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에세이: watch, see
테트리스는 어린 시절 오락실에서 가장 만만한 게임이었다. 중독성이 있는 데다가 레벨이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가진 동전이 다 떨어져야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하곤 했다. 한동안 테트리스처럼 바쁜 일이 계속되었다. 블록 하나를 맞추면 또 다른 블록이 기다리고 있다. 유일한 차이라면 이번엔 동전이 다 떨어졌는데도 일어나 갈 곳이 없는 느낌이라는 것. 그렇게 무작정 주저앉고 말았다.
늦잠을 자고, 텔레비전을 켜 놓은 채 소파에 몸을 붙여보고, 그러다가 출출하면 어슬렁거리며 냉장고 문을 열기도 하였다. 딱히 어딜 가고 싶지도 않고, 누구와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일어나지 않고, 그렇다고 이런 무기력을 즐기고 싶지도 않았다. 마치 성의 없게 만든 재미없는 영화를 멍하니 쳐다보는 상태라고 할까.
그렇게 하루하루를 무기력한 시간으로 채워가던 무렵,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베란다 문틈에 낀 까만 먼지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책장 구석에 놓인 먹다 남은 약봉지, 이미 쓸모없어져 버린 메모지, 나중에 버리겠다고 밀쳐 놓은 다 쓴 건전지, 컴퓨터 바탕화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쓸모없는 파일들, 아들이 쓸 책꽂이를 만들겠다고 벌여놓고 몇 달째 방치한 작업대와 그 위를 무심하게 굴러다니는 톱밥들. 그리고 무엇보다 흠칫 놀란 건, 무더위에 누렇게 타 버린 기운 없는 나의 반려 식물들이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순간은 부끄러움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런 것들이 내 옆에 있었다니.
영어에서 본다는 뜻의 단어는 꽤 많지만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는 watch이다. 고대에서는 watch가 ‘깨어있음’을 의미할 정도로, 이 말은 보는 것을 넘어 의식적으로 알아차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 이것은 생존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예를 들어 수렵채집을 하던 원시 시대에 운 좋게 멧돼지 한 마리를 잡았다고 쳐보자. 그날 식구들은 오랜만에 배 불리 먹고 남은 고기는 한쪽에 잘 보관해 둘 것이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고기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면? 아마도 밤새 도둑을 맞았을 것이다. 옆에 있는 것을 제대로 지켜보지 못하면 기약 없는 굶주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watch의 뜻을 가진 고대어는 ‘-ser’이다. 오늘날에는 ‘-serve’로 끝나는 단어들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정신 차리고 지켜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를 들면, reserve, observe, conserve, preserve 등과 같은 말이다. ‘예약하다’는 뜻의 reserve는 ‘다시’라는 뜻의 ‘re-’가 붙어서, 다른 사람들이 가져가지 못하게 다시 보고 또다시 본다는 뜻에서 만들어졌다. observe는 ‘앞’이라는 뜻의 ‘ob-’가 붙어 있다. 앞에서 지켜본다는 말이니 ‘관찰하다’라는 뜻이 되었다. conserve는 ‘모두 함께’라는 뜻의 ‘con-’이 붙었다. 모두 함께 지켜본다고 하여 ‘보호하다, 아껴쓰다’의 뜻이 되었다. preserve의 ‘pre-’도 앞이라는 뜻으로 ‘보호하다, 보존하다’의 의미로 쓰인다. 이 모든 단어를 멧돼지에 적용한다면, 멧돼지를 예약하고, 관찰하고, 아껴먹고, 보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watch는 생존에 대한 뿌리 깊은 본능을 오롯이 담고 있다. 우리는 늘 생존을 위해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지 않으면 있어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걸레를 빨아서 베란다 문틀부터 청소했다. 몇 년 치는 될법한 시커먼 먼지가 걸레에 묻어나왔다. 책상도 정리하고 쓰레기도 한 봉지 담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작업대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나무 조각을 잇고 붙이고 자르고 칠하여 꽤 쓸만한 책꽂이도 만들었다. 무더위가 계속되었지만,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리니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의 반려 식물들. 텁텁한 먼지가 쌓여있는 나뭇잎을 하나씩 닦아주고, 시들어 버린 잎과 가지를 가위로 쳐주고, 영양분과 물도 듬뿍 주었다. 내가 그들을 보았을 때 나도 살고 그들도 살아났다. 경이로운 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watch만큼이나 see도 흥미로운 단어이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할 때 “I see.”라고 한다. 그런데 안다는 말을 왜 see로 표현할까? watch와 달리 see는 그냥 눈을 뜬 상태를 말한다. 어린아이는 생존을 위한 절박한 마음으로 뭔가를 ‘지켜 보면서’(watch) 배우는 게 아니다. ‘그냥 보면서’(see) 무의식적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예전부터 세상 구경을 많이 한 사람은 지혜와 재치가 있다고 했는데, 지혜와 재치라는 두 단어, wisdom과 wit는 사실 see의 뜻을 담고 있다. 단어 앞에 있는 ‘ wi-’는 고대 영어에서 see의 의미인 ‘weid-’에서 유래한 것이다.
