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에세이: chronic, sickle, reap
어린 시절 겨울 방학이 되면 느지막이 일어나 늘 스케이트장으로 향했다. 초겨울이 되면 드넓은 논에 물을 대어 얼리고, 한쪽 옆으로 거대한 천막을 줄지어 쳐놓으면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천막 안에서는 어묵탕에서 피어오르는 희뿌연 감칠맛과 스케이트를 신고 벗는 사람들의 땀 냄새, 그리고 스케이트 날이 부딪치는 쇳소리가 묘하게 어우러졌다.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곳이지만 그곳은 내 인생 최초로 시간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을 느꼈던 곳이기도 했다.
“야, 너희 아버지 뭐 하는 사람이냐? 군인이나 경찰은 아니지?”
“당연히 아니겠지. 저렇게 느려 터진 거 봐라.”
“야, 꼬마야, 빨리빨리 짐 싸서 나가! 문 닫아야 한단 말이야.”
스케이트장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듯한 아저씨들이 스케이트를 정리하는 나를 둘러싸고 소리를 질러댔다. 스케이트에 붙어 있는 얼음 조각을 털어내고, 날이 녹슬지 않도록 마른 수건으로 여러 번 닦고, 신발 끈이 엉키지 않도록 가지런히 묶고, 수건도 정리하고 ……. 후딱 보따리 싸서 나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를 들먹거리면서 “빨리빨리”를 외치는 그 목소리를 상상하면 지금도 놀람과 분함, 긴장과 압박감이 뒤죽박죽되어 올라온다.
아버지와 얽힌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어린 시절 너무나 캠핑을 하고 싶던 나는 한여름 밤 집 앞마당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잤다. 아버지가 딱하게 여기셨는지 어느 날 아버지 고향에 캠핑을 하러 가자고 하셨다. 뜨거운 햇빛을 피해 아버지와 나는 해 질 무렵 맑은 물이 흐르는 강가 앞에 텐트를 쳤다. 풀벌레 소리와 강물 소리가 바람결이 들려오고 강 건너 절벽에는 지는 해를 등지고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 캠핑은 성공적으로 끝나지 못했다. 잠을 자려고 텐트 안에 누웠을 때 후드득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강물이 불어날 것 같으니 안타깝지만 짐을 싸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기대는 무너지고, 그날 밤은 근처에 있는 할머니 댁에 가서 잠을 잤다. 다음 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어머니께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저 녀석은 어딜 가든 살아남겠어. 얼마나 재빨리 짐을 싸는지 말이야.”
나는 느린 사람이기도 하고 빠른 사람이기도 한 걸까? 사실 이 두 얘기는 얼마 전 한 학생과 이야기를 하다가 생각이 났다. 그 학생은 자신의 매력이 느린 것이라고 했다. 내가 흥미를 갖자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아이는 어릴 적부터 느리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혼이 많이 났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아이 옆에는 늘 이런 말을 해주시는 어머니가 있었다고 한다.
“너는 느린 게 매력이야. 느리면 실수도 적고 마음도 편하잖니?”
다른 사람들은 답답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자기는 마음이 “쫄리는” 법도 없고 늘 느긋하기 때문에 느린 게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열일곱 살의 나이에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아이의 매력에 푹 빠졌고, 내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얽힌 이야기가 생각났던 것이다.
아버지와 시간? 조금 다른 얘기지만 그리스 신화에도 아버지와 시간이 나온다. 그리스 신화에서 시간을 상징하는 신은 크로노스(Cronus)이다. 크로노스, 즉 시간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대부분 신화가 그렇듯, 그리스 신화도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설명한다. 처음에는 카오스라 불리는 공간의 신이 있었고, 거기에서 대지의 신인 가이아가 생겼으며, 가이아는 하늘의 신인 우라노스를 낳는다. 공간에서 땅이 생기고, 땅이 생기자 하늘이 생겼다는 말이다. 그리고 땅과 하늘에서 태어난 신이 바로 크로노스, 곧 시간이다.
