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나무로 빚는 에세이
도자기를 가마에서 꺼내는 순간은 적막감이 흐른다. 합격자 발표의 마지막 확인 버튼을 누를 때와는 종류가 다르다. 최소한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뛰며, 손가락이 떨리는 느낌은 아니다. 사실 처음 도자기를 시작할 때는 그런 느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멋진 도자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가마 속 도자기를 마주할 때마다 실망감을 넘어 상처받는 일이 잦아졌다. 700도의 가마 속에서 초벌구이로 나왔을 때만 해도 동그랗고 예뻤던 도자기는, 유약을 입고 1,250도의 마지막 불길에 들어가면 그 열기에 찌그러지고, 찢기고, 심지어는 깨지기도 한다. 모양뿐 아니라 색도 예상을 벗어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아예 처음부터 기대를 내려놓는 방어 전략을 취하게 되었다. 뭔가 큰 기대가 있어야 심장도 떨리는 법인데, 도자기를 꺼낼 때 특별한 기대를 하지 않으면 떨리는 일도 없다.
중고등학교 시절, 시험을 보면 나는 항상 안 좋은 상황을 상상하곤 했다. 성적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시험을 치르고 으레 받는, 시험 잘 봤냐는 질문에 “그저 그래…”, 늘 이런 식으로 대답했다. 나도 그렇고 부모님도 그렇고, 괜히 기대감에 부풀었다가, 터진 풍선처럼 너덜너덜해지기는 싫었다. 그런 전략은 꽤 요긴했다. 욕심보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당연한 듯 받아들이면 됐고, 간혹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오면 그 쾌감을 맛보는 것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이렇든 저렇든, 손해 볼 것은 없없다.
이런 성향도 유전이 되는지, 딸아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이런 식의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시험 잘 봤냐는 물음이 그렇게나 싫더니, 부모가 되니 입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다. 그런데 아이는 나보다 한층 더 진화했는지 “망했어”, 라는 대사를 읊었다. 심지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현관문을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벗어 던지고 그런 과격한 말을 했다. 때로는 눈물까지 동반했으니, 걱정스러운 마음에 아내와 나는 비싼 외식과 디저트까지 동원해서 아이의 마음을 달래주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성적표를 받아본 아이 엄마는 나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쟤가 망했다는 말이 두 개 정도 틀렸다는 건가 봐….”
발표대회에 나간 날도 그랬다. “잘했어?”라는 물음에 큰 실수를 했다, 해야 할 말을 잊었다, 창피했다 등 온갖 안 좋은 말을 해놓고 나중에 결국 상을 받아왔다. 들어가고 싶다던 동아리 면접을 보고 온 날에도 떨어진 게 분명하다고 바닥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더니, 며칠 있다가 합격 소식을 전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한번은 소위 “교육”이란 걸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든다고, 그런 부정적인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면 안 된다, 말한 대로 된다는 옛말이 있다, 진짜 망한다는 게 뭔 줄 알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냐, 등등 늘어놓았다.
“그래도 아빠, 내 친구들은 개망했다고 해. 난 그냥 망했다고 하는 건데…”
물론 미리 마음의 갑옷을 입으려고 하는 아이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말을 하고 싶거든 집에서만 하고 밖에서는 함부로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어두었다.
내가 도자기를 배우기 시작한 때가 아이에게 그런 훈계를 늘어놓을 무렵이었다. 자식에게는 그렇게 가르친다 해도 이론과 실제는 엄연히 다르고, 교과서와 현실 또한 같지 않다는 건, 부끄럽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도자기를 빚으며 나름대로 엄청난 시간과 정성을 들였다 싶으면, 찌그러지고 금이 간 결과물에 마음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무너져 내린다는 표현은 절대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가마에서 도자기를 꺼내기 전날에는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너진 마음으로 도자기 선생님께 어린아이 같은 실망감을 표출해봐야 돌아오는 건 미소뿐이었으니, 다시 과거의 나와 현실의 딸아이처럼, ‘마음의 갑옷’을 입어야 할 시기가 찾아온 것 같았다.
‘또 찌그러졌겠지,’
‘금이 갔을 거야.’
‘색이 이상하겠지.’
‘내가 만든 게 그렇지 뭐.’
그러다 정말 ‘망한’ 그릇이 나오면, 망치로 그릇을 멋들어지게 깨는 도예가를 흉내 낼 수 있는 게 어디냐며 마음을 달랬다. 혹은 ‘도자기는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자연이 만드는 것’이라는 거창한 캐치프레이즈로 마음을 가렸다. 사실이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실망과 허탈감을 극복하기에는 나는 아직 어린아이 같았다.
며칠 전, 물레로 빚어 놓은 그릇이 잘 건조되는지 살펴보다가 바닥 면에 금이 간 걸 발견했다. 옆이나 테두리에 금이 갔으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겠는데, 바닥에 금이 간 경우는 구제 불능이다. 마침 도자기 선생님이 계시길래 투덜거렸다.
“선생님, 이거 또 바닥에 금이 갔어요. 아, 참…. 이거 모양 되게 예쁘게 나왔는데….”
늘 그렇듯 선생님이 또 웃으신다. 그러고는 처음으로 한마디 던지셨다.
“아니, 도자기를 십 년이나 하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그냥 갖다 버려야지.”
“아, 네.”
보기 좋게 한 대 얻어맞았다. 짧게 대답하고, 나는 ‘예쁘지만 금이 간’ 그릇을 마대 자루에 던져버렸다. 퍽. 초벌구이도 하기 전이라 깨지는 소리가 그리 청명하지 않다. 예전보다야 던지는 손길이 가벼워졌다지만, 아직 선생님 정도의 수준까지 가려면 멀었나 보다.
사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릇을 깨버릴 수 있으려면 마음의 갑옷을 입는 수준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갑옷을 입는다는 건, 무언가 보호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기대이든, 욕심이든, 그걸 덜어내야 한다고 밤새워 연설하고 가르칠 수는 있지만, 이론과 실제는 여전히 다르다. 갈 길이 여전히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