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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림 Jun 18. 2024

나를 스친 사람들, 나를 스친 생각들

흙과 나무로 빚는 에세이

  약속 장소를 물어물어 가야 했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있으니 굳이 지나가는 사람을 잡고 물어보는 경우가 드문데, 만나기로 한 장소는 지도 앱에도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니 건물 구석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일하다 잠시 나왔나 보네’, 생각하며 다가갔다.     


“이 근처 자전거 길이 어디 있나요?”

“자전거 길요? 모르겠는데요?”

“아, 죄송합니다.”     


   일만 하는 사람인가 보다. 보통은 “감사합니다”하고 돌아섰을 텐데, 스트레스 풀고 있는데 방해했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들어 죄송하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하는 수 없이 대충 느낌대로 한참 걸음을 옮겼다. 뙤약볕이 참 뜨거운 날이다.     


   횡단보도가 나타나자 마침 신호를 기다리는 아주머니가 계셨다. 요즘 길 묻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일까? 아니면 내가 방해를 했던 것일까? 말을 걸자마자 화들짝 놀라시며 모자를 깊게 눌러쓴 얼굴을 내게 돌렸다.     


“저쪽 길 건너 큰길 따라 주욱 가다 보면 다리 밑에 조그만 개천이 있긴 한데, 지금은 공사 중이라 자전거 못 탈 텐데….”

“아, 네, 감사합니다.”

“근데, 거긴 왜 가요? 자전거도 없는 거 같은데…”

“네, 제가 여기 처음인데, 누가 거기서 만나자고 해서요.”

“저기 카페도 있고, 저쪽 반대편에 도서관도 있고, 좋은 데가 많은데, 먼지 풀풀 나는 데서 뭘 하려고요? 별 희한한 데서 만나네.”     


   이분은 다른 사람 일에 참 관심이 많으신 분인가 보다. 왜 이렇게 신호등은 빨리 바뀌지 않는지, 옆에 서 있는 내내 뭘 자꾸 물어봤다. 공격하다가 역공당하는 느낌이다.     


   하긴, 중고품 거래를 많이 해봤지만, 자전거 도로에서 만나자고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자전거 타고 운동하러 나오는 길이니, 그쪽으로 올 테면 오라는 식이었다. 자기는 차도 위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기가 어렵단다. 이분은 세상 참 편하게 사는 사람인가 보다.     


   남 일에 관심이 많으신 분 말씀대로 도로 밑은 흙을 다 파헤치고 온갖 장비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밤에 왔다면 영화에서 나올법한 암거래 촬영지로 딱 어울릴 법하다.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를 피해서 도로 밑으로 조심스럽게 내려와 보니, 공사를 하기 전에는 자전거 도로가 있은 듯했다. 며칠 동안 공사를 안 했는지 파헤쳐 놓은 흙이 메말라 바람에 흙먼지가 일었다. “희한한 데”라는 말이 떠올랐다.     


“여기 자전거 도로에 도착했는데요, 완전 공사판이네요. 자전거 타고 못 오실 거 같은데, 제가 개천 따라 더 내려가고 있겠습니다. 검은색 숄더백에 흰 모자 썼어요.”     


   문자를 보내고, 물길 따라 한참 내려갔다. 내려가다 보면 자전거 타고 올라오는 사람이 있겠거니 했다. 이건 또 무슨 색다른 체험이란 말인가. ‘혹시 이 사람인가? 혹시 저 사람인가?’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며 개천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혹시 유모차 끌고 가세요?”     


