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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현 Jan 21. 2020

필요한 마침표를 제대로 찍지 않는 문제

체벌 금지 등으로 이야기하는, 변화에 필요한 태도

식당이라든지 버스 같은 데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방송을 무심히 듣다 보면 눈살이 찌푸려질 때가 있다. 청취자 사연으로 옛날 추억을 들려주는 코너들이 많은데, 심심찮게 어릴 적 당했던 체벌을 포함한 폭력과 학대, 인권 침해의 경험들이 등장한다. 그런 일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담아서 이야기하는 경우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재미있고 웃긴 일, 뭔가 훈훈한 풍경 같은 것으로 묘사될 때가 더 잦은데, 그럴 때면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마치 인종차별이나 학살을 가볍게 이야기하거나 농담거리로 삼는 것 같은 섬뜩함마저 느끼곤 한다. 얼마 전에는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교사인 청취자가 초임 시절에 학생들을 폭행하는 데 쓰기 위한 도구들을 얼마나 다채롭게 찾아서 들고 다녔는지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더랬다.


그런 이야기의 서두에 곧잘 붙는 어구가 있다. “지금은 보기 어려운 모습이지만…”, “그 시절에는 흔한 일이었는데…” 등이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이야기도, 어린이·청소년의 인권을 위해 법으로 금지되었다는 이야기도 없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사라진 문화인 듯 말이다. 가령 옛날에는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공기놀이와 팽이치기를 하며 놀았는데 요새는 그런 모습을 보기 어렵다는 이야기라도 하는 것 같다.


분명히 세상은 변했다. 청소년인권에 대한 인식도 20년, 30년 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고들 한다. 한데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 교사에게 친권자에게 사생활을 침해당하고 감금당하던 이야기, 학생들이나 자식들을 두들겨 패던 이야기들이 대중 매체에서 그토록 쉽게 미화되고 희화화되는 것일까. 어째서 그런 방송들이 걸러지지도 편집되지도 않고, 방송에 나오더라도 아무도 문제 제기하지도 않으며, 정부에서도 심의도 제재도 하지 않는 것일까.



사과하고 반성한 이들은 얼마나 될까


권력관계 속에서 우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차별과 폭력 등에 대해서 쉽사리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자체가 체면을 손상시키고 권력을 포기하는 일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사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 전반의 풍조나 관습의 문제에서는 오히려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게 된다. 다들 그랬으니까, 그래도 됐으니까 잘못이 아니었다고 정당화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학교에서의 체벌 문제를 살펴보자. 2011년 이후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 ‘징계 시 도구, 신체 등을 이용하여 학생의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포함되면서 학교 체벌은 크게 제한되었다. 2015년 〈아동복지법〉에 ‘아동에게 신체적 고통이나 폭언 등의 정신적 고통을 가하여서는 안 된다’라는 조항이 생겨서 친권자뿐만 아니라 교사에게도 적용되고 있다. 경기도, 광주광역시, 서울특별시, 전라북도 4개 지역에서 시행 중인 학생인권조례에서도 명확하게 체벌 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이런 법의 변화만 놓고 보면 한국 사회는 2010년대 들어서 체벌이 잘못되었다는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체벌 금지라는 중요한 변화를 일구어 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야를 옮겨 보자. 그동안 학생들을 대상으로 체벌을 해 온 초·중등학교 교사들, 그중 현재도 재직 중인 교사는 아마 적게 잡아도 수만 명 이상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 중 공식적으로 체벌 전력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하는 입장을 밝힌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공개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바로 작년까지도 체벌을 가해 온 학생들에게, 혹은 학교를 졸업한 예전 학생들에게 연락해서라도 반성과 사죄의 뜻을 전한 사람들은 몇 명이나 있을까? 반면 교실에 서서 공개적으로 “세상 좋아져서 체벌 금지니 뭐니 해서 이젠 너희들 때릴 수도 없고, 참…” 하며 툴툴댄 교사들은 얼마나 됐을까? 몇몇 경험담들로 추측해 보건대 반성과 사과보다는 불만 표출과 체벌 금지 비난이 훨씬 더 많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체벌이 잘못이고 악이라 금지됐다는 인식이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현재 법적으로도 완전히 체벌 금지를 달성했다고 보기는 불완전한 점들이 있기는 하다. 그래도 나중에라도 우리 사회가 체벌 금지를 온전히 달성했다고 마침표를 찍었다고 할 만한 순간이 있다면, 그건 정부의 체벌 금지 선언도 아니고 공식 통계 조사에서 체벌 경험 비율이 0%대로 나오는 날도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과거 체벌을 행했던 사람들 다수가 공식적으로 반성과 사죄의 뜻을 밝히고 다른 사회 구성원들이 그 사죄를 받아들이는 순간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것이 되는


문제는, 이처럼 제대로 마침표를 찍지 않은 일들이 한국 사회에는 특히나 많아 보인다는 점이다. 군사 독재 정권에서 인권을 짓밟는 판결을 내렸던 판사가, 그에 대해 어떠한 반성도 처벌도 없이 오히려 고위직이나 명예로운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 같은 것이 그러하다.


1980년대에 고등학생운동을 하며 민주화와 참교육을 요구하다가 학교에서 폭력과 징계를 당하고 퇴학당했던 사람들이 제대로 사과도 배상도 받지 못했던 사례들도 있다. 예를 들자면, 1990년 대구 경화여고에 다니던 김수경 학생은 학생회 활동을 하고 전교조 해직 교사를 지지하는 활동을 하다가 학교에 ‘빨갱이’, ‘운동권’이라고 찍혀 고초를 겪어 왔다. 그러다가 어느 교사에게 심한 폭행·폭언을 당한 뒤 투신, 운명하였다. 그러나 학교 측도 폭력을 가했던 교사들도 김수경 열사의 죽음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고 책임진 바가 없었다고 알고 있다. 이런 일들이 그저 그 시대엔 원래 다 그랬다고 하며 잊혀도 되는 것일까.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세상은 변해 왔다. 청소년인권만 하더라도 나아진 점도 많다. 하지만 세상이 변화하는 와중에 과거의 과오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과오는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나간 것이 되어 버린다. 그때는 그랬고 지금은 이렇다고, 가치 평가는 피한 채 그저 시대의 변천사로 의미가 축소되어 버린다. 물론 “그때는 다들 그랬던”, “그게 옳은 줄 알았던”, “혼자 어쩔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럼 그땐 다들 틀렸던 것이고 모두들 잘못한 것이었다고라도 확실히 해야만 한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도 배보상도 없을 때, 비록 세상은 좋아지더라도 그 한구석에는 앙금이 쌓이고 변화의 발목을 잡게 된다. 체벌이 금지됐다고 해도 여전히 학교에서 가정에서 체벌이 일어나고 있고, 라디오에서 TV에서 체벌 경험을 미화하고 희화화하는 일이 벌어지듯이 말이다. 세상의 변화에 발맞추는 재주도 물론 필요하지만, 변하기 전의 과오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려 하는 태도야말로 변화하는 시대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소양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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