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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림 Jul 06. 2024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지켜봐야 하는 것일까?

watch, see

   테트리스는 어린 시절 오락실에서 가장 만만한 게임이었다중독성이 있는 데다가 레벨이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가진 동전이 다 떨어져야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하곤 했다한동안 테트리스처럼 바쁜 일이 계속되었다블록 하나를 맞추면 또 다른 블록이 기다리고 있다유일한 차이라면 이번엔 동전이 다 떨어졌는데도 일어나 갈 곳이 없는 느낌이라는 것그렇게 무작정 주저앉고 말았다.     


   늦잠을 자고텔레비전을 켜 놓은 채 소파에 몸을 붙여보고그러다가 출출하면 어슬렁거리며 냉장고 문을 열기도 하였다딱히 어딜 가고 싶지도 않고누구와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일어나지 않고그렇다고 이런 무기력을 즐기고 싶지도 않았다마치 성의 없게 만든 재미없는 영화를 멍하니 쳐다보는 상태라고 할까.     


   그렇게 하루하루를 무기력한 시간으로 채워가던 무렵신기한 일이 벌어졌다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베란다 문틈에 낀 까만 먼지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책장 구석에 놓인 먹다 남은 약봉지이미 쓸모없어져 버린 메모지나중에 버리겠다고 밀쳐 놓은 다 쓴 건전지컴퓨터 바탕화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쓸모없는 파일들아들이 쓸 책꽂이를 만들겠다고 벌여놓고 몇 달째 방치한 작업대와 그 위를 무심하게 굴러다니는 톱밥들그리고 무엇보다 흠칫 놀란 건무더위에 누렇게 타 버린 기운 없는 나의 반려 식물들이었다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순간은 부끄러움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이런 것들이 내 옆에 있었다니.     


   영어에서 본다는 뜻의 단어는 꽤 많지만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는 watch이다고대에서는 watch가 깨어있음을 의미할 정도로이 말은 보는 것을 넘어 의식적으로 알아차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사실이것은 생존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예를 들어 수렵채집을 하던 원시 시대에 운 좋게 멧돼지 한 마리를 잡았다고 쳐보자그날 식구들은 오랜만에 배 불리 먹고 남은 고기는 한쪽에 잘 보관해 둘 것이다그런데 다음 날 아침고기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면아마도 밤새 도둑을 맞았을 것이다옆에 있는 것을 제대로 지켜보지 못하면 기약 없는 굶주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watch의 뜻을 가진 고대어는 ‘-ser’이다오늘날에는 ‘-serve’로 끝나는 단어들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이들은 대부분 정신 차리고 지켜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예를 들면, reserve, observe, conserve, preserve 등과 같은 말이다. ‘예약하다는 뜻의 reserve는 다시라는 뜻의 ‘re-’가 붙어서다른 사람들이 가져가지 못하게 다시 보고 또다시 본다는 뜻에서 만들어졌다. observe는 이라는 뜻의 ‘ob-’가 붙어 있다앞에서 지켜본다는 말이니 관찰하다라는 뜻이 되었다. conserve는 모두 함께라는 뜻의 ‘con-’이 붙었다모두 함께 지켜본다고 하여 보호하다아껴쓰다의 뜻이 되었다. preserve의 ‘pre-’도 앞이라는 뜻으로 보호하다보존하다의 의미로 쓰인다이 모든 단어를 멧돼지에 적용한다면멧돼지를 예약하고관찰하고아껴먹고보존한다고 할 수 있다그러므로 watch는 생존에 대한 뿌리 깊은 본능을 오롯이 담고 있다우리는 늘 생존을 위해 깨어있어야 한다깨어있지 않으면 있어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걸레를 빨아서 베란다 문틀부터 청소했다몇 년 치는 될법한 시커먼 먼지가 걸레에 묻어나왔다책상도 정리하고 쓰레기도 한 봉지 담았다그리고 본격적으로 작업대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나무 조각을 잇고 붙이고 자르고 칠하여 꽤 쓸만한 책꽂이도 만들었다무더위가 계속되었지만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리니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그리고 나의 반려 식물들텁텁한 먼지가 쌓여있는 나뭇잎을 하나씩 닦아주고시들어 버린 잎과 가지를 가위로 쳐주고영양분과 물도 듬뿍 주었다내가 그들을 보았을 때 나도 살고 그들도 살아났다경이로운 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watch만큼이나 see도 흥미로운 단어이다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할 때 “I see.”라고 한다그런데 안다는 말을 왜 see로 표현할까? watch와 달리 see는 그냥 눈을 뜬 상태를 말한다어린아이는 생존을 위한 절박한 마음으로 뭔가를 지켜 보면서’(watch) 배우는 게 아니다. ‘그냥 보면서’(see) 무의식적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게 된다예전부터 세상 구경을 많이 한 사람은 지혜와 재치가 있다고 했는데지혜와 재치라는 두 단어, wisdom과 wit는 사실 see의 뜻을 담고 있다단어 앞에 있는 ‘ wi-’는 고대 영어에서 see의 의미인 ‘weid-’에서 유래한 것이다.     


