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 이웃의 대륙(닫힌 마음의 마을) #10

2장-2: 스케치북 속 진실

by 공인멘토

가온은 조심스럽게 린이 건네준 종이를 펼쳤다. 종이에는 거친 선으로 그려진 하나의 장면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 선은 흔들리지 않았고, 놀라울 만큼 정확했다. 그것은 단순한 상상이나 창작이 아니었다. 기억의 복원이었다.

그림 속엔 깊은 우물이 있었다. 우물 안에서 한 아이가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두 팔을 필사적으로 뻗으며 무엇인가를 잡으려 애쓰는 아이. 얼굴엔 공포와 절박함이 번져 있었고, 그 작은 입은 분명히 외치고 있었다. ‘살려줘.’

하지만 더 끔찍한 건, 그 우물 가장자리를 둘러싼 어른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무표정했고, 정지된 조각상처럼 서 있었다.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고, 누구 하나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손을 뻗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눈은 열려 있었지만, ‘보지 않으려는’ 눈이었다. 입은 굳게 닫혀 있었고, 어떤 이는 입술 위를 검은 선으로 지운 듯 그려져 있었다.

가온은 목구멍이 마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게, 네가 본 거야?”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린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흔들지도 않았다. 대신 조용히 스케치북의 또 다른 장을 넘겼다.

이번엔 마을 광장이 그려져 있었다. 정면에서 본 듯한 구도.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모두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정중앙엔 아이의 초상화가 놓여 있었다. 초상화 아래엔 흰 국화와 조화들이 무표정하게 흩뿌려져 있었고, 그 위엔 ‘침묵의 규율’이라 적힌 회색 천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가온은 그림을 들여다보다가 소름이 돋았다. 그림 속 인물들—그들의 얼굴엔 눈과 코는 있었지만, 입이 없었다. 입 부분만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고, 어떤 이들은 그 위에 검은 X표시가 그어져 있었다.

그 아래, 조그맣게 적힌 글귀.

"그날 이후,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가온은 그림을 든 손을 천천히 내렸다. 마음 한켠에서, 이해가 닿지 않던 것들이 맞물리기 시작했다. 그는 조용히 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무릎 위에 놓인 연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이는 누구야?”

조용한 바람이 지나간 후, 린은 작게 입을 열었다.

“오빠예요. 그 아이는… 내 오빠였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떨렸지만, 그 안엔 꺾이지 않는 힘이 있었다.

“그날… 비가 많이 왔어요. 오빠는 친구들과 장난치다 우물 근처에서 미끄러졌어요. 물속에 빠졌고… 소리를 질렀어요. 엄청 크게. 살려달라고…”

그녀는 말을 이으며 천천히 눈을 들었다. 그녀의 눈엔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마치 감정까지도 얼려버린 듯한 얼굴.

“사람들이… 봤어요. 분명히. 다들 거기 있었어요. 그런데…”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아무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어요.”

가온은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그녀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 그것은 동정도, 분노도 아닌—공명이었다.

그 순간, 린은 또 다른 한 장의 그림을 꺼냈다.

이번엔 그려진 존재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림 속에서,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는 실루엣 하나. 눈이 없는 얼굴.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긴 코트를 휘날리는 자.

그 존재가 지나간 자리에선 사람들이 입을 감싸 안거나, 입이 흐릿하게 사라져 갔다.

“이건 뭐야?”

가온이 숨죽이며 물었다.

린은 입술을 다문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이 마을에 나타나는 존재예요. 귀를 가진 자를 찾아다녀요.”

“귀를 가진 자?”

“말을 듣는 사람… 말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사라져요.”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림 위에 그려진 존재의 이름도, 정체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온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단지 괴물이 아니라—말과 진실을 지우는 자. 마을의 침묵을 강요하는 자.

가온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린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또 한 장의 그림을 꺼냈다.

이번 그림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외투를 입었고, 그 등에는 희미하게 빛나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슬픔을 잊지 않는 자."

그 남자의 주위엔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말없이, 그러나 확실히—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남자는, 바로 가온이었다.

가온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나는, 잊지 않겠다.’

그 순간, 언덕 아래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었다. 아주 약하지만, 방향이 바뀌는 듯한 기척.

침묵의 장막 속에서, 누군가의 기억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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