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림 Sep 22. 2024

갈림길에서 고민한다는 것

워드에세이: select, neglect

   나는 아이 방에 웬만하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아이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마음이 커서가 아니다. 들어가는 순간, 귀찮은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먹고서 방치된 과자 봉지, 주스가 말라붙은 컵들, 책장 구석에서 먼지를 품고 있는 양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종잇조각들. 매번 들어갈 때마다 볼 수 있는 예상치 못한 물건들의 조합과 구성은 과히 예술적이다. 쉬운 해석에 익숙한 나는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가 늘 낯설고 두려운 것이다. 아이가 어릴 때는 직접 불러서 같이 청소했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아이는 아빠가 자기 방에 들어가는 것은 곧 대청소를 의미한다는 관념이 자리 잡은 듯했다. 각자 다른 이유로 내가 그 방에 들어가는 건 꺼림직한 일이었다.     


   며칠 전 이런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키 크는 일에 관심이 많은 중학생 아들은 툭하면 줄자를 가져갔는데, 마침 필요한 줄자가 없어졌으니 필히 아이 방 어느 곳에 방치되어 있음이 틀림없었다. 오랜만에 들어가는 것이니 새로운 작품이 있으리라. 마음을 비우고 방문을 열었다. 책상 밑 어둠 속에 뭔가 넘칠 듯 말 듯 채워져 있는 커다란 상자가 보인다. 삶은 언제나 예상을 넘어선다. 저게 뭘까?     


   그날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슬며시 말을 꺼냈다.     


“요즘 동네에 인형뽑기방이 여기저기 생겼더라? 그게 장사가 될까?”

“아빠, 내가 인형 진짜 잘 뽑아. 다섯 번 뽑으면 세 번은 성공한다니까.”     


   아들은 눈을 반짝이며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난, 아무리 해도 안 되는데 넌 그걸 어떻게 하냐?”

“그게 다 공식이 있어, 공식이.”     


“공식? 그런 게 있어?”

“어, 내가 책 보면서 연구 좀 했지.”


“그런 책도 있니?”     


   아이는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대었다. 쓸데없이 그런 데 돈을 낭비하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얘기를 듣다 보니 내가 말려들었다.     


   “그게, 그러니까 인형 위에다가 가상의 선을 이런 식으로 긋고, 집게 위치를 선 위에 잘 올려놔야 해. 인형 종류마다 공식이 달라. 하하하. 내가 잘하니까 친구들이 자기 것도 뽑아 달라고 부탁한다니까. 그래서 두 개 뽑으면 내가 하나 갖기로 하고 뽑아 줬어.”     


   “너도 계획이 다 있구나.”     


   야단을 쳐야 하는 순간, 영화 대사 비슷한 말이 튀어나왔다. 되짚어 생각해 보니 내 초등학교 하굣길도 뽑기의 유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문구점 한쪽 벽에 붙어 있는 종이 뽑기 판은 오늘도 꽝을 뽑았다는 핑계로 화풀이를 해댈 수 있는 일종의 동네북이었다. 캡슐 뽑기 기계는 예나 지금이나 용돈을 가장 많이 빨아들이는 뽑기일 것이다. 기계에 동전을 넣고 돌리면 때구루루 나오는 달걀 모양의 캡슐이 첫 번째 즐거움이고, 캡슐을 열었을 때 나오는 온갖 잡동사니가 두 번째 즐거움이다.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유행했던 포켓몬 카드는 말 그대로 주머니(포켓)에서 돈을 빼내 가는 괴물(몬스터) 같은 뽑기였다. 아이들뿐만일까. 주말마다 로또 가게 앞에는 당첨의 기대를 품은 어른들이 줄을 서 있으니, 뽑기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변치 않는 즐거움인 건 분명하다.     


   매번 꽝이 되도 뽑기에 손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설령 꽝 대신 뭔가가 걸렸더라도 그게 그리 쓸모 있지도 않다. 그 인형을 먹을 수도 없고, 장식으로 놓자니 마음에 썩 들지도 않는다. 정성을 다해 뽑긴 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상자 속에 먼지와 함께 차곡차곡 쌓여만 간다. 그러니 뽑기의 매력이란 뽑는 순간의 짜릿한 전율, 혹은 뽑기 전 휘몰아치는 행복한 상상이라고 해야겠다.     


   뽑는다는 뜻의 영어 단어 select는 “떨어져 나온다”라는 뜻의 접두사 “se-”와, “골라 모은다”라는 뜻의 고대어 “-leg”가 합쳐진 말이다. 어원을 살려 좀 더 풀어보면, 여럿이 뭉쳐 있는 덩어리에서 하나를 골라 밖으로 데리고 나온다는 뜻이다. 이런 어원을 가진 비슷한 단어가 elect이다. 선거를 통해 선출한다는 뜻의 이 말은 “-leg” 앞에 “바깥”이라는 뜻의 접두사 “ex-”가 붙었다. 역시나 골라서 바깥으로 내보낸다는 말이다. 국회의원 선거로 치면 우리 동네 많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을 뽑아 국회로 내보낸다는 말이겠다. 우리가 수집의 의미로 많이 쓰는 콜렉션(collection)은 “모두, 함께”라는 뜻의 접두사 “com”이 “-leg”에 붙은 것이니, 좋아하는 것을 뽑아서 모아 놓은 것을 뜻한다.     


   “-leg”가 들어가는 많은 말 중에 유독 눈길을 끄는 단어는 바로 neglect이다. 방치하거나 게을리한다는 뜻이다. 단어의 앞부분인 “neg-”는 고대어로 not을 의미한다. 여기에 고른다는 의미인 “-leg”가 붙었으니 이 말은 뽑지 않는다는 뜻이다. “뽑지 않는” 상태는 곧 방치하고 게을리하는 상태, 다시 말해 아무 관심도 없고 무기력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해 보면 뽑는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흥미와 관심이 많고, 긴장감이 돌며, 뭔가 해보고 싶은 생동감 넘치는 상태일 것이다. 아이나 어른이나 뽑기에 그렇게 열광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그런 열망 때문이 아닐까.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어떤 사람은 많은 가능성 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고를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타인에 의해 선택된 길 앞에 놓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길도 갈지 말지는 본인 선택에 달렸다. 선택지가 많든 적든 우리가 늘 고민하는 이유이다. 그 고민이 괴로움이 될지 즐거움이 될지도 사실은 우리가 선택하는 일일 것이다. neglect라는 단어는 그래서 더 매력이 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한다는 건 최소한 내가 무기력한 상태는 아니라는 증거이니까 말이다.  


밤의 프로방스 시골길, 빈센트 반 고흐 (출처: Google Arts and Cultur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