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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림 Mar 26. 2024

아들의 선물과 아버지의 선물

educate, teach, learn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아들은 제법 학교에 잘 적응했다아이 걸음으로 삼십 분은 족히 걸리는 학교를 등교할 때도 첫날만 엄마가 따라갔고둘째 날부터는 혼자 가겠다고 길을 나섰다그렇게 조금씩 삶의 범위를 넓혀갈 무렵아이는 내 생일 저녁에 비닐 포장지로 감싼 무언가를 내밀었다.


아빠선물이야.”


   포장지 여기저기 이음새마다 꼼꼼하게도 테이프를 붙였다조심스럽게 테이프를 떼고 포장지를 벗긴 순간전혀 예상하지 못한 물건이 드러났다.


어머돌돌이네?”


   옆에 있던 아내는 나보다 먼저 아들을 향해 기쁜 표정을 지었다돌돌이우리 집에서는 테이프크리너를 그렇게 부른다아내 얼굴을 쳐다보던 나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와세상에 고마워라이걸로 우리 집을 예쁘게 청소할 수 있겠는걸?”


   그렇게돌돌이는 내 생에 처음으로 아들에게 받은 생일 선물이 되었다아들은 내 생일 하루 전학교와는 정반대 쪽으로 삼십 분을 걸어서 마트에 다녀왔다고 했다며칠 동안 아빠가 뭘 좋아할지 고민했을 것이고마트에서도 이런저런 물건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터이다그런데 하필이면 왜 돌돌이였을까?


   아들이 사준 돌돌이는 일 년 내내 요긴하게 썼다리필용 테이프도 같이 사줬기에 떨어질 때마다 갈아 끼워서 옷과 이불바닥과 책상 위를 청소했다간단하게 머리카락과 먼지를 치우기에는 그만한 것이 없었다하지만 돌돌이를 계속 쓰는 동안에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그런데 왜 돌돌이지?


   의문은 어느 날 산책 하면서 풀렸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딸이 어릴 때 했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지금은 무슨 일 때문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아내와 신경전을 벌이고 난 후 안방에 들어왔더니네 살 난 딸이 조용히 나에게 와서 이런 말을 했다. “아빠엄마가 화났나 봐아빠가 엄마한테 과자를 못 먹게 해서 그래?” 그 순간웃음이 나와서 쪼잔한 마음이 마법처럼 녹아버렸다그때 딸의 말을 다시금 생각해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좋아하는 것을 못 하게 할 때 화가 난다고 생각하는구나그럼반대로 뭔가를 계속하면그걸 좋아한다고 생각하겠구나.’


   주말에 아내가 아침을 준비할 때면 나는 늘 집안 청소를 했다청소기를 돌리고걸레질도 하고책장 위에 소복하니 앉은 먼지도 닦아 냈다아이들 방을 청소할 때는 아이들을 불렀다방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져 있는 책이며 물건을 제자리에 올려놓고쓰레기통도 비우고걸레질도 시켰다아이들의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자기들이 싫어하는 걸 아빠는 계속하고 있으니아마도 아빠는 청소를 좋아하나 보다라고 생각했나 보다그러고 보니아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빠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면좋은 청소기 사줄게.”


