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Y 캐슬〉 이라는 마법의 성을 지나
JTBC 드라마 〈SKY 캐슬〉은 방영 당시부터 화제가 되었고, 2019년 2월 종영 이후에도 〈SKY 캐슬〉이 우리 사회에 남긴 메아리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종영 직후인 2~3월은 말할 것도 없고 여전히 교육 관련 언론 기사에서 인용되고 비유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시민단체들도 〈SKY 캐슬〉을 소재로 여러 글을 발표하고 논의를 진행했다. 예를 들어 시민단체인 굿네이버스와 더불어민주당 김해영, 남인순 의원은 5월 31일, '우리나라 사교육과 부모 교육열에 대한 진단 및 대책 – TV 드라마 SKY 캐슬 열풍이 남긴 과제'라는 제목으로 국회에서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SKY 캐슬〉이 언론 등에서 언급될 때 가장 많이 짝지어지는 단어는 '사교육'이다. 그다음이 '입시 컨설팅' 또는 '입시 코디네이터'다. 결국 드라마가 묘사한 상류층·중산층의 고액 사교육 실태가 최대의 화제인 것이다. 좀 더 나아가면 고액 컨설팅에 좌우되는 학생부종합전형을 비판하는 기사, 입시 교육 현실이나 부모들의 교육열에 대한 익숙한 비판, 사교육으로 계급 대물림이 이루어지는 현상을 개탄하는 기사들 정도가 눈에 띈다.
드라마 〈SKY 캐슬〉은 이처럼 입시 사교육 현실을 상징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정작 드라마 본편은 설득력 없는 후반부로 인해 여러 시청자들에게 실망을 남겼다. 이는 어쩌면 이 드라마가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 평론가 듀나의 지적이다.
유현미 작가 관점의 가장 큰 문제점은 현상의 표면만을 본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드라마는 대치동 전업주부 입시맘들에 대한 혐오 선동이다. 내가 이들을 굳이 좋아하거나 옹호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입시맘들은 기껏해야 최전방에서 뛰는 보병이다. 그 위에는 장교와 장군들이 있고 그 위에는 정치가가 있으며 그 위에는 그들을 버티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시스템이 있다. 좋은 비판물은 이 모두를 관통해야 한다. 하지만 유현미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입시맘들에 대한 증오로 눈이 멀어 그들 너머로 들어가지 못한다.
-〈엔터미디어〉, 2019년 2월 2일 자, 〈'SKY 캐슬' 유현미 작가만 알고 우리는 몰랐던 것들〉
드라마 〈SKY 캐슬〉이 '전업주부 입시맘들'이라는 현상의 표면만을 보았다면, 이후 우리 사회의 논의도 '사교육 과잉'이라는 현상의 표면만을 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고액의 사교육을 비판하는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마치 사교육의 만연이 곧 한국 교육 문제의 중심이며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핵심인 것만 같다. 심지어 과도한 사교육으로 학생들을 내모는 부모들의 교육열이 직접적인 문제의 원인인 양 지목되기도 한다.
사실 이처럼 사교육의 과잉 또는 과열을 교육 문제의 대표 격으로 지목하는 풍조는 예전부터 있어 왔다. 정책적으로도 사교육 감소는 교육 개혁의 중요한 목표로 꾸준히 거론되었고 사교육비 걱정과 부담을 덜어 주겠다는 것은 정치인들의 단골 공약이었다. 그리고 사교육을 줄이기 위해 '공교육 강화/정상화'를 주창하는 것은 종종 곧 공교육이 학생들의 학력 신장을 더 책임지라는 말로 연결된다. 교사들이 수업을 더 잘하게 만들어야 한다거나 보충수업, 방과 후 학교 등에서 사교육 수요를 대신 충족시켜줘야 한다는 이야기다.
