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시설에서 '정치적'이라고 대관을 거부한 일에 대해
내가 활동하던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의 지역모임이 경기도의 한 '청소년 문화의 집'으로부터 동아리방 이용을 거부당한 일이 있었다. 우리 단체가 교육부의 정책에 항의하는 활동을 한 적이 있다면서, '정치적 사용'이라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정치적'이라고 판단하는 근거가 교육부 정책에 항의한 적이 있다는 것인 점도 우습지만, 정치적 활동을 하는 단체라고 한들 작은 동아리방에 몇 명 모여 회의를 하는 것이 시설을 정치적으로 사용한다고 할 만한 일인지도 의문스러웠다. 애초에 거부 사유로 든 그 '정치적'이라는 말 자체도, 그게 왜 거부 사유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청소년시설이라는 이유로 정치적인 요소와 연결되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2014년, 서울시립청소년미디어센터가 동성애자인권연대 청소년인권팀의 행사에 대해 대관 취소 통보를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성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를 하는 내용의 행사였다. 담당자는 통보하면서 "청소년에게 동성애가 뭐고 섹스가 뭐냐. 정치적 목적의 행사에는 빌려줄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동성애 혐오적 종교단체 등이 "청소년들을 동성애에 끌어들이려는 행사에 반대하고, 공공시설에서 동성애 옹호 행사가 열려선 안 된다."라면서 민원을 제기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소식이 따라왔다. 동성애가 '비정상적'인 것이며 '미성숙한 청소년들이 물들 수 있다'는, 이중의 편견과 차별적 의식이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흥미로운 점은 아수나로에 대관을 거절한 그 청소년 문화의 집과 서울시립청소년미디어센터가 모두 '정치적'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언급을 했다는 것이다. 다른 공공시설에서도 흔히 정치적인 행사에는 대관할 수 없다는 안내를 볼 수 있다. '정치적'이란 말은 언제부턴가 별다른 추가 설명 없이도 공공시설 이용을 거부할 만한 사유가 되어버렸다. 정치적인 것이 범죄 취급을 받는 다른 예로, 여러 초중고등학교들이 아예 학생의 정치활동을 징계 대상으로 규정하는 학칙을 두고 있는 경우도 있다. 청소년 참정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이들이 정치에 물들까 봐' 걱정하곤 한다.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정치 혐오'에 더해, 청소년들은 미성숙하므로 정치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함께 작동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편, 서울시립청소년수련관에서 서북청년단이 '재건 총회'를 열려다가 대관을 취소당한 사건이 있었다. 수련관 관계자는 서북청년단이 청소년단체인 줄 알고 대관했으나 아니어서 취소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앞뒤 정황을 보면 이 역시 사회적으로 논란이 일자 정치적 성격을 문제 삼아 취소했을 개연성이 있다. 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서북청년단의 재건은 결코 긍정적으로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청소년수련관에서 대관을 취소한 것이 어떤 연유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정당했는지 따져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사실 그동안 '정치적 편향성' 또는 '정치적'이라는 규정과 비난은 주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졌다. 심지어 자신의 생각은 정의이고 정답이며 윤리라고 진심으로 믿기 때문에, 자신과 상반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정치적'이라고 쉽게 이름 붙였던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남용의 결과는 더 힘이 강한 쪽, 기득권에게 유리하기 십상이다. 예컨대 재테크와 주식투자와 자본가의 관점을 교육하는 것은 실용적 경제교육이 되지만 노동법과 노동자의 관점을 교육하는 것은 정치적 편향 교육이 되듯이.
그러므로 공공시설 등에서도 '정치적'인지 아닌지 모호할 수밖에 없는 판단 기준을 정하고 사용을 제한하는 것보다는, 정치적 입장이나 활동에 무관하게 이용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진정한 '정치적 중립'이 될 것이다.
'정치적'이란 말의 의미는 모호하다.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 정치적인 것이 되기도 하고, 갈등과 논쟁이 있는 이슈가 정치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넓게 보면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가치판단과 행동을 하는 것은 모두 정치적이다. 그러므로 정치적이면 안 된다는 말은, 현안에 대해 의견을 표하거나 참여해선 안 된다는 뜻이 되어버린다. 딱 봐도 민주주의의 원리와는 양립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다.
정치적이면 공공시설을 이용할 수 없다는 룰은 사회 전체적으로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정치활동에 더 비싸고 불안정한 상업시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면, 시민들이 자유롭게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넘어야 할 문턱이 더 높아지는 셈이기 때문이다. 청소년시설 등이 ‘정치적’인 것을 거부하는 배경에는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를 부정하는 생각이나 우리 사회의 '정치 혐오'도 있겠으나, 아마도 논란의 소지를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하지만 공공시설일수록 더 논쟁이 되고 있는 문제에 관해 공간을 열고 논의의 장을 열어서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 영리적 목적의 상업시설이 오히려 권력이나 사회적 압력에 취약할 수 있는 반면, 공공시설은 차별 없이 그 공공성을 지킴으로써 자유로운 정치·사회·문화 활동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
동성애자인권연대 청소년인권팀과 서북청년단, 이 둘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일 둘 모두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또는 사회적 논란이 있고 다수에게 규탄받는다는 이유로 시설 이용을 거부당한 것이라면, 공공시설 운영의 룰이라는 측면에서는 두 사례를 모두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물론 '서북청년단'이 청소년단체가 아니라서 청소년시설에서 대관을 거부한다는 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긴 하다.) '정치적'이라거나 '다수의 상식'을 근거로 하여 이용을 금지하는 것은 옳은가. 특히 청소년시설은, 정치적이거나 논란이 되는 행사에는 이용될 수 없는가? 다시 말해, 과연 논란이 별로 없는 합의된 가치, 주류의 가치만이 청소년들에게 전달되어야 하는가? 청소년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생각을 만들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외치는 정치적 활동은, 청소년들의 문화적 활동이나 봉사활동 등과 달리 취급받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나는 서북청년단 재건과 같은 류의 활동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이 나와 정치적 입장이 달라서는 아니다. 우리가 어떤 표현 또는 어떤 정치적 활동을 제한할 기준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적어도 직접적으로 폭력과 차별을 행하거나 선동하는 것인지 여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공공연히 극우적 폭력을 재현하겠다고 하는 활동과 소수자 혐오와 차별을 선동하는 활동에 제재를 가한다든지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은 공론화와 절차를 거쳐서 수립되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한 기준을 명확히 하지 않고 서로 '정치적'인 것을 배제하고 규탄하려는 시도들이야말로 위험한 전제를 깔고 있으며, 오히려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위협하는 폭거이다. 정치적인 것은 결코 금기가 되거나 차별·처벌·배제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청소년을 포함하여 모든 시민들이 더 적극적으로 정치적이어야 마땅하다.
※ 2014년 12월에 〈한겨레〉에 썼던 글을 고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