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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후 4일, 첫 단추 잘못 끼운 '아스퍼거 증후군'

『나의 라디오 아들』(바바라 러셀 (Barbara LaSalle), 2004 한언)의 벤의 사례를 통해, 아스퍼거인의 삶을 ‘출생 후 첫 4일’이라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풀어내고자 한다. 이 책은 태내와 태밖의 어머니 동일성 확보 실패가 어떻게 존재의 연속성을 깨뜨리고, 평범함을 잃은 특별한 삶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출생 후 첫 4일,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결과 — 아스퍼거


벤은 모유 수유 과정에서부터 어머니와의 접촉에 어려움을 보였고, 감각적 반응이 일반적인 유아와 달랐다는 점이 언급된다. 이는 태내에서 경험한 감각적 일관성이 태밖에서 이어지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어머니 바바라 러셀은 벤이 자신의 품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눈을 맞추지 않으며, 촉각적 접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며 혼란을 겪는다. 이는 태내의 엄마와 태밖의 엄마가 감각적으로 동일한 존재로 인식되지 못한 상태, 즉 존재 연속성의 실패를 시사한다.

벤은 자신만의 규칙과 세계를 고집하며, 외부와의 접촉을 거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생후 초기부터 세계를 위협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존재의 구조를 암시한다.


태어남은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어야 한다. 태내의 엄마와 태밖의 엄마가 동일한 존재로 인식되어야만, 아이는 세상이라는 낯선 공간을 안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첫 4일의 과제가 실패할 때, 존재는 균열을 겪는다. 감각은 흩어지고, 관계는 구조화되지 못하며, 자아는 분화되지 못한 채 덩어리로 남는다. 아스퍼거는 바로 그 실패의 징후다 — 존재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을 때, 삶은 평범함을 잃고 특별함이라는 이름의 고립으로 나아간다.


태내와 태밖의 동일성 — 존재 연속성의 첫 과제


태내의 어머니는 절대적이다. 그녀는 온도, 리듬, 영양, 감정의 흐름을 모두 제공하는 전체적 환경이다. 아이는 그 안에서 분화되지 않은 감각 덩어리로 존재하며, 세계와 자아의 경계는 없다. 그러나 출생은 그 경계를 만들어낸다. 아이는 외부 세계에 던져지고, 태밖의 엄마가 태내의 어머니와 동일한 존재로 인식되어야만, 이 낯선 세계는 안전한 연속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야만 아이는 어머니를 매개로 광대한 외부 세계를 상징화한다.


첫 4일은 이 동일성을 확보하는 결정적 시기다. 엄마의 품, 목소리, 눈빛, 냄새, 촉감 — 이 모든 것이 태내의 기억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연결이 실패할 때, 아이는 세계를 단절된 공간으로 인식한다. 그는 감각을 통합하지 못하고, 관계를 신뢰하지 못하며, 존재의 연속성을 잃는다. 아스퍼거는 바로 이 실패의 흔적이다.


벤의 이야기 — 너무 특별해서 평범하지 못한 삶


『나의 라디오 아들』의 벤은 태어난 지 18개월 만에 글을 읽었다. 네 살이 되기도 전에 지도 정보를 암기했고, 어른보다 더 논리적으로 말했으며, 라디오 방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도 틀리지 않고 따라 말했다. 그의 머릿속은 살아있는 박물관 같았고, 그는 어디서든 주목받았다.

그러나 벤은 눈의 초점을 맞추지 못했고, 톤 없는 목소리로 지나치게 현학적인 말을 했으며, 음식량을 조절하지 못했고, 자신의 규칙을 끝까지 고집했다. 그는 타인의 표정을 읽지 못했고, 정서의 흐름을 해석하지 못했다. 언어는 있었지만, 감촉이 없었다. 그의 세계는 정돈되어 있었지만, 따뜻하지 않았다.


벤은 태내의 엄마와 태밖의 엄마를 동일한 존재로 인식하지 못한 경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아이였다. 그는 출생 이후의 세계를 낯선 공간으로 받아들였고, 그 공간은 위협이었다. 그래서 그는 세계를 지성을 사용하여 구조화하려 했고, 감정보다 논리에 의지했다. 그의 삶은 평범하지 못했고, 너무나도 특별했다.


