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현 Jan 02. 2019

오늘을 살 권리

'예비 고3', '예비 5세', '예비 시민'이란 말들에 반대하며


서울 시내 거리에서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서 있다가 승합차를 한 대 봤다. 전형적인 노란색 학원 차였는데, 옆구리에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다. "예비 5살 과정 신설."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가서 멍하니 차를 살펴보았다.


그 승합차에 써 있는 다른 문구들을 읽고 추측해보니, 이런 얘기인 것 같았다. 보통 5살이면 유치원에 가는데 요샌 유치원에서도 이런저런 공부를 시킨다. 그러니 유치원에 가서 뒤처지지 않도록, 학원에 '예비 5살', 즉 4살 때부터 보내 유치원 공부 준비를 시켜라, 뭐 그런 얘기였다.



보통의 삶이 된 '예비 인생'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해 수능 시험이 끝나고나면, 학년 말의 고2 학생들에게 "예비 고3"이라는 명칭을 쓰는 일이 흔하다. 고3 수험 생활을 미리 대비하고 긴장하라는 분위기 조성용 명칭일 것이다. 언제부턴가 그 시기도 점점 당겨져, 아예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때 또는 1학년 때부터 예비 고3이라며 압박을 가하곤 한다. 그런가 하면 중학교에서도 "예비 중3", "예비 고등학생" 같은 말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TV에선 초등학교 4학년 때가 중학교 성적을 좌우한다며, 말하자면 초등 4학년을 예비 중학생 취급하는 학습지 광고도 흘러나온다. 그러더니 이젠 "예비 5살"까지 보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미리미리 준비하고 예습하라는 문화가 무한정 확대되고 있으니, 대증요법으로 '선행학습·교육금지법' 같은 법이라도 만드는 것도 이해가 간다.


청소년들의 경우는 그 존재 자체가 예비 취급을 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소년은 '예비 성인', '예비 시민'으로, 미래의 희망일 뿐 오늘 살고 있는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곤 한다. 그런데 청소년 아닌 이들이라고 예비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진 않다. 우리 사회는 청년일 때는 취업을 예비하고, 그 뒤엔 결혼을 예비하고, 중장년일 땐 자식을 낳고 기르고 교육하고 결혼시킬 일 그리고 자신의 노년기를 예비하고, 노년기엔 병에 걸릴 때나 죽은 이후를 예비하라고 하지 않는가. 사회가 사람들의 생활을 최소한은 보장해야 하는 의무를 다하지 않는 현실에서, 사람들은 '내일'을 예비하는 데 '오늘'을 바쳐야 한다는 불안과 압박감을 한층 더 느끼게 된다. 마치 '예비 인생'이 보통의 삶의 모습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예비 인생'의 폐해는 많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행복해지기가 어렵다. 지금 여기서 실제로 살고 있는 삶, 곧 자기 자신을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내일의 빵으론 나는 살 수가 없다."(랭스턴 휴스)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늘이지 내일이 아님에도, 계속 행복을 내일로 유예시키게 된다. 또한 '예비 인생'의 밑에 깔린 주된 태도와 감정은 각자도생과 불안이다. 불안 속에서 미래만 대비하며 살다보면 시야는 오히려 좁아지기 쉽다. 상황을 바꾸려는 도전이나 모험에 나서기는 어려워지고, 사회적 책임감이나 연대도 약해진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예비 인생'이 일반적인 모습이 될수록 공동체가 모두 같이 이야기하고 예비해야 할 문제는 잘 예비할 수 없게 된다. 예컨대 기후 변화(지구 온난화), 핵발전의 위험성, 복지 제도, 군비 확충이 초래하는 전쟁과 파멸의 위험성 같은 것들 말이다.



삶은 은행 적금이 아니다


미래를 계획하고 만드는 것은 물론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건 미래가 현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은 곧 맞이할 오늘이라 중요한 거지, 내일이 오늘보다 더 중요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내일을 예비하는 일도 지금 내게 의미 있고 보람 있는 내 삶의 일부로서 위치해야 한다. 삶은 은행 적금이 아니라서 미뤄두고 예비했다가 몰아서 살 수 없다.


나는 '오늘을 살 권리'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권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회는 개인이 오늘을 살 수 있도록 보장할 의무를 져야 할 것이다. 경쟁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낙오될 거라는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나, 생계와 존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청소년들이 '예비 성인'으로서 미래를 준비하기만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김창완밴드의 노래처럼 "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산다." 4살은 4살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예비 5살'이 아니라.





※ 2012년 8월에《한겨레21》에 쓴 글을 고쳤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