그런데 이 크로노스가 세상을 지배하는 우두머리가 된 이야기가 흥미롭다. 그의 아버지 우라노스는 가이아와의 사이에 세 종류의 자식을 두고 있었다. 바로 손이 백여 개가 달린 헤카톤케이레스 삼 형제, 눈이 하나 있는 키클롭스 삼 형제, 그리고 열두 명의 티탄족 신들이다. 우라노스는 손이 백 개 달린 자식과 눈이 하나 있는 자식들을 꼴 보기 싫다며 빛이 없는 지옥에 가두어 버린다. 자식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아버지로 그려냄으로써, 그리스 신화는 우라노스를 폭력과 폭압, 폭정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이를 막는 상징으로 티탄족의 막내 아들 크로노스를 전면에 내세운다. 어머니 가이아는 남아있는 열 두 명의 티탄족 자식들을 불러 모아 저런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복수를 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에 막내 크로노스가 손을 든다. 가이아는 이 아들에게 낫을 만들어 주었고, 아들은 매복하고 있다가 우라노스를 낫으로 거세해 버리고 만다. 시간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시간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것이 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권력자라 하더라도, 가차 없이 사멸시킨다.
크로노스라는 이름은 영어 단어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바로 접두사 ‘chron-’이 들어간 단어들로, 모두 시간과 관련이 되어 있다. chronic(만성적인)은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됨을 뜻하고, chronicle(연대기), chronology(연대표)는 모두 시간의 순서대로 일어난 사건의 연속성을 나타낸다. ‘동시에, 함께’를 뜻하는 ‘syn-’이 ‘chron-’과 만나면 synchronize(동시에 발생하다)가 된다. 수중발레를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synchronized swimming)이라고 하는데 경기를 본 사람은 왜 이 경기에 이 단어가 쓰이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인류의 시간을 다섯 개의 시대로 분류한다. 순서대로 나열하면 황금의 시대, 은의 시대, 청동의 시대, 영웅의 시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철의 시대가 이어진다. 크로노스는 인류의 첫 시대인 황금의 시대를 연 신으로 여겨진다. 이 시대는 폭력과 폭압 대신, 평화와 조화로움이 가득했고, 사람들은 일하지 않아도 자연이 준 먹거리를 풍요롭게 즐길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크로노스는 낫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대지의 신인 어머니가 만들어 준 그 낫은 폭력과 폭압을 몰아내고 풍요와 평화를 이루어낸 상징물이다. 이렇게 보니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학생의 어머니 말이 다시 생각난다. “너는 느린 게 매력이야. 느리면 실수도 적고 마음도 편하잖니?” 이렇게 어머니는 아이에게 긴장 대신 마음의 평안을 주었다. 그러니 크로노스의 낫도 날카롭지만 교묘하게도 부드럽다.
낫은 영어로 sickle 또는 scythe라고 한다. 이 단어는 ‘자르다’라는 뜻의 고대어 ‘sek-’에서 유래되었다. 오늘날에 sector(부분, 분야), segment(부분, 조각) 등에서 볼 수 있다. skin(피부, 껍질)도 이 말에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피부 혹은 껍질과 자른다는 말이 무슨 관계일까?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칼로 사과 껍질을 까는 걸 상상하면 피부와 자른다의 관계가 금방 이해가 간다.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시절에 skin은 삶에 꽤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동물의 가죽이 고대인들에게 얼마나 유용했을 것이며, 먹을 만한 대부분이 껍질에 싸여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새삼 잘라서 벗긴다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우리의 피부를 가리키는 말에 잘라 벗긴다는 뜻이 들어있다니…. 갑작스레 오싹하고 소름이 끼친다.
