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삶은 왜 '쉬운 사과말 한 줄'도 버거운 지옥이 되었는가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에너지를 쪼개 씁니다. 하지만 때로 가장 사소한 일 앞에서 모든 기력이 소진되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산행 후 들이닥친 피로와 추위 속에서 정신을 놓았다가, 중요한 모임 시간을 훌쩍 넘겨버린 날이었습니다. 그저 "피곤해서 못 가겠어요"라고 문자 한 줄 보내면 될 일인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힘을 내 짝꿍에게 전화하고, 다시 카카오톡으로 '장황한 상황 설명과 사과'를 쓰는 데는, 마치 한 달치 에너지를 다 쓰는 것 같았습니다.
왜일까요? 왜 단순한 소통 행위가 나에게는 피를 말리는 고통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나의 에너지가 이미 '외부의 블랙홀'에 심각하게 흡수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블랙홀은 다름 아닌 '관계'의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옆에 앉아 돌처럼 멍하니 있었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더 외롭고, 더 많은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나는 다음과 같은 꿈을 꿨습니다.
다른 사람은 의사소통도 잘하고 글을 정확하게 썼지만, 나는 잘 못하고 나의 말을 글로 쓰려고 할 때마다 잘 써지지 않는다
나의 내면은 두 방향으로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었습니다. 나는 상담자에게 이 꿈과 어떤 연관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날 새벽잠을 2시까지 못 자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다음날 교회에서 난타 발표가 있었기 때문에 몸이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상담자는 두 가지 일(글 쓰는 일과 난타발표)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에너지 배분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했습니다. 상담자는 나의 적은 에너지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현장에 나누어 쓰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쪽은 '몸의 언어'인 난타였습니다. 무작정 두드리고, 울리고, 몸을 흔들어 억눌린 감정의 댐을 터뜨리는 행위였습니다. 특히 나는 직장 생활과 조직에서 겪었던 억압을 풀기 위해, 육체의 움직임과 함께 시원한 해방감을 갈망했습니다.
다른 한쪽은 '머리 에너지가 필요한 언어'인 글쓰기였습니다. 내 안의 가장 깊은 곳, 시어(詩語)가 숨어있는 심연에서 힘겹게 의미를 끄집어내는 행위였습니다. 나는 시인으로서 좋은 시를 쓰기 위해 시적 영감, 다중적 의미를 가진 시어를 찾는 데에 엄청난 에너지를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문제는 이 두 에너지가 공존할 수 없다는 비극이었습니다. 난타를 위한 육체의 에너지를 끌어 쓰면, 글을 쓸 머리의 에너지가 멈춥니다. 이것이 나의 딜레마였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내 탓'을 했습니다. '나는 왜 이 간단한 것도 통합하지 못하고, 남들처럼 훌륭하게 해내지 못하는 걸까?'
하지만 상담자는 말했습니다.
"그건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에너지를 나눠 써야 하는 한계 때문입니다. 원래 내면 깊은 곳에 큰 에너지가 있는데, 많은 부분 억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어를 건져 올리든가 또는 카톡 문자를 쓰는 일조차도 힘들어하는 이유는 그동안 억압된 에너지 안, 깊은 심연에 침전되어 있는 언어를 건져 올리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겁니다. 이 꿈을 꾸는 이유는 이 두 개의 작업을 연속성을 가지고 통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억압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사용하고 있는 많지 않은 에너지 중 상당 부분이 알 수 없는 외부로 새고 있습니다."
이 말이 나의 삶을 관통했습니다. 내 에너지가 새는 곳, 그곳에 바로 '블랙홀'이 있었습니다.
내 삶의 블랙홀은 나에게 '죄책감'을 심어, 나를 그 주변에 머물게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선한 이웃으로 가장하여 성경의 진리를 뒤집어 악용했습니다.
사면초가의 어려움에 둘러 싸여 있는 그녀는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 실천'을 요구했습니다.
"성경에 약한 자를 돌보라고 했잖아요. 내가 지금 힘든데, 당신은 왜 나를 돌보지 않나요? 왜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외면하고 살아요?"
내가 그녀 가까이 있을 때 내 지르는 히스테릭한 비명 소리, 1시간씩 이어지는 전화 통화, 전남편에게 당한 아픈 이야기를 들어주며 나를 자신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부과했습니다. 심지어 나는 교회 공동체에까지 부탁해 그녀를 도울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왜 나는 그녀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그녀가 '성경이라는 무기'와 '불쌍함이라는 페르소나'를 통해 나에게 죄책감을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내게는 없는 남편도 있고, 경제적으로도 나보다 넉넉한 사람이니 나에게 베풀어야 해."
"내가 이렇게 불쌍한데, 외면하면 당신은 천국에 갈 자격이 없어."
나는 그녀에게서 벗어날 때마다 '내가 너무 심했나,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나' 하는 자기 비난에 시달렸습니다. 상담자가 정리해 주는 해석에 따르면, 그녀는 바로 타인의 죄책감을 먹고사는 '에너지 뱀파이어'였습니다.
상담자는 사도바울의 "모든 사람과 화평하라"는 성경 말씀을 재해석해 주었습니다. 그 말씀은 모든 사람과 다 잘 지내라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마다 잘 지낼 수 거리가 다른데, 어떤 사람은 5미터에 있어도 예뻐 보이지만, 어떤 사람은 20미터에 두고 봐야 예뻐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20미터에 있어야 할 사람이 5미터 거리에 있다면, 그 사람을 밀어내야 한다는 겁니다. 반면 5미터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20미터에 있다면, 그와의 거리를 좁힐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상담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5미터 미인입니다. 선생님은 그녀를 100미터 미인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녀는 5미터 미인: 바싹 다가와 자신의 매력(불쌍함, 신앙심)을 과시하고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어 결국 자기 주변에 머물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100미터 미인으로 둘 때, 서로 잘 지낼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내가 그녀에게 전화를 끊고, 거리를 두기로 결심한 행위는 '나의 생존'을 위한 거룩한 결단이었습니다. 더 이상 그녀의 변덕과 감정의 폭풍에 내 귀한 에너지를 내어줄 수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 결단은 내 무의식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나는 또 다른 꿈에서 '어머니 집과 이어진 나의 집 마루 앞에서 소변을 보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상담자의 해석에 따르면, 마루는 내면과 외부의 경계, 아이와 어른의 경계입니다. 그 앞에서 소변을 본다는 것은, '억압당했던 유년기의 감정을 자유롭게 흘려보내고, 어른으로서 내 경계를 스스로 세우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두 개의 꿈과 난타발표, 카톡 문자 보내기의 어려움, 그리고 100미터 미인으로 밀어내게 된 그녀, 한 시간의 상담 시간에 각각 다른 요소들로 두서없이 튀어나온 이야기들이었지만, 상담이 마무리되는 시간에는 하나의 흐름으로 다 모아졌습니다.
우리는 때로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합니다. 남편에게는 이해받지 못해도, 동료에게는 인정받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내 영혼을 갉아먹는 관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안 돼'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남을 위한 '헌신'이 아니라, 나를 위한 '섬김'입니다. 난타를 하든 글을 쓰든, 나의 에너지를 나 자신을 위해 온전히 쓰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도 혹시 5미터 이내로 너무 가까이 다가와 당신의 에너지를 훔쳐가는 '블랙홀'이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그 거리를 객관화시키십시오. 그리고 '나는 100미터의 거리에서도 충분히 아름답다'라고 스스로에게 선언하십시오. 그 용기가 당신의 억눌린 에너지를 터뜨리고, 삶을 비로소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