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감정은 도망치면 더 따라온다

by 공인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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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수업이 시작된 것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아이들은 교과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대충 흥얼거리거나 졸린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천재 역시 똑같이 앉아 있었다. 눈은 칠판을 향했지만, 마음속엔 언제나 그렇듯 계산과 논리가 흐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음악 선생님이 스피커에 꽂은 USB에서 부드러운 현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엔 단순한 클래식 곡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몇 초 지나지 않아 천재의 동공이 흔들렸다. 피아노의 맑은 선율이 교실을 가득 채우자, 가슴 안쪽에서 설명할 수 없는 떨림이 일어났다.

“이 곡은… 왜 낯익은가?”

머리로는 알 수 없었다. 제목도, 작곡가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는 익숙했다. 너무나 선명하게, 오래전 어디선가 들었던 소리였다. 천재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무의식적으로 움켜쥐었다. 손끝이 차갑게 식고, 땀방울이 스멀스멀 맺히는 것을 스스로도 느꼈다.

옆자리 친구가 슬쩍 그를 보며 속삭였다.
“야, 너 왜 그렇게 땀 흘려? 덥냐?”

천재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속은 이미 요동쳤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귀까지 올라와 쿵쿵 울렸다.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단순한 음악인데, 왜 이렇게 몸이 먼저 흔들리는가? 교실 안의 공기는 평소와 같았지만, 그의 세계는 낯선 파도에 휩쓸린 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혹시나 얼굴이 이상하게 보일까 두려웠다. 이 낯선 감정이 티라도 날까 싶어, 최대한 무표정으로 버텼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손끝이 떨리고, 눈꺼풀이 묘하게 무거워졌다.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선율은 교실 천장에 부딪혔다가 다시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천재는 순간 깨달았다.
“이건 논리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천재는 무언가에 쫓기듯 교실을 빠져나왔다. 복도의 창가에 서서 손끝을 꼭 움켜쥐었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창밖의 햇살은 따뜻했지만, 그의 내면에는 알 수 없는 한기가 밀려왔다. 그 순간, 기억의 파편이 불시에 틈을 벌리고 들어왔다.

― 오래전, 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어느 겨울밤.

작은 방 안. 전등은 희미하게 깜박이며 어둠을 간신히 밀어내고 있었다. 방 안 공기는 눅눅한 젖은 수건 냄새와 약 냄새가 뒤섞여 숨이 막힐 정도였다. 이불을 덮은 엄마가 벽에 기대앉아, 한 손으로는 기침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지막이 이불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어린 천재는, 무릎 위에 작은 손을 포개고 그저 엄마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 말도, 아무 표정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어쩐지 낯선 장면을 눈앞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엄마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고,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떨리고 있었다.
“우리 천재야… 엄마가 미안해. 더 안아주고, 더 웃게 해주고 싶은데… 몸이 말을 안 들어서, 네 옆에 있어주는 것밖에 못 하네.”

엄마는 그 말을 하면서도 무릎 위 작은 손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지금의 천재는 새삼 가슴이 아리게 기억해 냈다. 하지만 그때의 어린 나는 그 온기를 ‘감정’으로 해석하지 못했다.

엄마는 마지막 힘을 모아 자장가를 흥얼거렸다.
“잘 자라, 내 아가야… 오늘도 무사히 잘 자라…”
쉰 목소리가 자꾸 끊기며 흘러나왔고, 그 속에는 기도 같은 눈물이 섞여 있었다.

어린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단지 눈을 깜빡였을 뿐이다. 왜 엄마가 울면서 노래를 부르는지, 왜 ‘미안하다’고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이상한 상황으로만 기억되었다.

그때 감지하지 못한 감정이, 지금의 천재 안에서 파도처럼 몰려왔다. 가슴이 갑자기 죄어들고, 눈가가 뜨겁게 젖어들었다.

“……그날, 나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는데.”
천재는 창가에 서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아픈가?”

복도 창가에 서 있는 천재의 눈은 여전히 음악실에서 흘러나오던 선율의 잔향에 붙잡혀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단순한 곡일 뿐이었는데, 이제는 과거의 공기와 냄새, 엄마의 목소리와 함께 억지로 꺼내진 오래된 상자처럼 그의 안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천재는 자신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분명 엄마는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자장가를 흥얼거리며, 어린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 순간의 나는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숨만 쉬며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지금,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가? 왜 눈이 시큰거리고, 손끝이 덜덜 떨리는가?

“그때의 나는 감정이 없었던 게 아니다. 단지… 감정에 닿을 길이 없었던 거다.”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며 천재는 순간 죄책감 같은 낯선 감정을 느꼈다. 마치 엄마의 눈물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던 그날의 무표정이, 이제 와서 거대한 빚처럼 자신을 압박해 오는 듯했다.