저녁을 먹고 아이와 산책하다가 무서운 게 뭔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걷다 보니 금방 어둑해져서 나온 주제였다.
“만약에 말이야, 이렇게 깜깜해지고 여기가 어딘지 모르면 어떨 거 같아?”
“무서울 거 같은데….”
“그치? 그런데 왜 무서울까?”
“집을 못 찾을까 봐?”
“아니, 그게 아니고 내 말은, 무서운 생각이 왜 드냐는 거야. 깜깜해서? 아니면 길을 몰라서?”
“음…. 둘 다일 것 같긴 한데…. 근데 깜깜하면 길이 안 보이니까 결국은 길을 몰라서 무서운 거지.”
“그렇네. 사실 대낮에도 모르는 곳에 있으면 무서우니까 말이지.”
“밤이라도, 길을 알면 안 무섭지. 모르니까 무섭지.”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나 보다. 자기 주제 파악부터 먼저하고 다른 걸 알아라, 이 말이지.”
“그럼, 아빠는 아빠가 누군지 알아?”
“나? 모르지. 내가 그걸 알면 여기 있겠냐?”
“하하하…. 누구긴? 아빠가 아빠지. 난 아빠 딸이고.”
이런 대화라니. 어쩌다 삼천포로 빠지긴 했으나, 그날 산책의 결론은 모르면 무섭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지식을 많이 쌓으려면 많이 봐야 한다. 많이 보면 무서움이 사라진다. 그럴듯한 결론이다.
하지만 ‘그냥 보기’(see)가 지식과 연관 있다는 점은 지식이 조작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지식을 조작하고 싶으면, 보는 걸 조작하면 된다는 말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분야에서 시각적 도구를 통해 인식이 조작되고 있는가.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나도 얼마 전, 인터넷을 하다가 사진 속 멋진 모델이 입은 옷을 사고야 말았으니까. 낭패를 보았다. 시각적 조작에 말려든 것이다. 각종 블로그와 영상에서 소개하는 맛집에 가서 돈 낭비를 한 경험도, 생각해 보니 한두 번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인터넷 포털에서 “죽기 전에 나타나는 몇 가지 징조”라는 제목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역시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했다. 클릭. 그랬더니 “걸을 때 숨이 찬다, 앉았다 일어나기가 어렵다” 등등 기가 막히게 창의적인(?)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제목에 현혹되어 클릭했다가 허탈한 마음으로 뒤로가기를 눌렀을까? 그럼에도 일부는 그 기사 아래에 있는 운동 기구와 영양제 광고를 클릭했을 것이고, 그중 또 일부는 제품을 결국 구매까지 했을 것이다. ‘그냥 보기’(see)를 통한 무의식의 조작은 나의 돈을 ‘지켜보지’(watch) 못하게 만드는 어이없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람들은 꾸준히 진실을 주장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진실을 왜곡한다. 이 시대는 진실의 왜곡 없이는 굴러가지 않는 세상인 걸까?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무엇을 지켜봐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