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는 못하지만, 일단 자유여행.

by 공기북

20대 때는 ‘여행만큼 삶에서 큰 이벤트는 없다.’라는 생각으로 해외여행이든 국내 여행이든 부지런히 다녔다. 첫 해외여행은 튀르키예였다. (내가 갔을 때는 터키라고 불렀다.)

내 인생 최초 해외여행이었는데 10박 11일 자유여행으로 중학교 친구와 함께 여행을 했다.

첫 해외여행을 그것도 신입이 장기 휴가를 내고 10박 11일을 (기억으로는 10월이었던가, 11월이었는데, 업무상 이때 꽤 바쁜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패키지도 아닌 자유여행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우린 젊었고 무서운 것이 없었다.

아시아나 직항을 타고 11시간 정도를 날아 이스탄불 공항에 내렸다.

카파도키아로 가기 위해 국내선으로 갈아타야 했다.

생전 처음 공항에서 환승이라니! 세상에 국제 미아 될까 봐 친구와 나는 손을 꼭 붙잡았다.

꼭 쥔 손에서 서로의 설렘이 느껴졌다.


아무튼 어찌어찌하며 국내선까지 갈아탔고 비행기를 타고 카파도키아로 갔다.

오래전 일이라 정확히 생각은 안 나지만 카파도키아에서 내려 호텔에 연락했고 픽업 서비스를 요청했다.

영어 공부라고는 수능 영어만 했던 나로서는 되지도 않은 영어로 기사를 부르고 호텔까지 갔다.

실은 통화를 거의 20분 가까이했던 것 같고 “지금 공항에 도착했으니 픽업을 와달라. 예약자 OO이다.”라는 아주 간단한 내용이었다. (호텔직원의 짜증 섞인 목소리와 되묻는 말에 점점 소심해졌다.)

나의 영어 실력에 화가 났겠지만, 엄마가 늘 나에게 말했다.

‘돈 쓰는 영어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너 돈 쓰면서 영어 하는데 자신감 있게 질러라.’

캬, 엄마는 이런날이 올 줄 알고 내게 이러말을 했던가?

'그래 이단 나는 영어로 말했고 알아듣는 건 당신 몫이다.'라는 마음으로 영어를했던 것 같다.


친구와 나는 자연스럽게 하루는 네가, 다음날은 내가 이런 식으로 여행을 진행했다.

영어를 좀 한다는 한 사람만이 (친구는 영어를 좀 하는 사람이었다.)

여행을 주도하게 되면 피곤하고 예민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씩 번갈아 가며 영어를 부지런히 쓰고 여행을 주도했다.


카파도키아에서는 유명한 열기구를 체험했다.

그 당시 튀르키예의 열기구 체험은 종종 추락 사고가 났기 때문에 친구는 ‘제일 비싼 거를 예약하자.

비싼 데는 다 이유가 있다.’며 한화로 20만 원 상당의 열기구 체험을 예약했다.

컴컴한 새벽녘에 호텔 앞에서 픽업 차량을 타고 알 수 없는 언덕을 올라 20명의 사람과 큰 열기구 앞에 섰다.

우리는 연륜이 있어 보이는 조종사님과 인사를 하고 열기구 바구니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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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캐한 가스 냄새를 맡으며 기다리자 둥실하고 열기구가 하늘로 올라갔다. 그때 내 마음도 둥실하고 가벼워졌던 것 같다. 살짝 발끝이 떠오른 것 같기도 하다. 모든 근심 걱정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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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나는 첫 직장생활에서 부당한 인신공격을 당하기도 했던지라 오만가지 걱정을 안고 살았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디 노동부라도 신고할 걸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고 정말 갓 세상에 나와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했다.

이를 악물고 '버티는 자가 이기는 거다.'라며 무식하게 일만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그러다 건강을 잃긴 했지만 나는 결국 지금까지도 그 직장에서 버텼고 이제는 모든 일에 거의 해탈한 상태이다.


이때의 첫 여행이 잠시 도피처가 되었고 짓물러진 내 마음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자 다단해진 멘탈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열기구가 고공으로 올라갈수록 고요해졌다.

바구니 안 사람들은 곧 이야기를 멈추고 그 고요함 속에 함께 젖어 들었다.

가스의 열기와 상공의 찬 기운이 적절하게 섞여서인지 딱 적당한 온도와 적막함이 알 수 없는 감정을 생성했다.

하늘에서 바라본 카파도키아는 우주의 어느 행성 같았다. 삐죽빼죽한 바위산들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바위산들은 모두 갈색의 그 어떤 것들이었다.

