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시대 위나라의 왕 영공과 미자하의 일화는 ‘여도지죄(餘桃之罪)’라는 고사성어로 남아 있다. 한비자의 「세난(說難)」 편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총애와 비난이 얼마나 쉽게 뒤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고전적 사례다.
미자하는 왕의 총애를 받던 미소년이었다. 어느 날, 왕과 함께 과수원을 거닐던 중 복숭아 하나를 따서 한입 베어 물었다. 그 맛이 너무 좋아, 그는 먹던 복숭아를 왕에게 건넸다.
왕은 감탄하며 말했다.
“너는 이렇게 맛있는 복숭아를 내게 양보하는구나.”
그러나 세월이 흘러 왕의 총애가 식자, 미자하가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순간 왕은 그를 비난했다.
“이놈은 예전에 감히 먹던 복숭아를 내게 먹으라고 주었다.”
같은 행동이 칭찬에서 죄로 바뀌는 이 극적인 반전은, 단순한 변덕이 아니라 <경계선 성격장애(BPD)의 심리적 구조>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경계선 성격장애의 핵심은 '감정의 불안정성과 관계의 양극화'다.
사람을 이상화하다가 갑자기 폄하하고, 사랑과 증오 사이를 오간다.
미자하의 복숭아는 그 자체로는 변하지 않았지만, 왕의 감정 상태에 따라 '의미가 뒤바뀌었다.'
이런 감정의 급변은 현대의 인간관계에서도 자주 목격된다.
예를 들어, 어떤 성도가 목사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으며 말한다.
“우리 목사님은 어쩜 저렇게 내 속사정을 다 아시고, 내게 꼭 맞는 말씀을 주실까.”
그러나 어느 날, 그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자 그는 말한다.
“목사님은 설교 중에 매번 나를 공격했다. 나를 콕 집어서 사람들에게 망신 주려고 설교하실 때마다 나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온 것 같아.”
이러한 반응은 단순한 실망이 아니라, '관계의 구조 자체가 무너지는 방식'이다.
흔한 말로 '변덕'이라 한다. 그 변덕은 특히 인간관계를 뒤집는 변덕이다. 그것도 한 방향의 변덕이다. 경계선 장애자는 한동안 나쁘게 보던 사람을 갑자기 좋게 보는 경우는 없다. 반대로 누군가를 왕처럼 대접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거지취급을 하는 것이 경계선 장애자의 변덕이다.
그것은 경계선 성격장애의 '기억의 왜곡'과 '감정의 투사'라는 특징 때문이다. 자신이 공격했음에도, 나중에는 “상대가 나를 공격했다”라고 느낀다. 이것은 틀림없는 유아기의 심리이다. 돌토의 입장에서 보면, 경계선 성격 장애는 출생 후 첫 4일 동안에 태중의 엄마와 태밖의 엄마 동일성을 확보하지 못한 결과이다. 아기는 심리적 생존이 절박하여 자신을 안아주고 품어주는 엄마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아기의 절박함과 절대적 의존을 엄마가 제대로 품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품의 냉정함을 경험한다면, 엄마에게 기대했던 만큼 엄마에 대한 분노를 가지게 된다.
멜라니 클라인은 생애 첫 6개월의 심리상태인 <편집-분열적 자리>를 언급하면서, 그때는 엄마와 아기가 융합상태이기 때문에 자신과 대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시기이다. 아기가 엄마의 젖가슴을 빨아대면서 엄청난 공격성, 매우 원초적인 공격성을 발휘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타가 구별되지 않는 융합상태에 있기 때문에 반대로 생각하게 된다.
'엄마의 젖가슴이 나를 공격했다.'
유아기의 심리적 상태를 이해한다면, 성인이 되어 기억하고 있는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할 때, 청자는 그 의미를 바꿔서 이해해야 바른 이해를 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상담 상황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상담자가 경계선 성격장애자를 대할 때는 그 환자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환자 자신을 억울하게 만든, 또는 자신을 공격한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는 반대로 뒤집어서 이해해야 한다. 또는 경계선 환자가 말하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 상담자는 정반대의 두 가지 이야기로 들어야 한다. 마치 여도지죄에서 왕의 이야기가 달라지듯이, 또는 설교자가 성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설교를 두 방향으로 알아듣듯이, 상담자도 경계선 환자의 이야기의 양면을 다 염두에 둬야 한다.
