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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림 Jan 26. 2024

슬픈 만족

워드에세이: sad, satisfy

   며칠 전 안전 관련 교육을 받으러 갔다. 좋아서 하는 거라면 돈을 주고서라도 신이 나서 가겠지만, 요즘은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교육이 왜 이리 많은지, 세상이 편리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해야만 하는 일은 더 많아졌다. 그래서 그런지 아침부터 모인 사람들의 표정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주최 측에서도 그걸 아는지 큼지막한 봉지에 빵과 크래커, 초콜릿, 사탕 등을 골고루 넣어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안에 뭐가 있는지 이리저리 뒤져보기도 하고, 받자마자 반가운 듯 이내 빵을 베어 물고 공짜로 주는 것은 뭐든 맛있다며 농담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각선 쪽에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 속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사람을 불러다 놓고 소보로빵이 뭐야. 샌드위치 정도는 줘야지.”


   그러더니 이런 걸 누가 먹냐, 이런 걸 사서 넣은 사람은 도대체 생각이 있냐, 성의가 없다, 등등 계속 불평을 했다. 그 옆에 있던 사람들도 맞아, 맞아, 하면서 거들었다. 나만 그랬을까? 주변을 보니 빵을 입에 물고 있는 사람들은 목구멍으로 빵을 넘기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곳 직원들은 그 전날 간식 봉지에 무엇을 넣을지 고민하고, 손수 빵과 과자를 사서 종류별로 수십 개의 봉지에 담느라 많은 수고를 했을 텐데, 혹여나 그 불평을 그 직원이 들으면 어쩌나 하고, 내가 다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일을 생각해 보니 어느 날 영어 성경 속에서 enough라는 단어가 크게 다가왔던 적이 떠오른다. ‘필요한 만큼 충분한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성경에서 이른바 오병이어(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알려진 이야기에 등장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큰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를 보려고 모여들었는데, 때가 저녁이라 예수는 사람들에게 저녁을 먹여야겠다고 생각을 하였나 보다. 제자에게 방법을 물어보니 마을에 가서 사 먹으라고 하면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에 예수는 그렇게 하지 말고, 지금 가지고 있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 있으면 된다면서 오천여 명의 무리에게 이 음식을 나누어 주었는데, 사람들이 이를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차도록 남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내용은 네 개의 복음서에 각각 비슷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유독 요한복음에는 조금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바로, 이 떡과 물고기가 그 무리에 있던 어린아이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내가 본 영어 성경에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내용이 이렇게 쓰여있다.


“they had all had enough to eat.”

(그들 모두가 충분히 먹었다.)


   나는 여기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enough라는 단어가 내 상상력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 군중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저녁때가 되자 예수는 무리에게 여기는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각자 싸 온 음식이 있으면 나눠 먹자고 하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속으로 불평하기 시작했겠지. ‘내 것을 꺼내서 나눠 먹자고? 그럼 난 뭘 먹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데 이때 한 아이가 과감히 자기 것을 꺼내 놓는다. “여기 우리 엄마가 싸준 떡과 생선이 있어요.” , 내가 만약 그곳에서 도시락을 꺼내 보이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봤다면 너무나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을 것 같다. 순간, 어릴 때 어머니께 들은 말이 떠올랐다. “난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니 너 많이 먹어라.”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민 떡과 생선을 보고 감동을 한 사람들도 모두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나는 안 먹어도 충분하니 저 아이에게 이걸 주세요, 하고 사람들은 기꺼이 자기 것을 꺼내 놓지 않았을까? 충분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구나, 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이쯤 되면 만족이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처럼 주관적인 말도 없는 듯하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 다른데, 이 모든 걸 똑같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니 신기한 단어이기도 하다. 도대체 만족스럽다는 말은 뭘까? 충분하다? 적당하다? 이런 말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뜻의 영어 단어들을 살펴보면 공통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충분하다는 뜻인 sufficient‘sub-’‘facere’가 합쳐진 말인데, ‘sub-’는 기준선 아래에 있다는 뜻이고, ‘facere’는 만든다는 뜻의 고대어이다. 그러므로 뭔가를 기준선 바로 아래까지 오도록 만든다는 뜻이다. 물을 붓는다고 치면 기준선까지 채운다는 말이겠다.


