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약 699만 명의 경계선 지능장애자가 존재한다. 전체 인구의 약 13.6%에 해당하는 이들은 지능지수(IQ) 71~84 사이에 있으며, 지적장애로 분류되진 않지만 평균 지능보다 낮아 학습과 사회적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들은 아동기부터 성인기까지, 사회의 기준에서 벗어난 속도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 느림은 결함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매우 정상적인 속도다.
경계선 지능장애자는 저능아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많은 능력과 재능을 잠재적으로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그 능력이 현실화되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단순한 교육의 부족이나 환경의 열악함이 아니라, 존재의 모호함 속에서 그 능력이 억눌려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경계선 지능장애를 단순한 인지적 결함이 아닌, 존재의 모호함 속에서 잠재력이 억눌린 상태로 바라보며, 그 회복 가능성과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아동을 위한 심리상담센터에 경계선 지능장애자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 하나의 덩어리로 존재한다. 감각과 정서, 인지와 관계가 분화되지 않은 채, 태내의 엄마와 절대적 일체감을 이루며 살아간다. 그러나 출생은 그 일체감에 균열을 만든다. 아이는 외부 세계에 던져지고, 태내의 엄마와 태밖의 엄마가 동일한 존재로 인식되어야만, 세상은 낯설지 않은 연속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첫 4일의 과제가 실패할 때, 존재는 모호해진다. 감각은 흩어지고, 관계는 구조화되지 못하며, 자아는 분화되지 못한 채 덩어리로 남는다. 경계선 지능장애는 바로 그 실패의 흔적이다. 그는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을 구성하지 못한 채, 모호한 존재로 살아간다.
박찬선은 그의 저서 『경계선 지능을 가진 아이들』에서 경계선 지능장애를 “느린 학습자”로 정의한다. 지능지수는 70~85 사이. 지적장애로 분류되진 않지만, 평균 지능보다 낮아 학습과 사회적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그는 저능아가 아니다. 원래 IQ가 낮은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많은 능력과 재능을 잠재적으로 보유하고 있다.
그의 문제는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존재의 모호함 속에서 그 능력을 현실화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감각은 있지만, 감정의 흐름을 해석하지 못하고, 관계는 있지만 의미를 붙이지 못한다. 그의 삶은 정서적 연결이 결여된 구조적 존재다.
경계선 지능장애자는 느리다. 그러나 그 느림은 결함이 아니라, '그에게는 매우 정상적인 속도'다. 문제는 그 속도가 사회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의 속도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속도로 이해하며, 자신의 속도로 반응한다.
그렇기에 그의 주변에 있는 양육자나 교육자는 '그의 속도에 맞춰 적응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의 속도를 존중받을 때, 그는 안정감을 느끼고, 그 속도는 차츰 빨라질 수 있다. 느림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존중받을 때 변화 가능한 리듬'이다.
그에게는 그의 잠재적 능력과 현재적 느림의 상태를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눈높이에 맞춰 줄 수 있는 공감자'가 필요하다. 그런 공감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는 자신의 속도나 이해 능력이 느리지만 계속 작동하여, 내면에 있는 '존재 상승 욕구'가 그의 본래적 능력을 찾아낼 수 있도록 조금씩 발달해 간다.
박찬선은 『경계선 지능과 부모』에서 부모의 역할을 강조한다. 부모는 아이의 느림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의 속도에 맞춰 기다려주는 존재'여야 한다. 그 기다림은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존재를 꿰매는 작업'이다.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다시 풀고, 올바르게 끼워주는 과정이다.
그러는 중에, '탁월한 공감능력을 갖춘 교육자, 양육자, 또는 지도자'를 만남으로써, 그는 내면을 공감받는 감격을 경험하게 된다. 그 감격은 그의 내면을 재작동시키고, 존재 상승 욕구를 작동하게 만든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깨닫기 시작한다.
그 깨달음은 존재의 모호함을 벗어나, '존재의 명료함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 길은 느리지만, 가능하다. 그 길은 고립되어 있지만, 열려 있다. 그 길은 혼자 시작되지만, 함께 걸어야 한다.
하나의 가능성은 초월적 체험이 내면의 문을 여는 순간이다. 그것은 신과의 만남일 수도 있고, 원초적 감각의 회복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인지하는 경험일 수도 있다. 종교적 각성, 예술적 몰입, 혹은 자연과의 깊은 접촉 속에서 그는 자신 안에 잠들어 있던 존재의 동기를 깨우게 된다.
이러한 변화가 가능한 이유는, 존재의 초기 단계에서 결핍되었던 어머니와의 정서적 접촉을 대신할 만큼 강력한 감각적 충만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 체험은 단순한 감동을 넘어, 존재의 균열을 메우는 감정적 재료가 되어준다. 그 순간, 그는 세계와의 연결을 다시 짜 맞춘다. 이전까지 낯설고 단절된 공간이었던 외부 세계가, 이제는 자기 존재의 연장선으로 느껴진다. 그는 존재의 모호함을 벗어나, 자기중심을 회복하는 길 위에 선다.
그 회복은 단순한 인식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감각의 재통합이며, 관계의 재구성이다. 그는 다시 살아 있는 존재로, 느리지만 분명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 걸음은 아직 서툴고 조심스럽지만, 자기 자신을 향한 가장 진실한 움직임이다.
경계선 지능장애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느린 속도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인내력'이다. 그 인내는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믿는 힘'이다. 그는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다. 그는 둔감해 보이지만, 내면은 계속 작동하고 있다.
그를 돌보는 양육자, 교육자, 주변인들의 '시각 변화 또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들은 결핍의 시선이 아니라, '잠재력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 시선이 바뀔 때, 그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존재의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다.
경계선 지능장애자는 언젠가는,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감각과 감정, 관계와 언어가 연결되는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깨닫는다. 그 깨달음은 존재의 모호함을 벗어나, 존재의 명료함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 길의 첫걸음은,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시작된다'.
그 시선은 공감이고, 그 공감은 존재의 회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