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규칙과 교육활동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고 서울, 강원도 등에서는 체벌금지와 '생활지도 혁신'이 한창 이야기되던 2011년 2월 무렵 교사들이 모이는 자리가 있었다. '교사 집담회 - 학생인권조례 시대, 교사 입 열다'라는 제목이었다. 학생인권이 교권을 무너뜨린다고 언론들이 목소리를 높일 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교사들, 그와는 다른 학교 현실을 체험한 교사들이 모여서 이야기한 자리였다.
여러 가지 경험담과 에피소드들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한 교사가 들려준 자기 학교의 실내화 규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실 학생들이 실내화를 신고 밖에 나가는 등의 문제는 학생들과 교사들이 학교에서 '전쟁'을 벌이는 이유 중 하나가 되어왔다. 그 교사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되면서 '복장규제'를 바꾸기로 했고, 그 과정에서 실내화 단속을 그만두기로 했다.
하지만 실내화 단속을 그만두고 난 이후에 오히려 실내화를 신고 학교 밖을 출입하는 학생들은 더 줄어들었다. 물론 그냥 단속을 중단하기만 했는데 실내화 출입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실내화를 신고 밖에 드나들면 얼마나 위생상 문제가 있고 병균을 옮기게 되고 먼지가 나게 되는지를 몇 차례 설명하고 교육하는 자리를 가진 결과였다. 실내화를 신고 드나들면 안 되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처벌하는 것보다, 그 이유를 잘 설명하고 소통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이 실내화 이야기에는 학생인권이 학교를 향해 던지는 여러 가지 질문들이 녹아 있다. 먼저, 학생인권은 "과연 무엇이 '문제행동'인가?" 묻는다. 과연 실내화를 신고 학교 밖을 출입하는 건 학생들을 처벌할 만한 '문제행동'인 것일까? 머리카락을 염색하는 것은 '문제행동'인 것일까? 학생들이 교내에서 연애를 하는 것은 '문제행동'인 것일까? 교사의 의견과 다른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이 '문제행동'인 걸까? 학교에 대한 비판 글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이 '문제행동'인 걸까?
지금까지, 그리고 현재에도 학교는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문제행동'으로 규정하고 강제해왔다. 권장하거나 교육해야 할 사안에 대해서도 금지와 처벌로 일관해오는가 하면, 불합리한 규칙에 따라서 왜 '문제행동'인지 알 수 없음에도 '문제행동'이 되어버리고 만 것들도 있었다. 심지어 학생들이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부당한 처벌에 대해 항의하는 것 자체를 '문제행동'으로 규정하고, 교사의 지시에 불응한다거나 말대답을 한다는 등의 이유로 벌점을 부과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학교가 '문제행동'을 규정하는 기준과 방식은 많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은 물론이요, 사회의 보편적 기준에 맞지 않을뿐더러 교육적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어떤 고등학교의 규정을 보니, 애인과 학교 내에서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하는 행위가 약물 사용이나 도박 등과 비슷한 수위로 처벌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한 중학교의 벌점 기준표에도 '복장규정 위반'이 공동체 구성원들이 같이 책임져야 할 청소 활동 등에 지속적으로 빠지는 것보다도 더 많은 벌점을 받는 사례가 있었다. 과연 이런 기준들이 온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학생들이 이런 규칙으로부터 도박의 해악이나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배울 수 있을까?
학생인권을 이야기하는 일은, 오랜 세월 학교가 굳게 지켜온 '문제행동'의 기준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다시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하는 일이다. 인권의 기준에 맞게 폭력이나 차별 등에는 좀 더 엄격해지고, 대신에 불합리하고 인권침해적인 규칙에 따라 '문제행동'으로 취급되어왔던 것들을 '문제행동'이 아닌 것으로 바꾸자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행동'을 정하는 기준을 교사들이 일방적으로 정하지 말고 학생들과 함께 논의해가면서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서 정하자는 것이다. 학생들의 규칙 위반을 처벌해야 할 '문제행동'으로만 보지 말고, 그 맥락과 이유를 같이 살피자는 것이다. 학생들을 보는 눈을 바꿀 때, '실내화 출입' 문제를 처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학생들과 소통해야 할 문제로 이해할 때, 학생들이 좀 더 존중받는 교육다운 교육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학생인권이 던지는 두 번째 질문은 "무엇이 교육적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이고 어떻게 교육적 활동을 해야 하는가?"이다. 학교는 왕왕 교육적으로 접근해야 할 일에는 강제적으로 대처하면서 '교육'을 자의적 폭력의 명분으로 내세우곤 한다. 그럴 때 보면 학교에서 생각하는 '교육'이 어떤 활동인지 의구심이 생기기도 한다.