‘나는 잘못한 걸까? 엄마가 그렇게 아팠는데, 아무 말도 못 한 게 실수였던 걸까? 아니면… 그냥 어려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걸까?’

그 질문들이 파도처럼 겹겹이 밀려들었다. 천재는 처음으로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이 겹쳐져 충돌하는 낯선 혼란을 경험했다.

집으로 돌아온 천재는 방문을 닫고 책상에 앉았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시계 초침 소리조차 낯설게 크게 들렸다. 교실에서 쏟아져 들어온 기억들이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채 머릿속을 소용돌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노트를 펼쳤다. 늘 그렇듯, 혼란스러운 순간엔 기록을 통해 정리하려 했다. 펜촉이 종이를 긁으며 적어 내려갔다.

“감정은 망각될 수 있는가?”

적고 난 뒤 잠시 멈췄다. 곧 이어서 또박또박 단어를 이어 썼다.

“기억은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숨어 있을 뿐이다.”

천재는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 아픈 엄마가 흐느끼며 불러주던 자장가가 떠올랐다. 그때의 자신은 돌처럼 굳어 있었지만, 사실 그 순간에도 심장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무표정했던 게 아니다. 나는… 감정을 표현할 수 없어서, 감정을 숨길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보였던 거다.”

그 말은 자신을 향한 변명이자, 동시에 새로운 해석이었다. 무표정은 결핍이 아니라 방어였다. 감정을 처리할 수 있는 ‘길’이 없으니, 몸은 스스로 감정을 잠그는 벽을 세웠던 것이다.

천재는 다시 노트에 글씨를 남겼다.

“무표정 = 결핍이 아님. 방어. 감정을 잃은 게 아니라, 감당할 수 없어서 덮어둔 것.”

쓰고 나자 손끝이 떨렸다. 마치 오래된 상처를 다시 꿰매는 것처럼, 펜 끝이 종이에 남긴 흔적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한동안 펜을 내려놓고 책상 위에 이마를 묻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무표정은, 사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쓴 ‘가면’이었음을.

천재는 이마를 책상에 묻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방 안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오래된 울음 같은 것이 함께 끌려 나오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노트를 바라봤다. 거기에 적힌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무표정 = 방어.”

세 글자가 칼처럼 또렷했다. 그 순간 어린 시절의 기억이 다시금 파도처럼 밀려왔다.
어두운 방 안, 앓는 엄마 곁에 앉아 아무 말도 못 하던 자신. 그때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맴돌았다.

“천재야, 미안하다. 엄마가… 많이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는 그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린 마음에 ‘미안하다’는 말의 무게를 이해할 수 없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가만히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수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장면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엄마의 떨리는 숨소리, 희미한 자장가의 가락, 그리고 스스로의 돌처럼 굳은 표정.

천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나는… 느끼지 못한 게 아니었다. 단지, 너무 어려워서 감당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는 펜을 들어 다시 노트에 적었다.

“감정은 지나간 일이 아니다. 느끼지 못한 감정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다.”

글자를 쓰는 순간,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금이 간 댐처럼 터져 나오려 했다. 그는 손끝으로 눈가를 눌렀지만, 곧 따뜻한 물기가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눈물은 지금의 아픔이 아니라, 오래전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이제야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그때 울지 않았지만, 지금 울고 있다. 그리고 이 눈물이… 그때의 나를 대신해 주고 있다.”

천재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감정을 마주한다는 건, 과거의 나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나를 지금에서라도 끌어안는 일이었다.


감정 관찰 보고서 23호.

오늘, 나는 오래전에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을 다시 만났다.
음악 한 곡이 문을 열었고, 그 문 너머에는 어린 날의 내가 앉아 있었다.

그날의 나는 무표정이었다. 엄마가 아파서 눈물을 훔치며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을 때도, 나는 아무 반응 없이 앉아 있었다. 그때는 정말 감정이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오늘 나는 알았다. 그건 없음이 아니라, 감당하지 못해 숨긴 것이었다는 사실을.


감정은 기록처럼 저장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였다.
나는 그것을 회피한다고 믿었지만, 감정은 잊히지 않았다. 오히려 내 안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날 따라왔다. 오늘처럼, 불시에.

나는 깨달았다. 감정은 도망친다고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이 내 뒤를 따라붙는다.
느끼지 않은 감정은 끝난 일이 아니다.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현재다.

“감정은 피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감정은 따라온다. 언젠가, 반드시 나를 붙잡는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나는 그것을 마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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