상담자가 경계선 성격장애자에 대해 놓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경계선 환자가 말하는 가해자는 곧 피해자 일 수도 있으며, 자신이 피해자로 등장하지만 사실은 가해자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이런 일은 오늘날 정치현장에서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일들이 오늘날 현실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경계선 환자는 1~2% 이지만, 정치현장에서는 50~60%를 넘어가고 있는 것을 보라.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경계선 환자를 정치계로 다 모이니까, 우리의 일상이 안전하기도 하다.
이들은 자신의 공격성을 외부로 투사하는 과정에서, 공격은 자신이 했는데 동시에 자신이 피해자로 느끼면서 관계를 왜곡한다.
경계선 성격장애는 단순한 기분의 문제를 넘어, '자기 존재의 경계가 불안정한 상태'다. 자기와 타인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관계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왕은 미자하를 총애할 때, 그를 이상화했다. 그러나 총애가 식자, 그는 미자하를 철저히 폄하했다. 이러한 관계의 급변은, 자기감정의 중심을 타인에게 두는 '불안정한 자기 구조'에서 비롯된다.
상담현장에서 상담자가 경계선 성격장애자를 만나면 존재의 위협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환자는 자타 구별이 안되기 때문에 상담자에 대한 태도가 어느 순간 급변할 수 있다. 경계선 성경장애자가 상담자를 이상화를 한 크기만큼의 공격성을 상담자에게 발휘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 상담자가 나한테 상담을 받아야 될 것 같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경계선 성격장애자가 느끼는 억울함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 전체가 부정당했다고 느끼는 깊은 심리적 충격이다. 유아기, 특히 생후 첫 며칠 동안 절대적 의존이 필요한 시기에 엄마로부터 충분한 품을 받지 못했을 때, 아기는 생존의 위협을 느낀다.
이때의 감정은 단순한 슬픔이나 분노를 넘어선다. “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경험은 “나는 존재할 자격이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 억울함은 자기 존재의 붕괴를 동반한 감정이며, 성인이 된 이후에도 관계 속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된다.
그래서 경계선 환자는 누군가가 자신을 충분히 품어주지 않거나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그 사람을 향해 극단적인 분노와 억울함을 동시에 투사한다.
이 억울함은 종종 “내가 피해자다”라는 강한 확신으로 나타나며, 자신이 가해한 행동조차도 “상대가 나를 먼저 공격했다”는 기억의 왜곡과 감정의 투사로 바뀌게 된다.
상담자는 이 억울함을 단순한 감정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존재의 위협을 경험한 흔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억울함 속에는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깊은 자기부정이 숨어 있으며, 그것을 해소하지 않으면 관계는 반복적으로 파괴된다.
따라서 상담자는 경계선 환자의 억울함을 공감하면서도 경계 짓고, 그 감정의 뿌리를 함께 탐색하는 작업을 통해 자기 존재의 회복을 도와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많이 다르다. 경계선 환자의 여러 특징을 이해하고 나면, 상담자로서 가장 피하고 싶은 환자는 바로 경계선 성격장애자이다. 그는 상담자를 언제 공격할지 어떻게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에 상담자는 노출되는 것이며, 상담자와 환자의 관계를 어떻게든 뒤집으려는 시도를 하는 사람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을 바꾸기 때문이다.
경계선 성격장애는 누군가의 병명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관계 속에서 겪을 수 있는 '감정의 흔들림'이다.
복숭아를 건넨 미자하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지만 왕의 감정은 변했고, 그 감정은 기억을 바꾸었고, 그 기억은 관계를 무너뜨렸다.
경계선 성격장애자는 그 복숭아 앞에서, 자기감정의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