설령 교사나 학교가 교육 활동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무리 좋은 것이더라도, 그 방식이 정당하고 교육적으로도 효과가 있는지는 또 고민해봐야 할 일이다. 실내화를 신고 출입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유를 설명하고 소통하고 설득할 때 더 큰 효과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학생들에게 폭력은 나쁜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고자 친구를 괴롭히거나 때린 학생들을 '엎드려뻗쳐' 시켜놓고 매질을 한다면, 과연 폭력이 나쁜 것이라는 가르침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학생들이 교육 활동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를 잘 수용하기 위해서는 교육 주체들 간에 최소한의 존중과 신뢰가 있어야만 한다.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교사가 학생을 대하는 태도에서 학생이 모욕감이나 거부감, 두려움부터 느끼고 들어간다면 이미 그 관계는 교육적인 작용이 일어나기 어려운 관계가 되어버리고 만다. 교사가 불공정한 처벌이나 대우를 한다거나 불합리한 규칙을 힘으로 강요하는 권력자처럼 보인다면 더더욱 그렇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넘쳐나는 학생들의 '반성문 작성 노하우' 등을 보면 그런 관계에서 강요된 반성문이 얼마나 비교육적, 반교육적일 수 있는지 확연하게 드러난다.
또한 학생들과 대화와 소통 없는 일방적인 강제는 실제의 행동이나 생활을 개선하는 데로 이어지지 못할 때가 더 많다. 가령 지각을 자주 하는 학생이 있다면 그 학생이 왜 자주 지각을 하는지, 아침잠이 많은지, 집이 먼지, 교통편이 불편한지, 생활습관은 어떻게 되는지 아니면 학교에 오기가 싫은 건지 차근차근 살피고 대화해야 한다. 하지만 학교는 그러기보다는 교문에서 지각한 학생들을 모아서 벌을 주며 '지각은 나쁘다'고 외치기에만 급급했다. 학생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학생을 '사람'으로 보고, 교육의 방식을 학생과의 소통으로 협력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제안이다.
이만주 교사(경기 흥덕고)
입학식 할 때 아이들을 만났는데 눈에 불신과 분노가 가득하더라. 우리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의심을 가진 거다. 이런 아이들이 학교와 선생님들을 신뢰하게 만드는 게 가장 큰 과제였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학생들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던 생활규정을, 용의복장규정을 빼고 학생들의 인권, 권리를 보장 쪽으로 개정했다. 그리고 고등학교이다 보니 진학의 문제나 학력의 문제가 역시 주요 관심사 될 수밖에 없는데, 우리가 선택한 건 ‘진학문제가 진로문제’라는 거다. 이 아이가 고등학교 과정에서 어떤 자기 비전을 갖고 또 자존감을 지키게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지속적으로 진로교육이나 성취를 높이는 역동적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투입하려고 했다. 그럴 때 아이들은 선생님과 학교가 진짜 우리를 생각해준다는 믿음 갖고 아이들 내면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과정 속에서 그들의 인권이 보장되고 자존감도 회복된다.
(참세상, 〈학생인권조례 시대, 교사의 소통 방식은?〉, 2011년 2월 17일.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60348)
물론 이런 시도가 언제나 처음부터 성공적일 수는 없다. 특히나 학교교육 제도와 방식 자체가 학생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동안 쌓이고 학습해온 불신 때문에 상황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학생인권 존중의 결과가 아니라, 그동안 학생들과 교사들 사이에 존중과 신뢰가 형성되지 않아왔던 역사와 상황의 결과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건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이제는 존중과 신뢰가 가능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학생인권은 학생과 교사 간에 최소한의 존중과 신뢰가 싹트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조건이다. 우리의 교육 현실은 많은 어려움들이 얽혀 있고, 학교에서의 학생인권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답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학생인권 보장이 우리 교육이 더 나아지기 위한 필요조건 중 하나라고는 말할 수 있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 직후에 교사들을 만나서 인권교육을 진행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교사로서 학교 생활에서 필요하다고 느끼는 걸 먼저 적고 이야기해보자고 했더니 나온 답 중에 교사로서 자신에게는 "두발자유화 금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었다. 과연 두발자유화 때문에 교사가 힘든 것일까? 두발단속을 하는 것이 교육적인 일인 것일까? 답답하기도 했고, 교사로서 요구할 것이 고작 머리카락을 단속할 권력이라니 지나치게 소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학생인권에 관한 토론회에서 한 중등 교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지금 교사의 역할은 둘 중 하나다. 학생의 편에 설 것이냐. 부조리한 현재 사회의 편에 설 것이냐. 그 둘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 그동안 대부분의 교사들은 학생의 편보다는 부조리한 현재 사회의 편을 선택해왔다. 교사에게 '두발자유화 금지'가 필요하다고 답한 교사 역시 자신의 위치가 그쪽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런 답을 했을 것이다. 학생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학교와 교육의 역할과 방식으르 다시 물음과 동시에, 교사들에게, 학생들 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학교는 학생들의 교육권을 보장하고 실현하기 위한 기구이다. 국제인권 논의에서도 교사는 학생인권 보장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교사는 인권에 기반한 학교 시스템을 갖추는 데 핵심적인 역할자이다."[유네스코 세계교육포럼 채택, 다카르(Dakar) 행동계획]) 학생인권이 오랫동안 던져온 이 질문들에 대해, 학교와 교사들은 어떻게 답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