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책임은 감정을 남긴다

by 공인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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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책임은 감정을 남긴다


반장으로 뽑힌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교실 앞에 서 있는 순간은 여전히 낯설었다. 점심을 대충 먹고 다시 모인 반 아이들 앞에서 활동 보고가 이어졌다. 발표 순서는 정해져 있었고, 오늘은 친구 A가 맡은 차례였다.

A는 준비해 온 자료를 들고 앞에 섰지만, 목소리가 자꾸 떨렸다. 시선은 종이에만 꽂혀 있었고, 발표가 중반쯤 넘어갔을 때 작은 실수가 튀어나왔다. 숫자를 잘못 읽은 것이었다.

이천재의 눈은 즉각 반응했다.
“그 수치는 오류입니다. 3페이지가 아니라 5페이지에 있는 값입니다. 그리고 단위 환산도 맞지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단정하고 또렷했다. 방금 전까지 웅성거리던 교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마치 칼날이 공기를 가른 듯, 분위기는 한순간 싸늘해졌다.

A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잃은 채 종이를 더듬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목소리도 작아져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됐다. 결국 몇 줄 더 읽다 말고 발표를 중단했다.

아이들 사이에 흐르는 공기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누군가 크게 웃는 것도, 나서서 돕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정적만이 남아 있었다.

천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사실을 지적했을 뿐이다. 잘못된 건 바로잡아야 한다. 정확해야 한다.”

그는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하지만 눈앞의 A는 발표를 이어갈 힘조차 잃은 듯 굳어 있었다. 천재가 논리적으로는 완벽한 말을 했음에도, 교실은 더 이상 학습의 장이 아니라 숨 막히는 장소가 되어 있었다.

그때 윤아의 시선이 날카롭게 꽂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만으로도 천재는 처음으로 ‘내 말이 누군가의 마음을 멈추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불편함을 느꼈다.



2절 사라진 친구와 윤아의 말


회의가 끝나자마자 교실 안의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천재는 여느 때처럼 자리로 돌아왔지만, 앞자리에 앉아 있던 A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료를 들고 서 있었는데, 언제 빠져나갔는지 흔적조차 없었다. 자리 위에 놓인 연필과 공책만이 허전하게 남아 있었다.

천재의 시선이 그곳에 머무는 사이, 윤아가 다가왔다. 그녀의 표정은 평소처럼 부드럽지 않았다. 오히려 단단히 굳은 듯, 차갑게 말이 흘러나왔다.

“너 또 그렇게 말했지. 그럼 사람 다쳐.”

천재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오류를 고친 건데, 잘못된 건가요?”

윤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한숨을 내쉰 뒤, 그녀는 조금 더 강한 어조로 말했다.
“넌 이제 반장이잖아. 네가 하는 말은 그냥 개인 의견이 아니야. 애들 앞에서 네가 던지는 말은, 그 사람 마음에 그대로 박힌다고.”

그제야 천재는 어렴풋이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동안 자신이 지적할 때마다 얼굴이 굳어지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완전히 납득하지 못했다. ‘나는 사실만 말했다. 왜 감정이 문제가 되는 거지?’

윤아는 잠시 천재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천재의 귓가에는 마지막 말이 오래 맴돌았다.

“넌 이제 네 말이 누군가한테 어떻게 들릴지, 생각해야 해.”

교실 한쪽 빈자리는 여전히 차갑게 비어 있었고, 천재의 가슴 안에도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한 감정이 남아돌았다.



3절 영향력의 무게


쉬는 시간, 천재는 교실 뒤편 창가에 서서 조용히 노트를 펼쳤다. 여느 때처럼 오류를 기록하고 분석하려 했지만, 글씨가 자꾸만 삐뚤어졌다. 마음속이 이상하게 어수선했기 때문이다.

그때 민석이 다가왔다. 평소라면 장난 반, 웃음 반의 말투였겠지만, 이번엔 다소 진지했다.
“야, 넌 말 한마디로 사람 무너뜨릴 수 있는 거 알아?”

천재는 펜을 멈추고 민석을 바라봤다. 민석의 눈빛은 웃음기 하나 없이 단단했다.

“그냥 네가 반장이니까 애들이 뭐라 못 하는 거지. 근데 솔직히, 너한테 상처받는 애들 많아.”

천재는 곧장 반박하려 했다. “나는 오류를 바로잡은 겁니다. 잘못된 정보를 방치하면 전체가 피해를—”

그러나 민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네 말이 맞아도, 듣는 사람한테는 칼처럼 꽂힐 수 있어. 네가 반장이니까 그 무게가 더 크다고. 너는 그걸 책임져야 해.”

그 순간 천재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민석의 말이 단순한 충고가 아니라, 묵직한 사실처럼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던진 짧은 한 문장이 친구 A의 마음에서 어떤 울림으로 번졌을지,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민석은 마지막으로 낮게 덧붙였다.
“넌 똑똑해. 그래서 더 조심해야 돼. 네 말은 그냥 말이 아니라, 애들한테는 반장의 말이거든.”

