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라는 포장지 #2

2화 그 아이는 철이 들지 않았다 – 장모님의 고백

by 공인멘토
ChatGPT Image 2025년 7월 15일 오후 11_02_35.png

장모님은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결혼하고 처음 명절 인사를 갔을 때도, 환한 인사 대신 짧은 눈인사만 건네셨다.
무뚝뚝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기뻐도, 화가 나도, 슬퍼도 표정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웃는 얼굴은 사진에서만 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오래된 흑백사진 속에서.

나는 그런 장모님을 ‘정말 철든 사람’이라 생각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를 때, 장모님은 조용히 일만 했다.
누가 화를 내든, 누가 실수를 하든, 늘 뒷정리를 도맡아 하셨다.
지치셨을 텐데도, 힘든 기색 하나 내지 않았다.
그렇게 묵묵히, 한결같이 살아가는 모습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장모님이 울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터지듯 울어버리셨다.


“난 한 번도 사랑받아본 적이 없어요.”

모두가 모인 어느 날이었다.
설거지를 하시던 장모님이 갑자기 그릇을 놓고 식탁에 주저앉았다.
누가 무례한 말을 한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충격적인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가 장난삼아 이런 말을 했다.

“어머님은 진짜 강철 같아요. 감정이라는 게 있으신가 몰라요~”

그 말에 장모님은 가만히 앉아 계시더니, 잠시 후 손등으로 눈을 훔치셨다.
그 모습이 어색했다.
울음은 장모님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이, 우리 모두를 멈춰 세웠다.

“난 한 번도 사랑받아본 적이 없어요.”


감정을 모른 채 철든 아이

장모님은 그날 밤, 술 한 잔도 안 하셨는데 이상하게 입을 열기 시작하셨다.
어릴 때 아버지가 자주 집을 비우셨고, 어머니는 일하느라 늘 밖에 있었다고 했다.
장녀였던 장모님은 동생들 밥 챙기고, 빨래하고, 잔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따뜻하게 안아주거나,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어른은 없었다.

“어릴 땐 그냥 내가 잘못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
내가 말을 안 들어서, 내가 못나서, 내가 안 예뻐서.”

그 시절부터 감정을 표현하면 혼이 났다고 했다.
울면 “짜증난다”고 했고, 웃으면 “시끄럽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그냥 ‘표현하지 않는 것’이 몸에 밴 것이다.

그렇게 철든 아이가 됐고,
결혼해서도 그 역할을 벗지 못한 채 엄마가 되고, 시어머니가 되고, 장모가 되셨다.


철이 든 게 아니라, 감정을 잃은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생각이 바뀌었다.
장모님은 ‘철이 든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접고 산 사람’이었다.
내가 보기엔 감정을 잘 다스리는 어른 같았지만,
실은 감정을 느낄 줄 몰라서 침묵만 택한 아이였던 것이다.

그 아이는 지금도 울고 있다.
그날 저녁처럼, 말 한마디에 무너져 내릴 만큼
아직도 가슴 어딘가에는 ‘받지 못한 사랑’이 결핍처럼 남아 있다.

자식들에게도 장모님은 따뜻함보다는 책임감으로 다가왔다.
"애들은 그냥 먹고 재우면 되는 거지, 뭘 더 바라냐"고 말하셨지만,
그 안에는 감정을 나눌 줄 몰랐던 슬픈 무능함이 숨어 있었다.

억눌린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은 표현하지 않는 고통을, 고통이 아닌 줄 안다.
그러나 묻어둔다고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말하지 못한 고통은 침묵이라는 이름으로 딱지처럼 붙는다.
딱지가 쌓이면, 언젠가는 터진다.

장모님의 눈물은 그날, 그렇게 터져버린 것이다.
그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말하지 못했던
“나도 사랑받고 싶었다”는 말의 폭발이었다.

신앙은 감정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한동안 장모님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물었다.
“주님, 저분은 왜 그렇게 오랫동안 참고만 살아야 했을까요?”

그때 문득 떠오른 구절이 있었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우셨더라.” (요한복음 11:35)


예수님도 우셨다.
하나님의 아들도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정을 말하는 건 연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에 닮기 위한 정직함일 수 있다.

장모님의 눈물은 신앙의 실패가 아니라,
신앙의 시작이었다.
그분 안의 아이가 드디어 하나님 앞에서 울 수 있게 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철든 사람처럼 살았지,
사실은 단 한 번도 내 감정에 철이 들어본 적 없었다.”


다음 화 예고

〈눈물로 포장된 관계, 그걸 찢는 용기〉
부모와 자식. 책임과 사랑.
찢어야 할 건 사랑이 아니라, 그 위에 얹힌 눈물의 포장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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