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의 근원은 미운 너였다 13화

나쁜 사람이 아니라, 서툰 사람이었다

by 공인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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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기억의 파편들


아직도 떠오른다.
그가 내게 던졌던 차가운 말들.
“넌 왜 늘 그렇게 별거 아닌 걸 가지고 유난을 떠니.”
“네가 괜히 예민해서 문제야.”


그 순간마다 나는 작아졌다.
나는 틀린 사람, 문제 많은 사람,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어른 아이처럼 느껴졌다.
그 말들이 지금도 가슴 깊은 곳에 박힌 파편처럼 날카롭게 남아 있다.


나는 오래도록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불렀다.
날 괴롭히려 했던 사람, 나를 무시했던 사람, 내 존재를 부정했던 사람.
그래야만 내 상처가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악해야 내가 피해자가 되고, 내가 살아남을 이유가 명확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를 떠올리다 보면, 아주 가끔 다른 장면이 스친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이던 순간,
그의 얼굴에 스쳐간 이상한 표정.


분명 날 비난하는 말은 차가웠는데,
그 말 뒤에 잠깐 보였던 눈빛은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했다.
마치 자기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사람처럼.
입술은 비난을 뱉었지만, 눈빛은 우물쭈물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표정이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정말 나를 미워했다면, 왜 그렇게 불안한 눈빛을 했던 걸까.
정말 날 무가치하게 여겼다면, 왜 그렇게 목소리가 떨렸던 걸까.


그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상처에만 매달려 있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흘러 돌아보니, 그 표정은 분명 무언가를 말하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혹시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그저 서툰 사람이었을까?



2절. 그는 감정을 표현하는 게 서툴렀다


돌이켜보면, 그는 늘 감정을 어색하게 전했다.
사랑도, 미안함도, 반가움도—
언제나 이상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좋아한다고 말해야 할 순간에는
“너는 참 답답하다”라는 투덜거림이 먼저 나왔고,
미안해야 할 순간에는
“그래도 네가 잘못한 것도 있잖아”라는 변명이 입술을 앞질렀다.


나는 늘 그 말에 상처받았다.
내 마음은 분명 그를 향해 열려 있었는데,
돌아오는 건 비난처럼 들리는 단어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해했다.
‘그는 나를 싫어하는구나.’
‘나는 그에게 아무 의미 없는 존재구나.’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떠올려보면—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등을 돌려 선 적은 없었다.
내 곁에 머물렀고,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늘 고립감을 느꼈다.


그는 감정을 말로 전하는 법을 몰랐다.
어쩌면 그는 평생 그런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는 것,
잘못했을 때 고개를 숙이고 미안하다 말하는 것,
그에게는 낯설고 버거운 과제였다.


그래서 그는 늘 얼버무렸다.
내가 울먹이면, 괜히 헛기침을 하고
“야, 그런 걸로 왜 울어”라고 말했으며,
내가 서운하다고 하면,
“그냥 넘어가자”라는 한마디로 대화를 닫아버렸다.


그의 말들은 늘 나를 비껴갔다.
내 감정과 닿지 못했고, 그래서 나는 상처받았다.
그러나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의 서툼이 내 감정의 부정으로 들렸다는 것을.


그는 서툴렀다.
감정을 건네는 말이 아니라,
억지로 지어낸 농담이나 불필요한 변명에 기대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얼버무림 속에서 버려졌다고 느꼈다.



3절. 그는 누군가를 이해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


나는 오랫동안 그의 말과 행동을 곱씹으며 이렇게 단정했다.
“그는 날 일부러 괴롭히는 사람이야.”
“그는 나를 미워했어.”


그러나 시간이 흘러, 내 안의 분노가 조금 가라앉고 나서야 서서히 보였다.
그가 했던 말과 행동 뒤에는 악의라기보다 서툼이 숨어 있었다.


그는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려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자신의 감정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좋으면 장난처럼 툭 던졌고,
미안하면 농담으로 얼버무렸고,
슬프면 괜히 화를 냈다.


그의 방식은 언제나 엇나갔다.
그는 다정해지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그 다정함은 미숙한 손길처럼 거칠게 다가왔다.
결국 나는 그 손길을 폭력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오해했다.
그가 나를 미워해서 날 비난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는 감정을 전달하는 단어와 표정을 몰랐던 사람이었다.
말은 늘 서툴렀고, 행동은 엉뚱했다.
결국 그 모든 서툼이 나에겐 상처가 되었고,
그는 자신이 상처를 준 사실조차 모른 채 불안하게 눈치를 보았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누군가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결핍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결핍을 ‘악의’로 오해하며 내 마음을 잠가버렸다.



4절. 그의 서툰 표현은 미움이 아니라 미숙함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의 말과 행동을 마음속에서 반복 재생했다.
“넌 왜 그렇게 유난스러워.”
“괜찮은 척 좀 해.”
그 말들이 내 심장을 찢는 칼날 같았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보면, 그는 그 순간마다 어딘가 불편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차갑던 목소리 뒤에서, 그는 늘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그때 그 망설임을 읽지 못했다.
내 귀에는 오직 말의 날카로움만이 들렸으니까.


이제야 알겠다.
그가 내게 내뱉은 말은 미움의 언어가 아니라,
자신의 서툼을 가리는 가면이었다는 것을.


그는 나를 미워한 게 아니었다.
그는 나를 이해하는 법을 몰랐고,
감정을 다루는 법을 몰랐고,
그래서 더딘 손길을 차갑게 포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그의 차가움 속에서 버려졌다고 느꼈다.
하지만 사실 그는 나를 버린 게 아니라,
나를 붙잡을 언어조차 몰랐던 것이다.


이 깨달음은 내 마음에 묘한 균열을 만들었다.
분노와 증오로 단단히 닫혀 있던 벽에 작은 틈이 생겼다.
그 틈 사이로, 그때 보았던 그의 흔들리던 눈빛이 다시 스며들었다.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곧 위로가 되는 건 아니었다.
그가 서툰 사람이었다는 깨달음이 내 상처를 지워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알았다.
그 상처가 미움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미숙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그 순간, 내 안에서 오래된 미움이 조금은 풀어졌다.



5절. 나쁜 사람과 서툰 사람은 다르다


이제 나는 안다.
그때 내가 만난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서툰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가 던진 말들은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은 미움이 아니라 미숙함이었다.


물론 나는 그를 완전히 용서하지는 못한다.
상처는 여전히 흔적으로 남아 있고,
그의 서툼이 내 삶에 남긴 고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더는 그를 증오하지도 않는다.


증오는 나를 갉아먹었다.
서툼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둘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그는 나를 미워한 게 아니라,
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몰랐을 뿐이었다.
그는 내 마음을 부정한 게 아니라,
내 감정을 어떻게 꺼내 들어야 할지 몰라서 비틀거리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를 바라보며 다짐한다.
“나는 서툰 사람이 되지 않겠다.”
내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내 곁의 사람의 감정도 어색하게 넘기지 않겠다.


나쁜 사람과 서툰 사람은 다르다.
나쁜 사람은 타인을 해치려 하지만,
서툰 사람은 그저 감정을 다룰 줄 몰라서 상처를 만든다.


나는 이제 구분할 수 있다.
그를 나쁘다고 단정하며 묶여 있던 시간을 내려놓고,
그의 서툼을 통해 내 성숙의 자리를 발견한다.


그리고 속으로 천천히 중얼거린다.
“그는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이해할 줄 몰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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