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함과 사랑함의 차이

“진실된 사랑의 정의”

by 공 훈


요즘 핫한 프로그램인 모솔이지만 연애를 하고 싶어서를 보았습니다. 이 프로를 보다 보니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출연진의 마음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마음이 저렇게 빨리 좋아지고 식고 그럴까?’


그러다 후반부로 가며 하나의 커플이 나왔고 이 분들의 대화에서 “사랑해”라는 단어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대화 중 찰나의 순간 문득 주변 사람들이 저에게 물어봤던 문장이 뇌리를 스쳐갔어요. “너는 좋아함과 사랑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해? 어떤 게 좋아하는 거고 어떤 게 사랑이야?”



그래서 저는 이 질문에 답을 한 번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법한 해답을 말이죠.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좋아함과 사랑함은 감정이기 때문에 정답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만의 생각을 거듭한 끝에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어요. 궁금하다면 이 글이 해답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부모는 정해지며 학창 시절을 거치며 친구도 생기죠. 그렇다면 근본적인 관계의 처음부터 집어볼까 합니다. 태어나는 그 순간 어머니는 우리에게 생존에 가장 밀접한 관계입니다. 키워가며 모질게 하는 어머니도 있지만 많은 분들의 경우에는 아이가 자라는 것에 정성을 쏟습니다.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간에게 꼭 필요한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를 제공합니다. 바로 이러한 과정이 모두 사랑입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조건 없이 사랑이란 감정 하나만으로 헌신하기 때문이죠. 이 사람에게 무엇을 되받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닌 지극히 아이의 성장에 중점을 둡니다. 이런 말을 하게 된다면 의문이 들 수도 있죠. 처음부터 아기를 고아로 만드는 부모도 있지 않느냐. 당연히 예외의 경우도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차치해 두고 읽다 보면 후반부에 왜 이러한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지 공감할 거라 생각합니다.



학창 시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를 만들고 그 관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합니다. 우월이 아닌 공생의 관계이죠. 진정한 사랑은 우월의 관점에서 일어나기 힘듭니다. 필연적으로 한쪽의 쏠린 마음과 위치는 공자의 말인 ‘중용’과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중용이란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를 뜻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마음이나 태도는 인간의 본능적 이기심 때문에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그렇기에 이기적인 마음을 내려놓지 않는 한 우월의 관계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기는 힘든 것이죠. 다시 돌아가 공생의 관계란 서로 도우며 함께하는 삶을 뜻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공생적 친구와의 관계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갖추어지게 됩니다.



친구와의 관계에서 사랑을 성의 개념으로 나누진 않겠습니다.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닌 진정한 사랑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친구와의 남녀 혹은 동성인 관계 속에서 사랑을 느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이 좋아함과 차이가 무엇일까요. 저는 이 물음에 답을 이렇게 내렸습니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선에서의 조건 없는 진실된 헌신이 사랑이다.” 사랑은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즉,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선에서 생긴다면 분명 깨지게 됩니다. 금이 가있는 유리와 같죠. 약한 충격에도 쉽사리 조각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킬 수 있는 마음의 선을 찾아야만 합니다. 피폐해지지 않으며 나로서 온전한 마음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위의 ‘중용’적 관점과도 일치합니다. 너무 치우친 마음의 선은 자신을 무너뜨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죠.



돌아가 좋아함의 감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좋아함은 “어떠어떠해서 좋아”와 같이 조건이 붙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성으로 본다면 “잘 생겨서”, “예뻐서”, “매너가 좋아서”와 같을 수 있으며 동성의 관계일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조건은 수도 없을뿐더러 상황에 따라 바뀌게 됩니다. 모든 것들의 영원을 담기 힘든 건 필연적입니다. 강과 산도 10년이면 변한다는 말이 있듯, 갈대처럼 흔들리는 사람 마음이 영원하기란 우주의 끝을 알게 되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그렇기에 좋아함의 관점에서 사랑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 영원을 꿈꾸곤 합니다. 예를 들어 이성과의 ”결혼“, 친구와의 영원한 우정, 물건에 대한 집착등이 있겠죠.



보통의 경우 좋아함에서 사랑으로 넘어가는 감정이 완연하지 않을 경우 소유의 욕구로 변하곤 합니다. 감정은 붙잡아둘 수 없음에도 그 순간 감정의 영원을 빌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서툴 수밖에 없고 심한 경우엔 자기 파괴를 일으킵니다. 그렇게 깨지고 좌절하며 어느 시기가 된다면 진정한 사랑에 대해 점점 느끼게 됩니다.



진정한 사랑은 조건이 따르지 않습니다. 타인 혹은 어떤 것에 대해 기대를 품지 않는 것입니다. 오로지 나로서 완전하며 그 사람에 대한 진정한 헌신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시작이 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의 예시였던, 처음에 아기를 낳고 고아가 된 관계의 부모 관점에서 사랑을 보겠습니다. 정말 사랑하지만 사정이 어쩔 수 없거나, 혹은 원치 않게 아기를 낳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어떤 관계가 진정한 사랑이고 아닌지 조심스럽게 보겠습니다. 아기를 낳았을 때 그 아이를 위해 진심으로 해줄 수 없는 상황에 찢어지는 마음을 붙잡고 오롯이 아이의 성장과 행복을 위해서 보낸다면 그건 부모로서의 사랑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에 나중에 부모가 극적으로 찾아 만나게 되어 함께 사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원치 않게 낳아서 사랑이란 감정 없이 오롯이 자신이 힘들다는 이유로 고아원에 보낸다면 그건 부모로서 사랑의 감정을 품기에 성숙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이란 자신을 지키는 선도 중요하지만 조건 없는 진실된 헌신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조건 없는 진실된 헌신이 없었기에 아이가 나중에 커서 찾더라도 부모의 사랑은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기에 모든 관계에서의 선택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항상 자신의 관점이 아닌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돌아보겠습니다. 옳은 선택을 하기란 너무도 연약한 사람의 감정은 머릿속 이성의 생각과 어긋나곤 합니다. 그럼에도 선택에 대해 점점 경험하고 성숙해지며 감정을 배워가게 되는 게 삶이라 느낍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초월하는 종교적 관점에서도 보았습니다. 기독교, 불교 다른 종교를 보며 느끼는 건 진정한 헌신의 과정에서 사랑이 피어나게 되는 거라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 이 또한 모두 온연한 분들이기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느낍니다.



나로서 온연한 연습, 조건 없는 진실된 헌신. 이 두 가지에 대해 계속하여 바라보고 경험한다면 좋아함과 사랑함의 감정의 차이를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 “진정한 사랑이란 나를 지키는 선에서의 조건 없는 진실된 헌신”이기 때문이죠.





- 이 글은 모두 주관적인 글입니다. 정답은 없기 때문에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모든 글에서 논란의 여지는 없길 바라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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