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의 근원은 미운 너였다 17화

날 떠난 사람을 탓했지만, 사실은 내가 나를 떠났었다

by 공인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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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그가 떠나고 난 후, 나는 텅 빈 껍데기였다


그가 떠난 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붙잡지도, 울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치 내 안에서 무언가가 함께 빠져나간 듯한 공허함만이 남았다.


사람이 떠나면 그리움이 밀려와야 정상일 텐데,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그리움보다 허무에 가까웠다.
나는 그와 함께 웃었던 기억보다,
그와 함께 있을 때조차 느꼈던 피로감이 더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는 몰랐다.
그를 사랑하면서 나는 조금씩 나를 잃고 있었다는 걸.
그의 취향에 맞추고,
그의 기분에 따라 웃고,
그의 말투에 나의 리듬을 맞췄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내 목소리가 낯설었다.
무엇이 좋고 싫은지조차 헷갈렸다.
내가 느낀 감정은 진짜 나의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좋아할 만한 감정을 흉내 내고 있었던 걸까?


그가 떠난 후 느껴진 그 이상한 허전함의 정체는,
사랑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윤곽이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와의 관계 속에서 점점 작아졌다.
처음엔 맞춰주는 게 사랑이라 믿었고,
조금 더 참으면 관계가 단단해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자기희생의 습관이었다.


그는 떠났다.
그러나 사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 자신으로부터 떠나 있었다.
그는 단지, 내가 버려둔 나의 마지막 흔적을 데려간 사람일 뿐이었다.



2절. 나는 사랑받기 위해, 나를 지우며 살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냥 나로서는 부족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웃을 때마다 나도 억지로 웃었고,
그가 침묵하면 나도 조심스레 입을 닫았다.
그의 기분이 곧 하루의 날씨였고,
그의 말투가 내 감정의 온도를 정했다.


그때는 그것이 사랑이라 생각했다.
‘서로 맞추는 게 관계의 미덕이야.’
‘조금만 더 참고 이해하면, 언젠가는 나도 이해받겠지.’
그 믿음 하나로, 나는 매번 내 감정을 뒤로 미뤘다.
하지만 나중에 알았다.
그건 이해가 아니라 굴종,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었다.


나는 거절당하는 게 무서웠다.
싸움이 싫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가면 아래에
모든 감정을 감추는 법을 배웠다.
불만이 있어도 웃었고, 서운해도 괜찮다고 했다.
그래야 그가 떠나지 않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결국 그는 떠났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떠난 뒤에야 나는 깨달았다.


그가 내 곁을 떠난 게 아니라,
나는 오랫동안 내 곁을 떠나 있었다는 걸.


그와 함께 있던 시간 동안,
나는 내 안의 ‘나’를 방치했다.
감정을 느끼는 일조차 사치처럼 여겼고,
감정의 경계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만 했다.


그 결과, 사랑을 받지도, 나를 사랑하지도 못했다.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면 공허했고,
그의 말 한마디에 존재가 흔들렸다.
나는 그와 함께 있었지만,
그의 세상에서조차 나란 존재는 희미했다.


그때의 나는, 관계 속에서 살았지만
결국 나로서 살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떠났고,
남은 나는 텅 빈 껍데기였다.



3절. 나는 그를 탓했지만, 사실은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가 떠난 후, 나는 오랫동안 그를 원망했다.
“왜 나를 버렸을까.”
“왜 끝까지 나를 이해해주지 않았을까.”
그 질문을 수없이 되뇌며,
내 안에서 그에 대한 미움이 커져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향한 분노보다 나 자신이 더 싫어졌다.
그가 아니라, 나를 향한 화였다.
‘왜 그때 아무 말도 못 했을까.’
‘왜 그렇게 작아졌을까.’
‘왜 끝까지 나를 지키지 않았을까.’


그를 향한 분노는 결국 자기 증오였다.
나는 그를 탓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나를 벌주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은 뛰었지만, 그건 미련이 아니라 죄책감이었다.
사랑받고 싶어서, 나를 버렸던 지난날의 내가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속삭였다.


“넌 그때 나를 버렸잖아.”
“너는 나보다 그 사람을 더 사랑했잖아.”


그 목소리를 듣는 게 너무 괴로워서
나는 계속 그를 탓했다.
그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면
내가 바보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였다.
그가 떠난 뒤에도
나는 여전히 내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
이번엔 그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서.


