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엔 MBTI 대신 테토녀, 에겐남이 유행이던데 아직 나는 MBTI가 훨씬 더 익숙하고 편하다. 회사에는 극상의 F 직원이 있다. 가장 자주 하는 말이 ‘제가 F라서...’ 로 시작하는데 사소한 일에도 대단한 감정을 이입하며 서운해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덤덤한 직원이 있기도 한데 역시나 T다.
나는 일상과 회사에서의 성격이 차이가 매우 큰데 회사에서는 J이지만 일상에서는 완연한 P다. 그래서, MBTI 검사할 때 ENFP가 나오자 동료들이 전부 ‘J인 줄 알았어요.’라는 반응이 100%였다. 원래는 J가 아닌데 회사에 감금당한 채로 (실제 감금 아님) 나의 본성을 죽이고 일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
국고를 지원받는 회사인만큼 어떤 일에도 수많은 서류와 증빙을 준비해야 하고 점검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일년내내 긴장하고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업무를 추진할 때는 계획과 점검과 진행과 보고서를 몇 번씩 점검해야 한다. 당연히 J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의 성격은 P인데 본성을 죽이고 J로 살아서인가 퇴근 후 혹은 주말만 되면 P 성향이 날로 커지더니 때로는 나조차도 감당이 안 될 만큼 무계획과 충동적인 하루를 보낼 때도 있다. 회사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뭐랄까, 건조하고 퍼석퍼석하게 만든다랄까.
어느 주말 새벽과 아침 사이에 눈이 떠져 시골 할아버지 산소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 없이 ‘P’ 가 발동하여 무작정 가장 이르게 출발하는 시외버스를 예약하고 출발했다. 할아버지 산소는 꽤 시골 마을에 있는데 버스는 하루 한 번 마을로 들어간다는 소문만 들었다. 흔한 슈퍼도 없고 할아버지 집에서는 핸드폰도 거의 터지지 않았다. 어디 깡촌 시골 마을 같겠지만 차 타고 3분만 달려 나오면 핸드폰은 터지고 거기서 5분 이상을 더 나오면 작은 슈퍼가 보인다. 그리고 곧 공장지대를 지대 기차역까지 갈 수 있는데 희한하게 할아버지 동네만 유독 고랑 고랑 한 시골이다.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시골 동네로 들어가 마을이 다 내려다보이는 산소 입구에 도착했다. 여름이 가까워지자 산소로 올라가는 입구 밭부터 풀들이 내 키만큼 자라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뱀이라도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한 것이 없어 보였다. 애벌레, 지렁이, 뱀 등 꿈틀거리는 것은 다 무서워하는 나로서는 택시 문을 열고 나설 수가 없었다. 부리나케 충동적으로 달려오긴 했지만, 뱀이 나오지 않을까 두려웠다.
‘기사님, 저희 할아버지 산소가 저긴데, 지금 시기에 뱀이 나오나요?’
‘몰래요. 날이 따뜻해져서 나올 수도 있지요. 뱀이 나와도 안 건드리면 돼요. 할배가 귀한 손녀 왔는데 안 지켜주겠니 껴.’
‘그래. 지금 믿는 건 할아버지뿐이다.’
입구에서 긴 나뭇가지를 획득하고 풀들을 후려치면서 괜히 소리도 한 번씩 지르면서 들어가 본다. ‘훠이 훠이.’ 시골 풀들은 유난히 억세서 나무로 후려친다고 해서 픽하고 쓰러지는 게 아니었다. 발로 꼭 밟아줘야 한다. 산소 앞까지 가기에는 이미 길들이 풀에 잠식당해서 포기하고 아래에서 풀들을 뉘고 자리를 잡았다. 아침부터 편의점에서 산 소주 두 팩과 쥐포를 주섬주섬 꺼냈다.
소주를 따르고 절을 하며 오랜만에 할아버지께 안부 인사를 전한다. 나의 안부도 전하면서. 그리고 나의 고민을 해결해달라고 양심 없게 부탁도 드린다.
‘할아버지, 제 앞에 어떤 고난이 닥쳐도 제가 잘 이겨낼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주세요.’
산소 주변에 큰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나뭇잎들이 앞, 뒤로 나부끼면서 반짝하고 윤을 낸다. 6월에 들어서자 나무와 풀, 들꽃들은 저마다의 초록으로 하늘을 덮었다. 죽은 자 주변에는 생명이 가득한 것들만 존재한다. 그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아 잠시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조금 전 발로 누인 풀들에서 짙은 초록 향이 난다. 들꽃에 앉은 벌들의 윙윙 소리가 들려오자 내 마음도 윙윙 어지럽다.
그다음으로는 계획에도 없는 절에 가기로 한다. 영주에는 부석사가 유명하다.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이동해서 한 시간 가까이 걸려 부석사에 하차했다. 저마다 가족 단위, 연인들이 오는데 나만 혼자다. 원래 혼자라 P가 가능한 거다. 여럿이면 싸우거나 끌려다니거나 둘 중의 하나다.
부석사 앞마당 끝에 책상다리를 하고 주저앉아, 멀리 소백산 자락을 본다. 어릴 땐 산이 좋은 줄 모르다가 나이가 들면서 산이 좋다. 산이 주는 기운에 의지하게 된다. 끝이 없는 산자락이 겹겹이 늘어서 있고 시야 가장 가까이에는 부석사의 지붕 끝이 닿아있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내 삶도 그렇다. 이 문제 해결하면 저 문제 터지고, 겨우 해결해서 한숨 돌리나 싶으면 또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렵다. 그야말로 삶의 힘듦과 고난이 첩첩산중이다. 내 인생 언제 드넓은 들판처럼 펼쳐지나 싶은데, 산이 겹겹이 쌓인 게 장관이다. 마치 수묵화 작품을 보는 듯하다.
어느 날 내 삶도 멀리서 바라볼 때 이처럼 장관일까 싶어 열심히 살겠다. 부처님께 조용히 말해본다.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 테니, 이겨낼 힘을 달라고 조용히 읊조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