 심리적 시간, 그리고 음악

감정의 중력과 시간의 리듬

(표지 그림 :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

시간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시간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기독교는 태초의 창조를, 물리학은 이에 대해 ‘빅뱅’이라는 사건을 제시한다. 우주의 탄생, 즉 공간과 물질, 에너지와 함께 '시간도 함께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시간은 공간과 분리된 절대적 흐름이 아니라, '공간과 얽혀 있는 구조적 성질'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이 점을 명확히 한다.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다'. 중력이 강한 곳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속도가 빠를수록 시간은 느려진다. 이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GPS 위성의 시간 보정에서 매일 실증되고 있는 현실이다.

[신의 과학]의 저자, MIT에서 물리학과 지질학을 전공한 과학자제럴드 슈뢰더(Gerald L. Schroeder)에 의하면 창세기 창조의 첫날은 80억 년, 둘째 날은 반감기에 해당하는 40억 년, 셋째 날은 20억 년에 해당한다고 말하는 것도 중력과 시간과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처럼 시간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같이, '물리적 조건에 따라 다르게 흐르는 상대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시간의 상대성은 마음의 심리학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감정의 중력과 심리적 시간


이 물리적 시간의 상대성은 인간의 내면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우리는 모두 '심리적 시간'을 살아간다.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은 특정 기억에 감정이 몰려 있고, 그 감정의 밀도는 마치 중력처럼 시간의 흐름을 왜곡시킨다. 중력이 큰 별에서 지구에서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듯이, 감정의 중력이 높은 곳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그곳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현재처럼 생생하고 무겁게 존재한다.


그래서 사람은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수시로 과거로 회귀한다. 과거의 정서가 현재의 사건을 해석하는 렌즈가 되어, 현실의 나이에 맞는 판단을 하지 못한다. 환갑이 넘은 사람도 유아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는 단순한 미성숙이 아니라, '감정의 중력이 과거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는 단지 감정의 덩어리가 아니라, '시간이 압축된 장소'다. 그 안에는 수많은 스토리들이 응축되어 있다. 이 스토리들을 하나씩 풀어내면, 과거에 묶여 있던 감정이 '지금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로 전환'된다. 그렇게 되면, 시간은 자유로워진다. 과거에 머물러 있던 시간관념이 '현재의 시점으로 끌어올려지고', 사람은 비로소 현실을 응집력 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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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해방과 미래의 회복


유아기와 아동기의 상처는 사람을 과거에 묶어둔다. 그 감정이 풀리지 않으면, 현실을 온전히 살아갈 수 없고, 미래에 대한 예기(豫期)를 가질 수 없다. 미래는 단지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상상력과 희망의 공간'이다. 그러나 과거에 묶여 있는 사람은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 시간은 과거에 고정되고, 현재는 얇아지고, 미래는 닫힌다.


이때 필요한 것이 '리듬'이다. 시간은 단지 흐름이 아니라, '리듬으로 살아지는 것'이다. 철학자 후설은 시간의식을 세 가지 구조로 설명했다:


- 과거는 '보유(retention)',

- 현재는 '지속(presence)',

- 미래는 '예기(protention)'.


이 세 가지가 연결될 때, 인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다. 리듬은 이 연결의 방식이다. 리듬은 과거의 흔적을 유지하면서, 현재를 살아내고, 미래를 기대하게 만든다.


음악과 시간의 구조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다. 고전 음악이 듣기 편한 이유는, 과거의 음과 현재의 음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다음의 음이 '예측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다음 음을 기대하고, 그 기대가 충족될 때 '정서적 안정감'을 느낀다. 이는 후설의 시간 구조와 정확히 일치한다.


반면 현대음악은 듣기 어렵다. 기대음이 없고,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이 깨져 있으며, 미래의 음을 예측할 수 없다. 이는 단지 음악적 난해함 때문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불안과 복잡성'을 반영한 결과다. 현대음악은 미적 아름다움보다, '불확실성과 분열된 자아'를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는 현대음악을 들을 때, 음들이 연속성 없이 하나씩 분절되어 우리의 귀에 들어온다. 이는 일시적인 '정서적 분열'을 감수하는 과정이다. 음악은 더 이상 흐름이 아니라, '단절된 조각들'이 되어버린다. 현대음악을 듣는 순간만큼은 청중은 분열된 시간 속에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심리적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


시간의 회복과 존재의 통합


결국 시간은 단지 물리적 흐름이 아니라, '존재의 리듬'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자기를 구성'한다. 트라우마는 시간을 압축시키고, 감정을 고정시키며, 존재를 분열시킨다. 그러나 그 스토리를 풀어내고, 감정을 해방시키면,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그 흐름은 리듬이 되고, 리듬은 음악이 된다. 음악은 시간의 회복이며, 존재의 통합이다. 우리는 고전 음악처럼, 과거를 보유하고, 현재를 유지하며, 미래를 예기할 수 있을 때,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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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시간은 감정의 중력 속에서 살아진다


물리학은 시간이 중력에 의해 왜곡된다고 말한다. 심리학은 감정의 중력이 시간의 흐름을 바꾼다고 말한다. 철학은 시간이 리듬으로 살아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술은 그 리듬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다양한 시간을 살아내는 존재'다. 그 시간은 과거의 상처를 품고, 현재의 감정을 유지하며, 미래의 희망을 예기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그 자유는, 관계 속에서, 음악 속에서, 리듬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참고 유튜브 : <시간과 공간의 관계성> 최정미의 뇌과학, https://youtu.be/0cahXO2K41E?list=PLNbh1G_0N6OyoIy4ncJ-fH__f1Qiy9Cb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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