   저녁을 먹고 아이와 산책하다가 무서운 게 뭔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여름이라 해가 길어 괜찮을 줄 알았는데걷다 보니 금방 어둑해져서 나온 주제였다.     


만약에 말이야이렇게 깜깜해지고 여기가 어딘지 모르면 어떨 거 같아?”

무서울 거 같은데….”     


그치그런데 왜 무서울까?”

집을 못 찾을까 봐?”     


아니그게 아니고 내 말은무서운 생각이 왜 드냐는 거야깜깜해서아니면 길을 몰라서?”

음…둘 다일 것 같긴 한데…근데 깜깜하면 길이 안 보이니까 결국은 길을 몰라서 무서운 거지.”     


그렇네사실 대낮에도 모르는 곳에 있으면 무서우니까 말이지.”

밤이라도길을 알면 안 무섭지모르니까 무섭지.”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나 보다자기 주제 파악부터 먼저하고 다른 걸 알아라이 말이지.”

그럼아빠는 아빠가 누군지 알아?”     


모르지내가 그걸 알면 여기 있겠냐?”

하하하…누구긴아빠가 아빠지난 아빠 딸이고.”     


   이런 대화라니어쩌다 삼천포로 빠지긴 했으나그날 산책의 결론은 모르면 무섭다는 것이었다그러니 지식을 많이 쌓으려면 많이 봐야 한다많이 보면 무서움이 사라진다그럴듯한 결론이다.     


   하지만 그냥 보기’(see)가 지식과 연관 있다는 점은 지식이 조작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지식을 조작하고 싶으면보는 걸 조작하면 된다는 말이다오늘날 얼마나 많은 분야에서 시각적 도구를 통해 인식이 조작되고 있는가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나도 얼마 전인터넷을 하다가 사진 속 멋진 모델이 입은 옷을 사고야 말았으니까낭패를 보았다시각적 조작에 말려든 것이다각종 블로그와 영상에서 소개하는 맛집에 가서 돈 낭비를 한 경험도생각해 보니 한두 번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인터넷 포털에서 죽기 전에 나타나는 몇 가지 징조라는 제목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역시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했다클릭그랬더니 걸을 때 숨이 찬다앉았다 일어나기가 어렵다” 등등 기가 막히게 창의적인(?)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제목에 현혹되어 클릭했다가 허탈한 마음으로 뒤로가기를 눌렀을까그럼에도 일부는 그 기사 아래에 있는 운동 기구와 영양제 광고를 클릭했을 것이고그중 또 일부는 제품을 결국 구매까지 했을 것이다. ‘그냥 보기’(see)를 통한 무의식의 조작은 나의 돈을 지켜보지’(watch) 못하게 만드는 어이없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사람들은 꾸준히 진실을 주장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진실을 왜곡한다이 시대는 진실의 왜곡 없이는 굴러가지 않는 세상인 걸까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그리고 무엇을 지켜봐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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