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 이웃의 대륙(닫힌 마음의 마을) #11

2장-3: 장례식의 날

by 공인멘토

해는 마을의 지붕 위로 기울었고, 붉은빛이 잔잔히 마을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조차, 이 마을에 드리운 침묵의 장막을 거두기에는 부족했다.

린은 스케치북의 한 장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가온은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삼켰다.

그림은 광장의 전경을 담고 있었다. 중앙에는 작은 관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흰 국화 한 송이와 소년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 아이는 해맑게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이 장면과 어울리지 않게 이질적이었다. 그 미소는 어딘가, 너무 오래된 것 같았다.

관 주위엔 검은 옷을 입은 마을 사람들이 둘러서 있었다. 그러나 슬픔의 눈물도, 울음도 없었다. 그들의 얼굴엔 감정이 지워져 있었고, 오히려 어딘가 피곤하고 무기력한 표정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건… 너희 오빠의 장례식이야?”

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빛을 잃은 듯 고요했고, 말 대신 연필을 들어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림 속 배경은 동일한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엔 관 옆에 천막이 세워져 있었고, 사람들은 그 안으로 하나둘씩 줄을 서 들어가고 있었다.

천막 위에는 한 문장이 크게 적혀 있었다.

"슬픔은 침묵 속에 묻는다."

그리고 그 아래—붕대로 입을 감싼 사람들, 입술 위에 검은 줄을 그은 얼굴들, 아예 입이 없는 그림자 같은 인물들.

“이건… 무슨 의식이야?”

가온이 물었고, 린은 한동안 말없이 천막의 그림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날 이후, 장례는… 애도가 아니었어요. 그건… 약속이었어요.”

“약속?”

“다시는 그날을 말하지 않겠다는 맹세. 누구도, 그 기억을 꺼내지 않기로… 다짐하는 자리.”

그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천막 안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슬픔을 ‘지운’ 거예요. 눈물이 나도, 울면 안 됐고. 기억이 나도, 말하면 안 됐어요.”

가온은 다시 그림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그림자 밑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같은 형체. 그것은 말을 삼킨 듯한 검은 기운이었다.

린은 다시 그림을 넘겼다.

천막 내부. 사람들은 촛불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들 앞엔 검은 외투를 입은 존재가 서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림 속에서도 일부러 지운 듯, 얼굴 부분만 하얗게 비워져 있었다.

“그가… 그 존재야?”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그를 부르지 않았어요. 이름도 없고, 말도 없어요. 그저… ‘나타나는 자’예요.”

“처음엔, 아무도 그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마치 장례식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웠어요. 하지만… 오빠가 떠난 이후, 마을에서 말하는 사람이 줄기 시작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다들 충격에 빠졌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말을 아낀다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어요. 그리고 알게 됐어요. 누군가 말하려 하면… 그가 나타난다는 걸.”

가온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모든 퍼즐 조각이 하나로 맞춰지고 있었다.

“그 존재는… 누군가의 소리를 먹고 자라는 거야.”

린은 조용히 대답했다.

“맞아요. 그리고… 그걸 부른 건, 우리가 만들어낸 공기였어요.”

그녀는 다시 그날 이전의 마을을 그린 그림을 펼쳐 보였다. 사람들은 말없이 지나쳤고, 서로를 향한 눈빛엔 불신과 불만이 스며 있었다. 이웃을 경계하는 눈빛, 속삭이는 입, 외면하는 자세.

“오빠의 사고는 단순한 불행이 아니었어요. 그건… 이 마을이 너무 오래 서로를 외면하고, 감정을 쌓아둔 끝에… 뱉어낸 첫 결과였어요.”

가온은 그림 속 어른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서 그는 죄책감의 기운, 그리고 감정의 응어리가 응축된 영적인 찌꺼기를 느꼈다.

“우물이 그걸 품었어요. 그리고 그날, 오빠는 그 안에 빠진 거예요. 마치… 마을 전체가 그를 미는 것처럼.”

린의 말은 차분했지만, 그 안엔 피할 수 없는 진실이 녹아 있었다.

장례식은 그 모든 책임과 슬픔을 묻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 묻힌 감정은 땅 아래서 썩지 않고 자라났다.

그리고 지금도, 말하는 자를 삼키기 위해 마을을 맴돌고 있었다.

가온은 그 마지막 그림을 바라보며, 속으로 또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혹시… 이 탁기는 단지 마을의 불신만으로 자라난 게 아닐지도 몰라.’

그는 그림 속 관과 그 위의 사진을 떠올렸다.

‘린의 오빠. 그 아이의 억울함, 외면당한 고통, 구해지지 못한 원한. 그 감정이 이 마을의 불의와 결합해… 형체를 얻은 건 아닐까.’

가온은 등골을 따라 냉기가 흐르는 걸 느꼈다.

‘그 존재는 단순한 어둠이 아니라… 희생자의 감정 그 자체일지도 몰라. 우리가 마주해야 할 건… 마을의 죄와, 아이의 복수일 수도 있다.’

그 생각은 그를 더욱 침묵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동시에, 앞으로 마주하게 될 진실에 대한 각오도 단단히 만들고 있었다.

마을의 침묵은 끝나야 한다. 그러나 그 침묵을 깰 때, 마주해야 할 것 역시—이제 곧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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