분명 높은 사교육 참여율은 한국의 교육이 경쟁적이고 공공성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지표일 수 있다. 그러나 사교육을 줄이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는 것은 현상의 표면만을 보는 것일뿐더러, 진단과 처방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단적인 예로, 2010년 김영숙 서울 교육감 후보는 '사교육 없는 학교'를 표방한 중학교의 교장으로 재임하며 밤 9시까지 방과 후 학교 및 자율학습을 운영했던 것을 내세웠던 바 있다. 밤 9시까지 공부를 시키는 것이 과연 좋은 학교일까? 또 다른 예로, EBS 강의와 수능을 연계시키는 정책은 사교육을 줄이는 데 기여했을지는 모르지만, 공영방송 EBS가 수능 대비 강의를 확대하고 고등학교에서 EBS 문제집 풀이를 하게 만들었다. 사교육 감소를 위한 정책 때문에 공교육이 사교육화된 셈이다. 이렇게 되면 사교육과 공교육 사이의 차이점은 국가에 의해 학력을 인정받는 교육기관인지 여부, 그리고 가격 정도만 남을 듯하다. 공교육의 공공성을 위해서는 무상교육의 원칙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긴 하나, 그것이 전부는 아님에도 말이다.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오해가, 공교육과 사교육이 대립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교육이 늘어나는 것은 학교에서 잘 가르치지 못해서이고, 학교 교육이 강화되면 사교육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교육과 사교육은 대립적이라기보다는 연속적이고 종속적이다. 대부분의 보습 학원이나 입시 대비 사교육에서 하는 것은 결국 학교 교육 과정의 내용을 미리 또는 반복하여 배우는 것이며, 학교 시험에서 더 나은 성적을 올리기 위한 연습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교육의 뿌리이자 몸통은 현재의 공교육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과 같은 공교육이 정말로 공공성을 구현하는 '공교육다운' 것인지 따져 물을 수야 있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학교 교육이 사교육을 대체하려 애쓰는 것은 적절하지도 않고 실효성도 없다. 만약 수준 높은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며 학교 교육과정의 수준을 높인다면 이를 따라가기 위해 오히려 사교육 의존도가 더 높아질 수도 있다. 학교 수업과 시험의 중요도를 높인다고 해도 사교육 감소에는 별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과거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서라며 입시에서 학교 내 시험 성적(내신) 반영을 늘린 결과가 내신 대비 사교육의 증가로 나타나기도 했다. 공교육이 학생들을 경쟁시키고 서열화하고 차별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는 이상,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 돈을 더 들여서라도 경쟁에서 유리해지고자 하는 현상은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 더 많이, 더 잘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부가적인 사교육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의 논의는 사교육 담론을 맴도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현상의 표면만 보는 태도, 고액 사교육 같은 자극적 모습들만 부각하는 경향 탓도 있을 것이다. 이에 더해서, 나는 정치권 등에서 교육 문제를 학생·청소년의 입장이 아니라 비용을 대는 학부모·보호자의 관점에서 주로 다루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고 있다. 청소년은 참정권이 없기 때문에, 선거에서나 정책 논의에서나 사교육비가 부담스러운 학부모·보호자에게 호소하는 이야기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사교육을 교육 문제의 핵심으로 지목하는 관점으로는 학생들의 인권으로 교육 문제를 바라보지 못하게 되고, 학생들의 삶의 문제는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된다. 이러한 관점하에서 주된 폐해로 지목되는 것은 가계 사교육비 부담 그리고 사교육 때문에 계급 상승의 기회가 불평등해진다는 것이다. 교육의 내용이나 의미, 학생의 교육 경험에 대한 문제의식은 상대적으로 희미해진다. 또한 공교육을 포함하여 교육 제도의 잘못보다도 학부모들의 교육열이나 욕망에 더 책임을 묻게 되는 면도 있다.
공교육은 교육권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이며, 인권으로서의 교육권은 단지 학교에 다니고 공부를 많이 하게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교육이 학생들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의미 있는 과정으로 이루어져야만 교육권이 보장된다고 할 수 있다. 〈유엔아동권리협약〉 등에 따르면, 학생들은 교육의 과정에서 인권을 존중받아야 하고, 성장하고 인격과 재능을 계발할 수 있어야 하며, 사회에서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어야 한다. 〈교육기본법〉을 보아도 교육의 목적을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은 이와는 매우 다른, 왜곡된 목적에 봉사하고 있다. 모든 학생들의 평등한 권리 보장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학생들을 선별하고 서열화하고 차별하는 과정으로, 인적 자원 계발의 수단으로, 계급 상승의 기회를 제공하는 경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교육의 공공성과 가치를 해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학생들의 권리를 이중으로 침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애초에 교육의 방향과 방식이 잘못되었기에 학생들은 학교에 다녀도 교육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다. 또한 장시간 과잉 학습과 경쟁, 인권의 포기를 강요당한다. 한국 사회의 교육이 바뀌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교육답지 못한 교육이자 그 교육을 경험하는 당사자인 학생들을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멀리 그대가 보여
이제 나의 손을 잡아 보아요
우리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죠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
우리 앞에 펼쳐질 세상이 너무나 소중해 함께라면
1994년 히트한 더클래식의 대중가요〈마법의 성〉의 노랫말 일부이다. 이 노래는 제목이 '마법의 성'임에도 실제 노랫말 속에서 마법의 성은 그냥 지나쳐 가는 곳일 뿐이라서, 노래 제목이 "어둠의 동굴"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온 적이 있다.
(노래 〈마법의 성〉 작사·작곡자 김광진의 인스타그램)
나는 드라마 〈SKY 캐슬〉과 이어진 우리 사회의 논의를 보며 이 노래가 떠올랐다. 우리는 'SKY 캐슬'이라는 마법의 성을 지나, 사교육과 교육열이 문제라는 오해의 늪을 건너, 경쟁과 차별을 낳는 교육 제도라는 어둠의 동굴 속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SKY 캐슬〉 이후 우리 사회의 논의가 학생들의 경험과 입장에 초점을 맞췄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사교육을 줄일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학생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실현하는 교육을 만들 수 있을까?'를 논제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드라마 〈SKY 캐슬〉이 교육에 대한 더 나은 문제의식을 가졌더라면 현상의 표면인 '사교육'과 '교육열'을 넘어 교육 제도에 대한 논의가 촉진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드라마를 보며 신종 고액 사교육 양태가 아니라 "더 이상 지옥에서 살기 싫다"라고 말하는 청소년 등장인물들의 고통과 냉소에 더 주목했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은 〈SKY 캐슬〉 담론이 가능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 2019년 7월 〈프레시안〉에 쓴 글을 고쳐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