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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현 Oct 06. 2019

'여성'과 '청소년'이라는 닮은꼴

'여학생의 우수함'이란 현상에서 차별을 읽어 내기

언론 등에서 "여풍" 같은 말로 호들갑을 떠는 경우를 들여다보면, 그 실상은 여성이 거의 없던 분야나 직종에 여성 구성원이 40~50% 정도 진출하게 된 지극히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을 묘사하는 일일 때가 많다. 그런데 과장된 호들갑이 아니라 명백하게 여성의 우세가 나타나고 있는 곳도 몇몇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학교, 교실이다.


교사 성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여학생들이 남학생들보다 수능 시험을 비롯하여 학업 성적에서 더 우세하다는 각종 통계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상위권 대학입시 결과에선 남학생 집단이 여전히 조금 더 우세하다고는 하지만, 초·중·고 학교 내에서의 수업 태도나 성적 등은 평균적으로 여학생 집단이 우세하다. 과거 남녀공학에서는 남학생들의 성적이 너무 뒤떨어진다는 이유로 학교장의 재량으로 남녀 학생 성적을 분리하여 따로 매길 수 있게 하기도 했다. 이러한 성적 분리 산출은 2007년부터 금지되었다. 성적 외의 학교생활에서도 여학생들은 더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교사들 사이에서는 여학생 반 또는 여학교를 선호하는 풍조가 공공연하다. 특히 중고등학교에서는 남학생에 대해서는 농담 섞어 '짐승 같다'는 등의 형용어를 붙이며 여학생이 관리나 지도 면에서 편하다고 말하는 교사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성차별의 결과 


이러한 현상의 원인에 대해 그간 여러 해석이 제시되어 왔다. 가령 여성이 남성보다 전두엽이 더 크다는 식의 생물학적 설명이 있다. 그렇지만 그와는 상반되게 성별에 따른 뇌의 유의미한 차이는 없다는 연구도 있고, 성별에 따른 집단적 차이가 있더라도 그리 크지 않다는 연구도 있다. 그렇기에 생물학적 요소의 영향이 있다 하더라도 단순히 그것만이 원인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여학생들의 학업 성적이 더 좋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성차별의 결과라는 해석도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성별에 상관없이 인정받고 칭찬받을 수 있는 대표적인 영역이 공부이고 시험 성적이기 때문이다. 성차별이 엄존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더 열심히 노력하고 더 좋은 성적을 성취해야 한다는 압박을 직간접적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숫자로 증명할 수 있는 영역(각종 시험)에 여성들이 사력을 다해 몰두하고, 그만큼 우세한 현상은 성평등의 결과가 아니다. '왜 여성들은 같은 조건에 있는 남성들보다 훨씬 고군분투해야 하는가?'를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한낱, 〈여학생은 성적이 '너무' 우수하다?〉, 《걸 페미니즘》, 교육공동체 벗, 2018) 보통 입시나 진로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하는 10대 중반 이후라면, 성별에 따라 직업 선택지가 달라지고 성별임금 격차가 36.7%에 달하는(2016년 OECD 조사) 등의 성차별적인 사회 현실이 여학생에게 더 큰 학업 동기로 작용할 수 있다.


여성과 청소년, 닮은꼴 


물론 이러한 설명들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 다만 이에 덧붙여, 시험 성적뿐만 아니라 학교생활에서의 차이까지 설명하려면, 나는 여성과 청소년이 받는 억압에 닮은 점이 있다는 것을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청소년 또는 학생에게 요구하는 행동거지나 규범은 여성에게 요구하는 바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여성 청소년이 '좋은 학생'이 되기가 더 쉽지 않을까. 


사회학자 폴 윌리스는 저서 《학교와 계급재생산》에서 1970년대 영국에서 공업 도시의 노동계급 남성 청소년들이 반(反)학교 문화를 형성하고 노동계급으로 재생산되는 모습을 담아냈다. 그런데 여기에서 크게 작용하는 요소가 가부장제와 남성성이다. 윌리스가 만난 노동계급 남성 청소년, '싸나이(lads)'들은 육체노동은 남성적인 것으로 정신노동은 여성적인 것으로 여기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순응하는 태도는 '계집애들' 문화라고 깔보고 있었다. 그들은 반항이나 일탈, 까불기와 익살 떨기 등은 남성적인 것으로 여겼고 이를 통해 결속을 다졌다. 


