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현 Feb 03. 2019

학생, 교육에서의 상품

입시경쟁교육 속에서 우리의 위치는


동네 학원 앞을 지나다 보니 큼직한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이○○ 서울대 ××대. 김○○ 연세대 ××과"로 시작하는 이름과 학교들. 그 뒤에는 깨알같이 "(본교)" 또는 "(서울캠퍼스)" 같은 글자가 쓰여 있었다. 비서울 캠퍼스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거겠지. 입시학원들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현수막이고, 가끔은 중·고등학교에도 비슷한 것이 걸려 있는 걸 보게 된다. 예전부터 '학벌 없는 사회를 위한 광주시민모임' 등의 시민단체들이 대학서열화와 학벌주의를 조장하고 학생의 개인정보를 노출시킨다고 몇 년째 계속 문제제기를 하고 있고, 국가인권위원회도 이러한 광고가 차별을 조장한다고 지적했음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풍경이다. 그래도 학교 같은 경우는 예전보다는 많이 줄어들었다는 데서 위안을 느껴야 할까.


수능 시험과 입시가 본격적으로 치러지는 시즌이면, 나는 우리 교육 속에서 학생의 위치는 바로 '상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고3 때 입시용 자기소개서를 쓰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 자신도 헷갈리던 시절, 교사들은 "자기소개서는 일종의 광고"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다면 그 광고는 무엇을 팔려는 것일까? 그건 결국 내가 상품이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학교나 학원에서 걸어 놓은 입시 결과 홍보 현수막을 보면 더욱 그런 인상이 강해진다. 학생의 이름과 합격한 대학을 전시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이렇게 좋은 상품을 만들어내는 기업이라고 선전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학생의 입시·취업 결과 또는 그 진로 자체가 학교나 학원이라는 기업이 만들어 내는 상품 취급을 받는 것이다.


학교의 '고객'은 양쪽에 있다. 한쪽에는 정부와 기업, 사회가 학교에 특정한 인적 자원을 요구하고 예산을 지원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러한 질서 속에 편입되고 생존하기 위해 스스로 상품이 되어야만 하는 학생들(또는 자신의 자식을 그렇게 만들려 하는 친권자들)이 있다.


권리 보장이 아닌 상품화의 과정


흔히 교육 시장화의 논리 중 하나로 학생들(또는 학부모들)의 선택권을 확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교육 제도 속에서 학생으로서 나는 선택하기보다는 선택받는 존재, 또는 선택(선발)받기 위해서 애써야 하는 존재였다. 학교의 종류를 늘리고 고를 기회를 늘린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갑을 관계가 뒤집힐 것 같지는 않다. 상급 학교, 그중에서도 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며, 그러기 위해서 학생들은 더 노력하고 경쟁해야 한다. 이러한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형식적인 선택 기회의 확대는 결코 실질적인 선택권을 보장할 수 없다. 학교가 학생들에게 '교육 서비스'라는 상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학교에게 선택받기 위한 상품으로서 자신의 성적과 각종 실적을 연마해야 한다. 


물론 인간의 노동력, 나아가 인간 자체가 상품화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인 성질이다. 교육 제도에서의 문제 역시 종래에는 구직 등에서의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학교로 대표되는 공교육 제도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보편적 교육권을 보장하고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육이 학생을 상품화하고 있는 현실은 한층 더 심각한 문제로 보아야 한다. 교육의 과정과 목적 양면에서 학생이 교육의 대상, 상품화, 인적 자원 개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어쩌면 우리 교육 문제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교육이 평등을 구현하는 과정이 아닌, 경쟁을 통해 차별을 정당화하고 사람을 줄 세우는 과정이 되었기에, 학생들은 선택한다기보다는 선택받기 위해 애써야만 한다. 평등이 보장돼야 다양성도 있기에, 차별과 서열화의 교육은 곧 획일화의 교육과도 동의어다. 교육은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한 과정이고 보편적인 권리라기보다는, 사람들을 쥐어짜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가깝다. 학생들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더 나은 상품으로 만드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중등교육에서만의 이야기도 아니고, 취업률에 목 매고 있는 대학에서도 그리 다를 게 없다.


'상품 되기'를 거부하기 


나는 2011년, 청소년들에게 '선동당해서', 교육이 경쟁과 차별을 만들고 있는 현실을 바꾸자고 외치는 '대학 거부 선언'에 동참했다. 나의 학력은 현재 고졸이다. 나는 '대학 거부'가, 상품이 되기를 거부하는 일종의 인간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명칭도 낯설긴 하지만 '대학 거부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다. 거부 선언을 하며 스스로 이름 붙인 "투명가방끈"은 가방끈을 따지는 사회를 반대하는 단체의 이름인 동시에 우리의 '학력'이고 '정체성'이기도 하다.


이렇게 상품이 되기를 거부한다고 선언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여러 문제들을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 차별을 경험하고, 거부도 학벌·학력순으로 대해 주는 세간의 반응에도 마주한다. 파트타임 일자리 하나를 구할 때도 대졸자를 더 우대하는 모습에 질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계속 '거부'를 말하는 것은 그것이 변화를 위한 요구이고 자유와 평등을 위한 불복종이기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대학 거부 같은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입시경쟁교육이나 학력·학벌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은 있었고 '수능 반대 페스티벌' 같은 데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기도 했지만, 대학을 가지 않거나 거부한다는 것은 선택지 안에 없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 모든 것들이 대학을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다른 길도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거라도 알았더라면 좀 숨통이 트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리고 입시의 과정에서 내가 겪은 '상품화'의 고통도 좀 덜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대학 거부를 선언할 사람들이 계속 있을 것이다. 대학을 가지 못하거나 가지 않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대학을 가기 위해 노력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같은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 동료로서 그들 모두에게 안부를 묻고 싶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같이 상품이 되기를 거부하고 변화를 꿈꿔보자는 제안을 감히 던져본다.




※ 2014년 10월 〈한겨레〉에 쓴 글을 고쳤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날의 참정권 운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