아스퍼거 — 감각은 있으나 공감이 닿지 않는 언어


아스퍼거 아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언어는 종종 공명을 잃는다. 말은 존재하지만, 감각의 깊이가 닿지 않는다. 그는 타인의 표정을 읽지 못하고, 정서의 미묘한 흐름을 해석하지 못한다. 돌토의 시선으로 보면, 그는 어머니를 ‘전체 대상’으로 통합하지 못한 채 성장한 아이이다. 감각적 동일성은 부분적으로 형성되었으나, 관계의 전체성이 결여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관계를 이해하기보다 구조화하려 하고, 감정보다 논리에 의지한다. 그의 세계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정돈되어 있지만, 일반적이지 않고 따뜻하지 않다. 언어는 있지만 감촉이 없는 언어다. 언어가 감촉이 없다는 말은 상대방에게 말의 주파수가 퍼져나가지 못하여 공명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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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준화되지 못한 능력 — 인간 잠재력의 비대칭적 발현


인간의 잠재력은 균형 속에서 발현된다. 감각, 정서, 인지, 사회성 — 이 모든 능력은 서로를 보완하며 발달한다. 그러나 아스퍼거인은 이 균형을 잃는다. 특정 능력은 과도하게 발달하고, 다른 능력은 미성숙한 채 남는다. 벤은 기억력과 논리력에서 천재성을 보였지만, 감정과 관계에서는 유아기적 상태에 머물렀다.


이러한 삶은 너무 특별해서 평범하지 못한 삶이다. 그는 일상적인 삶을 누리지 못했고, 보통사람이 경험하는 사회적 유대와 감정적 교류를 잃었다. 그의 능력은 때와 기회를 기다리는 다른 잠재력들과 평준화되지 못한 채, 고립된 천재성으로 남았다. 이러한 천재성은 축복이 아니라, 고립이다.


존재의 모호함 — 첫 단추의 실패가 만든 삶


아스퍼거인에게는 존재의 모호함이 중요한 특징이다. 그는 세계와 자아의 경계를 분명히 하지 못했고, 감각과 관계의 흐름을 통합하지 못했다. 그의 삶은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결과이며, 그 단추는 바로 출생 후 첫 4일의 실패다. 태내의 엄마와 태밖의 엄마의 동일성 확보 실패는 존재의 연속성을 깨뜨렸고, 그 깨진 존재는 평범함을 잃고 특별함이라는 이름의 고립으로 나아갔다.


벤의 삶은 그 증거다. 그는 너무나도 특별했지만, 그 특별함은 평범함을 잃은 대가였다. 그는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고, 세계는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의 언어는 감각을 담지 못했고, 그의 감각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는 존재의 모호함 속에서 살아갔다. 그는 감각은 있으나 공감이 닿지 않는 언어, 정돈되어 있지만 따뜻하지 않은 세계, 너무 특별해서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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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 감각은 있으나 고통을 모르는 삶


벤은 고통을 느끼는가? 아니, 그는 고통을 '해석하지 못한다'. 그의 감각은 살아 있지만, 그 감각은 '정서적 맥락 없이 흘러간다'. 소리의 크기, 빛의 강도, 피부에 닿는 온도 — 이 모든 자극은 그에게 도달하지만, 그것이 '불편함인지, 슬픔인지, 외로움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는 사람들이 일출장면을 보기 위해 정동진을 가는 이유를 알지 못하며, 저녁노을이 질 때 아름다움이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게 되는 외로움, 또는 하루가 넘어가는 아쉬움을 일체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고통을 겪지만, '고통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부르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존재론적 모호함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고통 없는 삶을 사는가? 아니다. 그는 '고통의 언어를 모르는 삶'을 산다. 고통은 그에게 '무명의 감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설명되지 않고, 공유되지 않으며, 위로받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삶은 '고통의 부재가 아니라, 고통의 고립'이다.


그렇다면 그는 삶의 의미를 상실한 것인가? 아니다. 그는 '삶의 의미를 다른 방식으로 구성한다'. 벤에게 의미란 '질서와 반복, 구조와 예측 가능성'이다. 그는 감정 대신 규칙을 믿고, 관계 대신 패턴을 따른다. 그의 삶은 '정서적 교류가 없는 대신, 논리적 안정성으로 유지된다'.


벤은 '존재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는 태내와 태밖의 동일성을 확보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존재의 연속성이 깨졌다. 그는 덩어리로 존재하며, 분화되지 않은 채로 살아간다. 그의 자아는 감각적이지만, 사회적이지 않다. 그는 '자기 안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사람'이다.


그의 삶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고통은 '이름 없는 고통'이다. 그는 그것을 말하지 못하고, 나누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고통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없어 혼자 감당하는 사람'이다.


벤은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다는 느낌을 공유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누구와 함께 나눌 수 있는, 또는 주고받을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 그의 삶은 '존재의 모호함 속에서 유지되는 삶'이다. 감각은 있으나 공감이 닿지 않고, 언어는 있으나 감촉이 없다. 그는 '너무 특별해서 평범하지 못한 삶', '너무 독특해서 함께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고통을 말할 수 없을 때, 고통은 없는 것인가?”

“감정이 닿지 않는 세계에서도, 삶은 계속되는가?”

“존재의 모호함 속에서도,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 있는가?”


벤은 그 질문의 몸으로 살아간다.

그는 말하지 않지만, 존재한다.

그 존재는, '우리의 이해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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