   한참을 가고 있는 상대방에서 문자가 왔다. 주변에 유모차가 있나 둘러보았다. 뒤돌아보니 50미터쯤 거리에 흰 모자를 쓴 여성이 유모차를 끌고 가고 있었다. 나는 분명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놓칠세라 뚫어지게 바라보며 갔건만, 어찌하여 이 사람은 나를 지나치고 공사장 쪽으로 갔을까. 빠른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여자가 옆으로 지나간다. 아마도 저분은 서로 모르는 두 남자가 자신을 두고 문자를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이 세 사람은, 아니 유모차에 있는 아기까지 네 사람은 각자의 삶을 자기 방향대로 살다가 어느 순간, 같은 장소에서 자신도 모르는 접점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 또한 의도치 않은 어떤 지점에서, 인지할 수 없는 누군가와 끊임없이 연결되고 단절되며 살아가고 있겠지.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 텐데 유모차에 있는 아기에게 눈인사를 건냈다.     


‘아가야, 늘 행복하게 지내렴.’     


   자전거 남자는 청바지에 민소매를 입고 있었다. 물건을 보라며 내민 그의 굵은 팔뚝에는 전통 문양의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용이나 호랑이 문신은 봤어도 저렇게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장신구 같은 모양의 문신은 처음 보았다. 문신이 멋있다며 한마디 던지니 그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며 금세 어색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약속한 금액을 내려고 숄더백을 뒤지던 나는 심장이 뛰며 얼굴이 노랗게 되었다. 지갑이 없다. 분명 집에서 나올 때 현금 10만 원을 지갑에 챙겨 나왔는데,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까 버스에서 내릴 때도 사용했던 지갑이다. 소매치기를 당했나? 순간 나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담배 피우던 사람, 신호를 기다리던 아주머니, 자전거를 타고 가던 사람들, 아기와 아기 엄마, 그리고 당황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문신남. 영화에서 보면 기가 막힌 손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많던데, 이런 것을 두고 영화가 현실이 되었다고 하는 걸까?     


“아, 그러시면 이체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지금 빨리 운동을 가야 해서…”     


   세상 참 편하게 사는 문신남은 공감 능력이 없다.     


“아, 그렇죠. 그 방법이 있었네요. 그럼, 계좌 좀 불러주세요.”     


   은행 앱을 열고 계좌이체를 준비했다. 어떻게 하든 상황을 빨리 종료하고, 지갑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희뿌연 연기처럼 내 머릿속을 채웠다.     


“네, 기업은행이고요, OOO-OOOO …”

“아, 이 계좌는 농협인데요?”

“어? 이상하다. 그럼, 신한은행 계좌를 불러 드릴께요. OOO-OOOO …”

“이건 우리은행이라고 나와요.”

“네? 이상하네. 분명히 신한인데. 아, 저…, 우리은행이 있긴 해요. 그럼, 우리은행 계좌로 해야겠네. OOO-OOOO …”

“이건 증권회사 계좌인데요?”     


   이번엔 문신남이 당황했다. 도대체 은행 계좌가 몇 개인지 모르겠으나, 부르는 계좌마다 은행 이름이 달랐다.     


“혹시 님은 무슨 은행 쓰시나요?”

“카카오뱅크요.”

“아, 저도 카카오뱅크 계좌가 있어요. 그럼, 그 계좌로 불러드릴게요. OOO-OOOO …”

“아, 이건 국민은행인데요?”

“진짜요? 어디요. 아, 제가 3자가 네 개 있는데, 세 개만 불러드렸네요. 죄송해요.”     


   우여곡절 끝에 상황은 마무리되었으나, 또 다른 목적을 가진, 똑같은 삶의 궤적은 다시 한번 반복되어야 했다. 이번엔 더 천천히, 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눈을 아래로 향했다. 버스 정류장, 건물 구석 흡연 장소, 횡단보도, 도로 아래 공사장, 개천을 따라 내려가는 길. 나를 스쳐 지나가는 또 다른 사람들, 또 다른 생각들.      


   그리고 가벼워진 숄더백. 계좌 속 10만 원은 문신남에게, 지갑 속 10만 원은 내가 모르는 그 누군가에게. 의도치 않은 어떤 지점에서, 인지할 수 없는 누군가와 끊임없이 연결되고 단절되며 살아가고 있는 내 삶의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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