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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림 Jan 17. 2024

욕심을 잘라 버리기

decide, rational

   아이들의 가을옷이 필요하다며 아내는 쇼핑몰을 가자고 했다늦은 오후 아내와 나는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차를 타고 30분 정도 걸리는 쇼핑몰에 도착하였다예전 같으면 1층부터 꼭대기 층까지 붙어 다녔겠지만 언젠가부터 아내는 내가 졸졸 따라다니며 잔소리하는 게 귀찮은지 각자 필요한 걸 구경하다가 다시 만나자고 한다아내가 아이들 옷을 고르는 동안 나는 내가 입을 옷을 고르고 아내에게 전화하였다한참 후 아내는 왔고 우리는 아이들 저녁이 늦을까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부모가 되면 집안에서나 집 밖에서나 늘 아이들이 걸리기 마련인가 보다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까 그 노래가 다시 흘러나왔다.

    

시간은 어디로 가는 걸까나는 이걸 끝내고 싶지 않은데.”

(Where does the time go? I don’t want this to end.)     

시간은 어디로 가는 걸까우리가 있는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Where does the time go? Let’s hang on to the moment we’re in.)


   화음이 아름다운 남성 듀엣곡아름다운 단풍이 든 한적한 공원에서 두 남자가 벤치에 앉아 <시간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라며 우리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뮤직비디오가 참으로 인상적인 곡이다마음에 드는 음악과 함께라면 길 위가 콘서트홀이다그렇게 두 부모는 멀리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사냥한 포획물을 만족스럽고 자랑스럽게 집으로 가져와서는 아이들에게 펼쳐 놓았다그러나 우리 삶에는 항상 돌발변수가 있다.


엄마 사이즈가 작은데?”


   딸은 말했고아내는 심장이 쿵 내려앉은 듯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또 가지 뭐.”


   일부러 데이트를 더 하고 싶어서 밑밥을 깔아놓은 것도 아닌데 인생은 이렇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저녁을 차려 먹고 나니 더는 서두를 이유도 없어졌다. “시간은 어디로 가는 걸까우리가 있는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 또 노래를 들었다우리를 위한 노래인 것 같다며… 다시 간 김에 고장 난 전기 포트가 생각나서 전기 포트도 사서 오는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언제 우리에게 이런 여유로움이 있던 적이 있었을까집에 다시 도착하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아내는 교환한 옷을 담은 쇼핑백이 어디 있냐며 물었다내가 들고 있었던 기억은 나는데 물건은 없었다시간은 저녁 9시 50쇼핑몰은 10시에 문을 닫는다순간 머리가 하얘지고 우리들의 머릿속 시간 순서는 뒤죽박죽이 되었다내 옷을 산 매장에 아이 옷을 두고 왔을 거라며 남성복 매장에 전화를 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교환한 아이 옷이 거기 있을 리가 없었다아내는 돌아다니다가 어딘가 두고 왔을 거라며지금 가도 문을 닫았을 테니 포기하자고 하였다하지만 실망하는 딸의 얼굴이 떠올랐고지금 가봐야 소용없을 거라는 아내의 말을 뒤로하고 급하게 혼자 차에 올랐다쇼핑몰이 닫히더라도 무슨 방법이 있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충동적인 결정을 했다부웅 ~. 나는 과연 그 순간 합리적인 결정(rational decision)을 한 걸까?


   rational(합리적인이성적인)이라는 말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먼저 고대어 ‘re-’를 생각해 볼까?. ‘re-’는 생각하거나 계산한다는 뜻이다read(읽다), reason(이유), riddle(수수께끼등 생각과 관련된 말이 모두 여기에서 나왔다계산한다는 뜻이 담긴 ratio(비율)도 여기에 어원을 두고 있다르네상스 시대와 고전주의 시대에는 이른바 황금비(golden ratio)에 대해 열광했는데이는 아마도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풍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ratio에 n을 더 붙인 ration은 흥미롭게도 전쟁 때 군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배급 식량이나 배급량을 뜻한다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ration이 이런 뜻을 나타내게 되었는지 상상해 볼 수는 있다전쟁 시에는 식량이 턱없이 부족할 테고 그 많은 군인들이 불만 없이 음식을 먹으려면 일정한 비율(ratio)로 배급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만약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 있었다면 사람들은 욕심을 부리고 같은 편끼리 싸움이 났을지도 모른다사실 넓게 보면 국가의 한정된 자원을 국민에게 어떻게 정의롭게 분배하느냐와 같은 문제이다하지만 국가 전체로 확대할 때 나타나는 다양한 변수를 모두 생각하면 꽤 복잡한 문제이다그러니 ration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이 단어에 ‘-al’을 붙이면 합리적인이라는 뜻이 된다합리적인 것이 무엇인지 여기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한정된 음식을 욕심을 부리지 않고 일정 비율로 나누어 먹으면 갈등이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갈등이 없는 합리적인 상태가 되려면 우선 모두가 욕심을 잘라내야 한다개인의 심리적 수양도 중요하겠지만 시스템도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재미있게도 decide(결정하다)에도 자른다는 뜻이 담겨있다‘de-’는 중심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뜻이고‘cide-’는 고대어에서 자르다의 뜻이다. ‘cide’가 들어간 말을 보면 끔찍한 단어가 많다예를 들면 suicide(자살), genocide(대량학살등이 있다반면 세균(germ)을 죽이는 germicide(살균제), 해충(pest)를 죽이는 pesticide(살충제)도 있다. ‘cide-’가 조금 변형되어 생긴 단어가 가위(scissors)이다그러니 decide를 어원대로 해석해 보면 잘라내어 떼어 버린다라는 뜻이다어떤 것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많은 가능성들을 잘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모두 자르고 남은 핵심을 선택하는 것그것을 우리는 decide라고 부른다.