나는 스스로에게조차 정직하지 못했다.
“괜찮아.” “이젠 다 잊었어.”
그 말을 반복하면서도
내 안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그 울음은 분노가 아니었다.
억눌린 슬픔이었다.
사랑받지 못한 게 아니라,
사랑받기 위해 나를 버려야 했던 그 시절의 슬픔.


그래서 나는 이제 안다.
내가 미워했던 건 그가 아니라,
그때 나를 이해하지 못한 ‘나 자신’이었다는 걸.



4절. 그가 떠난 후, 나는 오히려 나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가 떠난 직후에는 세상이 텅 비어 보였다.
눈을 떠도, 숨을 쉬어도, 하루가 허공 같았다.
식탁 위 컵 하나, 옷장 속 셔츠 한 벌이
그의 흔적처럼 남아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흘러가면서
나는 이상한 변화를 느꼈다.
그가 떠난 자리에서, 낯설 만큼 조용한 평화가 찾아왔다.
하루의 리듬이 달라졌다.
누구의 기분을 살피지 않아도 되는 아침,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저녁.
그저 ‘나’의 기분만으로 하루가 흘렀다.


처음엔 그 고요가 무서웠다.
너무 익숙한 소음이 사라진 듯했다.
그의 메시지가 울리지 않는 밤,
한동안은 외로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런데 그 외로움 속에서
내 안의 ‘나’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이제야 들리네.
그동안 넌 내 말을 너무 오랫동안 안 들었잖아.”



그 목소리는 낯설지만 따뜻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그의 부재가 만든 고요 속에서
비로소 ‘나’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걸.


그동안 나는
누군가의 온기 없이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고요 속에서도 나는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누군가의 사랑으로 채워야만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
나 스스로의 감정으로도 숨 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조금씩 내 취향을 되찾았다.
그가 싫어하던 노래를 틀고,
그가 지루해하던 책을 펼쳤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오랜만에 물었다.
“이게 나였구나.”


이상하게도,
그때서야 세상이 다시 선명해졌다.
햇빛은 더 따뜻했고,
커피 향은 더 짙었고,
내 얼굴엔 잊고 지냈던 생기가 돌아왔다.


그가 떠난 후 찾아온 건 ‘상실’이 아니라 ‘회복’이었다.
나는 이제 안다.
그의 부재는 내 존재의 결핍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통로였다는 걸.



5절. 진짜 상처는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를 버린 나로부터 왔다


나는 오랫동안 그 사람을 원망하며 살았다.
그가 내 마음을 짓밟았다고, 나를 이용했다고, 결국 떠났다고.
하지만 이제 돌이켜보면,
그가 나를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를 그렇게 내버려 두었다는 걸 안다.


그가 내 감정을 무시할 때,
그가 나를 힘들게 할 때,
나는 내 마음을 대신 변명해주지 않았다.
그에게 화내는 대신, 내 감정을 가두었다.
“이 정도쯤은 참을 수 있잖아.”
“사랑한다면 이해해야지.”
그 말들로 나는 나 자신을 설득하며
조용히 나를 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진짜 상처는 그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그 상처는 내가 침묵으로 스스로를 속이던 그 시간들에서 생겨났다.
그는 떠났지만, 나는 그보다 먼저 나를 떠났던 것이다.
그의 이별은 나의 부재를 확인시켜 주는 사건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나는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아무도 없는 방 한가운데서,
나는 내 이름을 속삭였다.
“이제 그만 나를 기다리게 하자.”
그 말 한마디에 눈물이 났다.
그건 슬픔이 아니라, 돌아온 감정의 울음이었다.


나는 이제 안다.
누군가의 사랑이 나를 완성시키지 않는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언제나 나 자신뿐이다.
그가 떠난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의 부재가 내 회복의 첫 장이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이해받기 위해 나를 지우지 않는다.
사랑받기 위해 내 감정을 억누르지도 않는다.
누군가가 나를 떠나더라도,
나는 더 이상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진짜 사랑은 나로부터 시작되고,
진짜 상처는 나를 버릴 때 생긴다.
그리고 진짜 회복은, 나를 다시 품을 때 완성된다.



나는 이제 나를 잃지 않는다.
그가 떠난 자리에서 나는 나를 되찾았다.
그 사랑은 끝났지만,
그 끝에서 비로소 나의 시작이 피어났다.


“그가 떠나서 아픈 게 아니었다.

나를 잃고 살았던 시간이 더 아팠다.
이제 나는 나에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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