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나무로 빚는 에세이
1층에 있었던 훌리오 교수님의 숙소 앞에는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통창이 있는 라운지가 있었다. 통창 밖으로는 직사광선을 막아주는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사이사이에는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들이 흙의 기운을 받아 늘 싱그럽게 피어 있었다. 라운지에는 적당한 거리에 의자들이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매번 찾아갈 때마다 교수님은 라운지에 있는 빨간색 의자에 등과 머리를 기대고 책을 읽고 있거나, 혹은 명상인지 잠인지 분간할 수 없는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고 계셨다. 교수님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아니면 의자가 마음에 들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둘의 조합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의자는 푹신한 좌판과 등받이가 있었다. 약간 뒤로 젖혀져 있는 등받이는 머리를 살짝 기댈 수 있을 정도로 높이도 딱 알맞았다. 의자 다리는 조금 낮아서, 앉으면 자연스럽게 무릎이 반쯤 펴진다. 너무 높지 않은 팔걸이도 매력적이었다. 이 의자에 팔을 걸치고 책을 들면 신기할 정도로 책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팔걸이에 팔을 올려놓으면 어깨가 강제적으로 너무 올라와서 불편한 의자들도 많은데, 이 의자는 책을 든 손의 높이를 계산이라도 한 듯하다. 이 의자가 하나만 더 있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라운지에는 이 의자가 하나밖에 없었다. 그 의자에는 늘 훌리오 교수님이 앉아 계셨기에, 간혹 의자가 비어 있더라도 마치 남의 것을 몰래 쓰고 있다는 생각에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전공이 영문학이라 그런지 학교 다닐 때 주로 읽은 책들은 시와 소설이다. 전공 서적이 소설책이라고 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소설이 그랬던 것처럼, 공부하자고 하면 아무리 재미있는 소설이라도 소설처럼 보이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대생들처럼 커다란 전자계산기가 필요하다든지, 고시 공부하는 사람처럼 한 손으로 들기 버거운 두툼한 책에 빼곡한 노트까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내가 학생이니 남들 하는 것처럼 공부해 보겠다고 소설책 한 권을 들고 도서관을 가보긴 했는데, 늘 갈 때마다 후끈 달아오르는 공부 열기에 압도당해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듯 나오곤 했다. 그 육중한 중앙도서관의 문을 떠밀고 나올 때마다 신 포도를 탓하는 여우처럼 나도 한마디 던지곤 했다.
“의자가 너무 딱딱해서 못 앉아 있겠네.”
좀 더 변명하자면 이렇다. 공부 좀 하자고 열람실에 들어섰을 때, 가지런한 책상과 그 위를 칸칸이 막은 합판을 볼 때마다 나는 닭장을 상상하였다. 네모반듯하게 구획이 나뉜 곳에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몸을 웅크리고, 두 손을 올린 채 머리를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우리가 공부하는 기계인가? 아니면 달걀 낳듯 지식을 생산하라고 세뇌당한 것일까.’ 이런 빈정대는 생각에다가 ‘이렇게 좁은 공간에 최대한 많은 사람을 수용하려는 의도는 18세기 산업혁명 시대에나 통하는 …’ 등의 삐딱한 태도가 더해졌다. 생각과 태도가 이러니 아무리 신성한 곳이라도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어느 날은 작정하고 제안서를 써서 도서관 의견함에 넣어 보기도 했다.
“도서관 열람실 환경 개선을 촉구합니다. 책상을 다양한 크기로 제작해 주시고, 사람들의 동선을 생각해서 널찍하게 배치해 주세요. 의자도 푹신한 걸로 바꿔 주시고, 편안히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팔걸이의자도 놔주시면 좋겠습니다. 조명도 눈이 부시지 않게 바꿔 주시고, 삭막하지 않게 중간중간 화분도 놔주시고 ……”
반영되리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아예 도서관과 담을 쌓은 건 아니었다. 도서관에는 서점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책, 외국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책,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값비싼 저널, 전공자라면 꼭 봐야 하는 논문들이 구석구석 숨어 있었다. 이 보물섬에서 희귀본이라도 찾게 되면 횡재라도 한 것처럼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목적이 달성되면 나는 지체 없이 도서관을 떠났다. 굳이 예외를 찾자면 여자 친구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도 나는 주로 엎어져 잤던 기억밖에 없다. 목적은 공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왜 도서관에 와서 자냐,”며 한심하다는 듯 말하는 그녀에게 “어제 공부하느라 밤새웠거든,”이라는 말로 둘러댔다.
그때 훌리오 교수님의 의자가 도서관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단언컨대 나는 아침 일찍 서둘러 도서관에 갔을 것이다. 그 의자가 나무와 하늘이 보이는 창가 옆에 있었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도서관에 있는 모든 의자가 그래야 한다는 생각은 아니다. 딱딱한 의자가 필요한 곳도 있고, 등받이가 없는 스툴이 필요한 곳도 있고, 여러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벤치가 필요한 곳도 있을 것이다. 다만 ‘다양한’ 의자를 적재적소에 배치한다면, 더 많은 사람이 더 오랫동안, 안락함을 느끼며 도서관에 머물 수 있지 않을까.
요즘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예전 같으면 음료수 하나 주문하고 몇 시간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진상이라고 했지만, 요즘은 오히려 더 오래 머물러 있으라고 각종 편의장치를 갖춘 카페들이 늘고 있다. 충전용 플러그가 달린 멋진 원목 테이블과 더불어 스툴, 벤치 등 다양한 목적으로 앉을 수 있는 의자도 갖춰져 있다. 바른 자세로 꼿꼿이 앉아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두 손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긴, 경계가 무너지고 영역 간 융합이 유행인 이 시대에, 카페와 도서관의 융합은 그리 낯설지 않다.
며칠 전 친구와 커피 한잔하자며 카페에 들어갔을 때, 나는 자리를 정하자마자 의자를 옆 테이블 의자와 바꾸었다. 친구 의자까지 바꿔 주려고 하자, 친구는 괜찮은데 왜 그러냐고 물었다. 무의식이 의식으로 변환되는 순간이 오면 늘 당황스럽다. 그러고 보니 나는 카페에 들어서면 습관적으로 의자를 먼저 보아왔다. ‘의자를 보면 이곳 분위기를 알 수 있어’, 라는 생각이 어느덧 내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곳 분위기가 ‘주문하고 빨리 나가주세요’인지, ‘오래 머물러 주세요’인지는 개인이 판단할 문제이지만, 사장님은 이 무언의 메시지를 의자에 숨겨 놓지 않았을까.
요즘 새롭게 개관한 도서관에 가보니, 여기가 도서관인지 카페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아늑하고 편안하게 해 놓았다. 아직도 많은 도서관에서는 열람실에 음료수를 반입하지 말라는 안내문이 적혀있긴 하지만, 카페가 도서관 안으로 들어오고, 커피 한잔을 마시며 편안한 의자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점차 늘고 있는 듯하다. 나 같은 사람에게 손짓하고 있는 걸까? 훌리오 교수님의 의자가 드문드문 있고, 고개를 들면 창밖으로 나무와 하늘이 보이고, 가끔 의자와 의자 사이를 책을 들고 천천히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지금 당장이라도 도서관으로 달려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