그런 섬뜩함과 낫을 상상하니 그림책에서 한 번쯤 봤을 이미지가 떠오른다. 검은색 후드와 망토를 쓰고, 한 손에는 커다란 낫을 들고 있는 해골의 모습. 이것을 서양에서는 그림 리퍼(Grim Reaper)라고 부르는데, grim은 단호하고 엄숙하다는 뜻이고, reaper는 수확하는 사람이란 뜻이므로 이는 단호하고 엄숙하게 사람을 수확해가는 죽음의 신이다. 이 해골도 크로노스와 같이 낫을 들고 있으니 죽음이란 곧, 시간이 수확해가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죽음을 그렇게 묘사하다니, 여기에는 또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까? 열매가 먹을 만큼 잘 익었다고 할 때 ripe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 말과 수확한다는 뜻의 reap은 어원이 같다. 시간은 생명을 무르익게(ripe) 만들고, 자연은 무르익은 생명을 수확한다(reap). 우리 인간도 다른 생명체를 수확하여 생명을 유지해 왔고, 대자연도 우리를 그렇게 수확하여 다른 생명을 먹여 살린다는 뜻이리라. 그러니 그림 리퍼(Grim Reaper)가 들고 있는 낫은 생명을 앗아가는 무시무시한 낫이라기보다는, 생명을 순환시키고 그래서 더욱 풍요롭게 하는 대자연의 어머니가 준 선물이 아닐까?
그리스 신화가 위대한 이유는 그런 크로노스도, 자신이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았던 것처럼, 아들 제우스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다는 점이다. 크로노스는 자식들이 자기의 왕위를 노릴까 봐 늘 걱정했기에, 아내 레아가 낳은 자식들을 모두 삼켜버린다. 이에 두려워진 레아는 여섯째 자식을 숨기고 대신 강보에 돌을 싸서 내밀었다. 다른 이유로 두려웠던 크로노스는 강보에 무엇이 싸였는지 확인도 안 하고 삼켜버렸는데, 그 돌이 바로 옴팔로스라고 불리는 돌이다. 이렇게 어머니의 지혜로 살아남은 자식이 바로 제우스였다. 제우스가 성장하자 대지의 신 가이아가 다시 나타난다.
“너의 아버지가 네 형제들을 모두 삼켰으니,
네가 아버지를 물리치고 형제들을 구해야 하지 않겠니?”
가이아의 계획대로 제우스는 다섯 형제를 모두 구한 후 삼촌인 키클롭스 형제에게 번개를 선물 받고는 형제들과 함께 힘을 모아 크로노스를 지하에 가두어 버리고 만다. 이것은 시간을 다스리는 신인 크로노스 자신조차도 시간을 영원히 가질 수 없다는 뜻이 아닐까? 대자연의 신 가이아는 시간의 신조차도 이처럼 수확해(reap) 버렸으니, 이 세상의 그 누가 시간을 거스를 수 있을까?
스케이트장의 그 아저씨들은 왜 아버지의 직업을 들먹거리며 나를 재촉했을까? 그들은 무의식중에 아버지란 재촉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게 사실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포함해 아버지로 살아가고 있는 나도 꽤 억울할 것 같긴 하다. 사실 시간을 재촉해 봤자 시간이 더 이상 빠르게 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설령 시간이 빨라진다고 하더라도 좋을 게 무엇이란 말인가?
스케이트장의 사건 이후로 지금까지, 줄기차게 흐른 시간 속에서 나는 수많은 ‘빨리빨리’를 만나왔다. 제한된 시간 내에 문제를 빨리 풀어야 유능한 인재로 인정받는 그런 교육제도와 사회에서 나를 비롯한 그 누구도 속도의 경쟁을 피해 가지 못했다. 속도가 빠른 사람에게는 기하급수적으로 돈이 쌓이고, 속도가 느린 사람에게는 기하급수적으로 창고가 바닥난다. 이른바 자본주의 시대의 양극화는 이렇게 빠름을 강요하는 사회의 필연적 산물이 아닐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이 우주의 모든 것은 빛보다 빠를 수 없고,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은 오히려 더욱 느려진다. 번개를 가지고 있는 제우스의 장난일까?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빨리빨리 해 봤자 시간은 오히려 더욱 느려질 뿐이라니, 우리가 하는 속도 경쟁을 가이아가 보고 있다면 다람쥐 쳇바퀴에서 빨리 뛰자고 난리를 부리는 바보들로 보일 것이다. 빠른 사람이나 느린 사람이나 어차피 시간은 공평하게 날카롭고 공평하게 부드럽다. 그 친구의 말이 다시금 떠오른다.
“저는 느린 게 매력이라 마음이 쫄리는 법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