당시 영국의 상황이 한국의 현실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성과 여성성 그리고 학교가 요구하는 학생상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힌트 정도는 될 듯싶다. 온라인 게임, 인터넷 커뮤니티 등 한국 남성 청소년들의 또래 문화 역시 반학교적 성격이 강하다. 반대로 말하면 여성 청소년들은 상대적으로 학교의 공식적 규범에 순응하는 데 문화적인 걸림돌이 적다는 뜻도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은 한국의 긴 학습시간 속에서, 정해진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것을 끊임없이 요구받는다. 그리고 여성은 남성에 비해 신체적으로 덜 활발할 것을, 더 '얌전하고 조신할 것'을 요구받으며 자라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여성으로서 사회화된 태도는 학교생활에 더 쉽게 적응할 수 있게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또한 한국 사회는 여성에게 좀 더 많은 예의범절, 웃는 낯, 싹싹한 태도를 바란다. 여성들에게 순종적일 것을 덕목으로 제시하는 것은 이제 구시대적이라고 이야기되지만, 이런 불평등한 잣대는 은연중에 사람들의 태도와 생각 속에 남아 있다. 이는 결국 좀 더 '아랫사람'으로서의 태도를 가지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학생들 역시 '아랫사람'으로서 교사에게 예의를 잘 지키고 싹싹하게 굴 것을, 순종적일 것을 덕목으로 삼아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교사들이 여학생들을 더 '좋은 학생', '모범생'으로 인식할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여성과 아이는 한 배에 탔다" 


이와 같이 '여자다움'과 '학생다움' 사이의 유사성, 권력관계 속의 약자이자 사회적 소수자로서 닮은 점은, 여학생들이 학생으로서 더 높은 성과를 얻는 데는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여학생들이라 해서 모두 그렇단 것은 아니다. 사회화 과정에서 성차별적으로 다른 신체, 다른 행동 양식, 다른 기준을 요구하면서 성별에 따라 다른 양상이 생기고, 학교생활이나 학업 성적에도 반영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차별의 논리로 이어질 위험성도 잠재되어 있다. 가령 여학생이 활달하게 뛰어 다니거나 하면 '여자애답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남학생은 미성숙하고 거칠다며 여학생을 선호하는 것은 반대로 여학생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남학생들에게는 더 관대한 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학생들의 학업 성적이 우수하다는 것의 의미를 여성성의 일종이라고 폄하하는 경향도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기업에서 여성은 성적이 좋더라도 리더십이나 적극성, 진취성 등이 부족하다며 남성을 선호하고 우대하는 식이다. 기업에서나 정치적으로나 고위직은 여성에게 부적합하다는 편견도 여전히 잔존해 있다. '여학생'들이 '좋은 학생'으로 평가받는다고 해도, 그것이 '여성'들이 온전하고 평등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대우받는단 의미는 아님을 시사한다. 


여학생의 학업 성적 면에서의 우세는 때로는, 이미 성평등이 상당부분 실현되었고 오히려 남성들이 더 힘들다는 이야기의 근거로 쓰이곤 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은 여성들의 우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럼에도 여성들이 사회 고위층을 많이 차지하지 못하는 건 성차별 때문이라는 증거라고 이야기되곤 한다. 한국 사회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역사 속에서 여성은 교육권을 박탈당하고 '여자가 무슨 공부냐'며 차별받아 왔다. 현재도 이런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여성이 교육 과정에서 충분히 참여할 수 있게 된 것 자체는 중요한 성과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학생의 성적 우세가 아직도 남아 있는 여성과 청소년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낳은 현상일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페미니스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저서 《성의 변증법》의 '아동기를 없애자' 챕터에서 "여성과 아이들은 이제 형편없는 한 배에 탔다"라고 적었다. 모성과 아동기의 연관성을 이야기하며 비판한 파이어스톤의 맥락과는 조금 다른 결이긴 하지만, 여성과 청소년은 사회적 소수자로서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고 유사한 억압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도 한 배에 타 있다. 


여성이란 이유로 더 얌전하고 조신하고 순종적일 것을 요구받는 것은 성차별적이다. 학생이라는 이유로 시키는 대로 공부만 하고 순응적일 것을 요구받는 것은 억압적이다. 여학생이 더 학교가 관리하기 편하고 성적도 우수하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여성과 학생-청소년에게 바라는 모습이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라는 방증은 아닐지 반성해 봐야 한다. 차별과 억압을 넘어, 다른 규범과 다른 교육을 만들어가기 위한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다. 



※ 2019년 8월 〈프레시안〉에 쓴 글을 조금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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