동이 트면서 발아래 세상은 온통 오렌지색으로 물들었다.

우리 옆으로, 아래로 알록달록한 열기구들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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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이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눈물도 찔끔 난 것 같다. 그때는 내 인생이 알록달록하게 펼쳐질 줄 알았다. 앞으로 이런 행복들이 줄지어 기다릴 거로 생각했다. 가장 비싼 체험비를 치러서인지 우리 열기구는 가장 높이 떠오르기도 하고 바위산 꼭대기 사이를 아슬아슬 지나며 살짝 쿵 바위에 부딪히는 체험도 해줬다. (아직도 일부러 스릴을 안겨준 건지, 실수인 건지 의문이지만) 무사히 착륙했을 때는 직원들과 조종사들과 다 함께 샴페인을 터트렸다. 안전하게 마쳤다는 자축 파티였다. 생각보다 위험했던 것이리라. 그러니 이른 아침부터 성대하게 파티를 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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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호텔에서 나와 동네를 구경했다. 항아리 케밥을 먹고 달큰하게 와인에도 취하고, 그리고 길을 잃었다. 우리는 동굴호텔에 머물렀는데 알고 보니 우리가 머물렀던 호텔 주변 모두 똑같이 생긴 동굴 호텔이었다.

마을로 내려올 때 제대로 길을 기억했어야 했는데 신나서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 내려왔다.

터키 아저씨들의 과잉 친절을 맘껏 경험하고 기분 좋게 호텔로 올라가는 길 ‘음, 그러니까 우리 동굴 호텔이 여긴가? 저긴가? 어째 개미 소굴처럼 다 똑같이 생겼네.’ 동네 주민들에게 호텔 이름을 대며 길을 물었다.

어찌나 친절한지 모르면 모른다고 하던가, 하나같이 길을 일러줬다.

누구의 손가락은 오른쪽을, 어느 아주머니는 왼쪽을 이리저리 헤맨 지 두 시간 정도, 해는 저물고 어둑어둑해졌다. 나는 결국 눈물을 질질 짜며 필사적으로 길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다 호텔 직원인지, 옆 호텔직원인지를 만나 무사히 호텔로 복귀했다. 나는 그때 터키사람들의 쓸데없는 친절을 원망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라고!’


카파도키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즈미르로 갔다. (비행기였던가?) 항구도시로 동양인 관광객은 단 한 명도 없었는데 친구와 나는 신비로운 자그마한 동양인 소녀들로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어디를 가든 뜨거운 눈빛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아주머니도 아이들도 아저씨들도 빤히 쳐다보고는 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자는 개들한테까지 관심을 받았고 어디를 가나 있는 고양이들마저 졸졸 따라왔다. (거의 브레멘 음악대였다.) 이즈미르는 조용하고 예뻤다. 체 게바라의 대형포스터가 걸려있는 멋진 도시였다.


마지막으로 이스탄불로 이동했다. 아, 이스탄불은 뭐랄까.

쉴 새 없는 플러팅의 도시였으며 하루 이만 보 이상을 걸어 나의 발바닥을 찢어놓은, 그렇지만 정말 매력적인 도시였다.

블루 모스크에서 수십 명의 발 냄새를 참았어야 할 때, 약국에서 밴드를 사려고 할 때 자꾸만 스타킹을 벗어보라던 약사 청년(아니 그냥 밴드만 달라고, 상처를 왜 자꾸 보여 달래) 우연히 중학교 친구의 동창을 만나 남자 둘, 여자 둘이 되어 식사한 경험. 친구와 나는 맥주를 남자 둘은 와인을 시켰는데 레스토랑 직원이 남자친구들에게 ‘여자들에게 와인을 시켜줘야지.

매너가 없니?’라며 우리를 지긋이 봐주던 직원을 잊지 못한다.

대체로 터키의 남자들은 과잉 친절했고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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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의 저녁 광장은 오렌지 조명으로 덮여 있었고 밤 산책을 하는 사람들마저 분위기 있게 만들었다. 터키의 젤라토는 정말 쫀득했고 양꼬치는 ‘내가 양이다.’라고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터키에서의 나는 어렸고 찬란했고 빛났다. 모든 인생이 다 잘 풀려서 보들보들한 상태라고나 할까. 벌써 10년도 더 전일인데, 그때의 내가 그리워서 다시 사진을 꺼내본다. 다들 여행 많이 다니시라. 국외든 국내든 옆 동네든 많이 걷고 많이 경험하라. 결국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추억으로 사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멋진 추억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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