천재는 대답하지 못했다. 손끝이 서서히 굳어가며, 자신이 지닌 위치와 말의 힘을 처음으로 무겁게 자각하기 시작했다.



4절 감정을 남겼다는 건 무엇인가?


집으로 돌아온 천재는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책상 앞에 앉았다. 형광등 불빛이 노트 위를 하얗게 비추었지만, 머릿속은 더 어두워졌다. 낮에 벌어진 장면이 계속 재생되었다.

“나는 또 정확했다.” 천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친구 A의 발표는 분명 잘못된 자료를 근거로 했고, 내가 그것을 지적한 건 옳았다. 그런데 아무도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기는 더 무거워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 교실에서 A가 굳어 있던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얼음처럼 굳어버린 얼굴, 움츠러든 어깨, 그리고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한 발표. 천재는 자신이 ‘정확한 말’을 했을 뿐인데, 그 순간 A의 자신감이 무너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내 말은 사실이었는데… 왜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을까? 왜 공기가 차가워졌을까? 왜 아무도 더 말하려 하지 않았을까?’

민석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를 울렸다. “네 말은 칼이 될 수도 있어.”
그제야 천재는 깨달았다. 자신이 던진 말은 단순히 오류 수정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감정을 꺾어버리는 결과로 이어졌던 것이다.

“실수란 단순히 잘못된 답을 말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불쾌감과 위축감을 남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천재는 무겁게 고개를 떨궜다. 정확함을 추구했던 자신이, 오히려 감정의 균형을 무너뜨린 장본인이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감정은 흔적으로 남아, 앞으로도 A의 발표나 행동에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었다.

“나는 옳았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다치게 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 걸까?”

천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에게 책임이란 지금까지 결과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늘 처음으로, 그는 감정을 남겼다는 것 자체가 책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5절 책임은 감정의 흔적


천재는 노트를 펼쳐 놓고 펜을 굴리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직도 낮의 교실 공기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옳은 말을 했을 뿐인데, 친구들의 눈빛은 그를 멀어지게 하고 있었다.

“선택에는 감정이 따르고, 그 감정은 사람들에게 흔적을 남긴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동안 천재에게 선택은 늘 효율과 정답의 문제였다. 더 나은 답, 더 빠른 길, 더 정확한 논리. 그것이 ‘옳음’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반장이 된 순간, 그의 말은 단순한 판단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분, 누군가의 자존심, 누군가의 자신감까지 흔드는 무게를 가지게 되었다.

민석의 일침이 떠올랐다. “그냥 네가 반장이니까 사람들이 뭐라 못 하는 거야. 근데 그 말, 상처돼.”
그때는 반박하지 못했지만, 지금 곱씹어보니 그 말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왔다. 천재는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의 말이 단순히 ‘정정’이 아니라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손으로 노트에 천천히 적었다.


책임 = 결과가 남긴 감정
결과는 지나가도, 감정은 오래 남는다

내가 만든 감정이 있다면, 그것이 곧 내가 져야 할 책임이다

글자를 적을수록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지금껏 자신은 ‘옳음’만을 지고 살아왔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누군가에게 남은 감정’까지도 자신이 짊어져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책임이란 결과를 감당하는 게 아니라… 그로 인해 남겨진 감정을 껴안는 일이다.”

그는 무심히 창문 밖을 바라봤다. 거리의 불빛이 점점 희미해지는 저녁이었다. 불빛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얼굴처럼 느껴졌다. 그 속에 자신 때문에 움츠러든 A의 표정, 멀어진 친구들의 시선, 그리고 윤아의 단호한 목소리가 겹쳐 보였다.

천재는 비로소 알았다. 책임이란 단순히 ‘내가 잘못했다’는 고백이 아니라, 내가 남긴 감정을 끝까지 끌어안는 용기라는 것을.



6절 책임의 감정


감정 관찰 보고서 25호

오늘 나는 다시 한번 실수를 했다.
아니, 실수라기보다, 책임을 배운 하루였다.

나는 옳은 말을 했다.
수치가 틀렸다는 사실, 자료가 잘못 읽혔다는 오류.
논리적으로 보면 아무 문제없었다.
그러나 발표하던 친구의 표정은 굳었고, 목소리는 사라졌다.
그리고 교실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나는 깨달았다.
사실은 맞아도, 감정은 다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만든 말은 누군가의 자신감을 꺾었고, 누군가의 마음에 주름을 남겼다.
그 주름이야말로 내가 져야 할 책임이었다.

책임은 결과의 완벽함이 아니라, 결과가 남긴 감정에 있다.
오늘의 나를 두고 “정확했다”라고 기록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나의 정확함은 누군가에겐 상처였고, 누군가에겐 거리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적는다.
“책임이란 결과를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긴 감정을 끝까지 껴안는 일이다.”


마지막 문장:
책임은, 감정의 흔적을 감당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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