   삶 전체가 선택의 연속이다아침에 언제 일어날지부터 잠을 언제 잘 것인지까지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은 선택해야 할 것으로 넘쳐난다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는 오늘날 정보의 홍수 시대에서만 유독 크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그 옛날 모든 역사와 이야기에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의 일화가 있고셰익스피어는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인간햄릿을 만들었다이제는 결정을 못 하는 사람을 햄릿 증후군(Hamlet Syndrome)에 걸렸다고까지 말할 정도가 되었다둘 중에 어느 하나가 더 좋으면 고민할 이유가 없다두 선택을 놓고 고민하는 이유는 가능성이 반반이거나 둘 모두를 가지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햄릿은 늘 선택을 놓고 고민했지만그런 숙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비극으로 몰아넣었다욕심을 잘라버리지 못한 탓은 아닐까?


   무엇이 합리적인 결정인가에 대해 깨닫게 해준 작은 경험이 하나 있다어느 해연말 저녁이었다뭔가 활기찬 연말의 모습을 보고 싶었기에 늘 가던 길을 벗어나 처음 가보는 길을 무작정 가보았다연말이니 뭔가 색다른 거리의 풍경을 보고 싶었다그런데 그곳에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전봇대 위에 설치된 먼지 낀 가로등이 드문드문 있었고그날따라 안개 같은 무언가가 뿌옇게 끼어 시야를 방해했다사람들은 편의점 앞 간이 의자에 앉아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간혹 술에 취한 아저씨가 비틀거리며 지나갔다가게들은 이미 문이 닫혔고고양이 몇 마리가 주인인 양 가게 앞을 지키고 있었다시간은 갑자기 물안개 이동하듯 느려졌고 사이 사이 좁은 골목길은 가는 시간을 붙들고 있는 듯했다더 갔다가는 괜히 알지도 못하는 길을 들어섰나 하는 후회가 들것 같았다. ‘재미는 무슨 재미….’ 나는 기대감을 내려놓고 원래 가려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탁탁 탁탁그때저 앞에서 빠른 박자의 발소리가 들렸다까만색 코트를 입은 50대 중반의 아주머니가 느려진 시간 속에서 마치 가속도가 붙은 듯 발걸음을 빨리 옮기고 있었다오른손에는 묵직한 장바구니를왼손에는 작은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었다나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멍하니 케이크를 쳐다보았다저건 누구를 위한 것일까아이들남편노부모혹은 그저 아는 사람나는 그분이 케이크를 앞에 놓고촛불을 켜고후 바람을 불고웃음을 짓는 모습을 멍하니 서서 한참 동안 상상하고 있었다내 머릿속의 촛불이 그 적막한 골목길을 이미 환하게 밝히고 있는 것 같았다아주머니가 안 보일 때까지 서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조금 전모르는 길을 가보겠다고 한 결정은 정말 어리석었을까골목길은 색다른 재미를 찾았던 나를 위해 존재하지도 않았고케이크를 든 아주머니가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갑자기 나타났을 리도 없었다나는 이미 결정했고그 후 재미를 찾겠다는 욕심을 버렸을 뿐이었다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결정이 합리적이었다고 생각했다나는 욕심을 잘라 버렸고그 아주머니를 보며 상상의 행복함을 느꼈다그리고 내 마음속에는 어떤 갈등도 일어나지 않았다.


   밤 10시에 문을 닫는 쇼핑몰에차로 30분이 걸리는 거리를잃어버린 물건을 찾겠다고 9시 50분에 출발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리석은 결정이다하지만 그 순간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작정 쇼핑몰로 가보는 것이었다그리고 쇼핑몰은 물건을 잃어버린 나를 위하여 절대 존재하지 않으니 물건을 반드시 찾겠다는 욕심은 일찌감치 잘라 버렸다쇼핑몰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20그런데 깜깜할 거로 생각했던 정문이 훤히 밝혀져 있었다.


문 안 닫았어요?”


오늘은 토요일이라 11시까지 해요.”


   쪼그라 들었던 마음이 펴지면서 여유가 생겼다여유가 생기니 생각도 다시 정리된다천천히 주차를 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까 주차장으로 내려오면서 가구점에 들렀던 일이 생각났다그곳의자 위 테이블다시 가구점에 들렀다카운터에 고이 모셔져 있는 딸의 옷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집으로 옮겼다.


시간은 어디로 가는 걸까나는 이걸 끝내고 싶지 않은데.”

(Where does the time go? I don’t want this to end.)


   노래 덕분일까그날 나는 1시간이라는 선물을 받았다너무 많은 고민은 경험할 시간을 빼앗아 버린다는 깨달음은 덤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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