   양이 충분하다는 뜻의 plenty도 채운다는 뜻의 고대어에서 유래되었는데, fill(채우다), full(가득 찬), plus(더하기)도 채운다는 뜻의 같은 어원에서 출발하였다.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기준선까지 무언가를 채운다는 속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만족한다는 말을 하려면 전제 조건이 꼭 필요하다. 바로 필요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가 미리 정해져 있어야 한다.


   그러면 만족시킨다는 뜻의 satisfy는 어떻게 만들어진 말일까? 이 단어에서 앞부분인 ‘sa-’만족이란 뜻이고, 뒤쪽의 ‘-tisfy’는 위에서 말한 만든다는 뜻의 고대어가 변형된 것이다. 말 그대로 만족하도록 만든다는 뜻이다. ‘sa-’가 들어가는 단어는 생각보다 꽤 많다. 예를 들어 포화시키다는 뜻의 saturate, 질리게 한다는 뜻의 satiate, 욕구를 채운다는 뜻의 sate 등이 그렇다. 단어의 뜻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수준만큼 뭔가를 충분히 채운다는 속뜻이 들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슬프다고 할 때 쓰는 sad에도 ‘sa-’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만족할 말큼 채웠으면 마냥 좋을 것 같은데 왜 슬플까? 원하는 걸 이뤘는데 슬프다니, 슬픔은 도대체 왜 생기고, 어디에서 오는 것이길래 ….


   생각해 보면 사람의 욕구란 이렇다. 애인이 없을 때는 데이트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 부럽다가, 정작 애인이 생기니 청첩장을 내미는 친구가 부럽고 질투까지 난다. 결혼만 하면 지하 단칸방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았는데, 정작 결혼하면 난 언제 저런 아파트에서 살아보나, 하고 욕구에 또 불이 붙는다. 아이를 낳고 밤잠 못 자고 기를 땐 저 녀석이 똥오줌이라도 가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해 놓고, 시간이 지나 아이가 뒤를 가릴 뿐 아니라 걷고 뛸 수 있게 되면 옆집 애는 뭐를 잘한다더라, 하면서 또 속앓이를 한다.


   우리의 어리석음이란 이런 것이리라. 원하는 걸 채우면 기쁨은 잠시뿐, 다른 무언가를 또 원한다. 그러니 채우면 채울수록 슬픔도 계속된다. sad는 만족의 수준을 끊임없이 올려대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sad가 말하는 듯하다.


다 채웠니? 그러면 이제 내가 슬프게 해줄게!”


   소설가 박완서는 생전에 넉넉하다라는 말을 참으로 좋아한다고 했다. 한국전쟁 중에 하루 끼니를 걱정하면서 살아야 할 때, 작가의 어머니는 집에 손님이 오면 우리 집은 먹을 것이 넉넉하다고 하시며 끼니를 때워 보내시고, 해 질 녘에 손님이 오면 우리 집은 방이 넉넉하다며 자고 가라고 붙드셨다고 한다. 그는 「넉넉하다는 말의 소중함」에서 이렇게 썼다.


가장 궁핍했던 시절을 넉넉한 마음 하나로 가장 부자스럽게 살게 해주신, 그래서 그 시절만 회상하면 저절로 환한 미소가 떠오르게 해주신 어머니가 새삼스럽게 자랑스럽다.”


   이 글을 떠올리니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진다. 궁핍한 살림에도 우리 집은 먹을 것이 넉넉하다며 손님에게 대접한 그 한 끼가, 그 수 많은 군중 속에서 자기 먹을 것을 내놓은 그 어린아이의 떡과 생선은 아니었을까? 나도 이제 넉넉하다는 말을 좋아하기로 했다. enough는 물론이다. 그리고 sad의 경고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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