   사실이 이야기는 나에게 가볍게 웃고 지나갈 수만은 없는 숙제를 던져주었다생각의 출발점은 아이가 어릴수록 좋아하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었다청소를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대부분은 해야 하니까 한다는 것그리고 세상에는 해야 하는 일이 더 많다는 걸 아이에게 본격적으로 가르쳐야 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청소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돌이켜보면 나는 집에서 특별히 청소는 해야 하는 것이라는 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어머니 옆에 붙어 있다가 어머니가 하는 일을 우두커니 지켜보는 게 삶의 재미였던 나이에어머니가 청소하면 장난치듯 옆에서 깔깔거리며 걸레질을 했고아버지가 정원에 꽃 심는 걸 멍하니 구경하다가 심심하면 여기 와서 흙이나 쓸어 담아라.”라고 말씀하시면 얼른 가서 빗자루질을 했다아버지는 가끔 지저분한 내 책상을 보시면서 저렇게 책상이 더러운데 공부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는데그렇다고 혼을 내지도 않으셨다청소하라고 잔소리를 한 적도 없으셨고, ‘세상에는 해야 하는 일이 더 많다라는 설교도 하지 않으셨다그렇다면 나는 어릴 때 청소 교육이란 걸 받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그런 교육 없이도 오늘날 아들에게 청소용품을 선물 받을 정도가 됐는데굳이 아이에게 그런 걸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런 사소한 생각이 머리를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교육이라는 영어 단어, educate는 밖이라는 뜻의 접두사 ‘e’와 이끈다는 뜻의 고대어 ‘duek’가 합쳐진 말이다. ‘duek’는 ‘duct’, ‘duce’ 등으로 변형되어 오늘날 conduct(행동하다), introduce(소개하다), produce(생산하다등에서 볼 수 있다. educate는 그러므로 밖으로 끌어내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무엇을 끌어낼까흔히 우리가 말하는 내면의 잠재력이겠다잠재력은 영어로 potential이라고 하는데강력하다는 뜻의 고대어 ‘poti-’에서 나왔다. power(), possible(가능한)과도 어원이 같다그러니 잠재력이란 마음속에서 강하게 일어나는 힘이다그것은 다시 말해 좋아하는 것이다좋아하는 것을 실현하게 해주는 것그것이 educate의 속뜻이다. ‘해야 하는 것을 가르친다는 뜻은 없다.


   그러면가르치고(teach) 배운다(learn)는 말은 어떨까? teach는 고대어 ‘deik-’에서 나왔다이 고대어는 보여준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어떤 것을 보여주는 징표를 토큰(token)이라고 하는데, teach와 token의 어원이 서로 같다우리는 보통 무엇을 가르친다고 할 때, ‘해야 하는’ 규칙과 의무를 생각하기 쉬우나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는 다름 아닌 보여주기이다. learn은 고대어 ‘lois-’에서 나왔다이 고대어의 의미는 이고, learn은 길을 따라간다라는 뜻이다그러므로 가르치고 배운다는 말은 길을 보여주고 그 길을 따라간다라는 말이 되겠다그러니 이 말에도 역시 해야 하는 것을 하게 한다는 의미는 없다.


   고민은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내가 아들에게 그런 선물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훌륭한 educate와 teach 덕분이 아니었을까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아버지는 나에게 손수 만드신 입학선물을 주셨다두툼한 한 묶음의 그림 일기장이었다아버지는 A4 크기의 종이 위에 자를 대고 한 줄한 줄줄을 그어 일기장을 만드셨다맨 위에는 날짜를 쓸 수 있도록 연월일을 쓰고오늘의 날씨를 쓰는 칸도 예쁘게 만들어 놓으셨다요즘 같으면 컴퓨터로 한 장 만들어서 수십 장 복사하면 그만이지만그때는 컴퓨터도복사기도 없던 시절이었다그때는 몰랐지만이제는 안다퇴근 전아들에게 일기장을 만들어 주려고 한 장한 장 종이 위에 줄을 긋고 글씨를 쓰고 계셨을 아버지의 마음을이미 오래전 돌아가셨지만아버지의 마음이 지금도 늘 나와 함께하는 이유이다그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저렇게 해야 한다.’라는 백 마디 말보다 더 강력한 교육이었다.


   언젠가 쇼펜하우어의 에세이 <Counsels and Maxims>를 읽다가 따끔한 충고를 받은 적이 있다쇼펜하우어는 시간이란 이 세상의 그 어떤 고리대금업자보다 더 지독한 존재라고 했다시간을 독촉해서 일을 빨리 이루려고 하면 시간은 지독한 이자를 청구한다는 것이다일찍 열매를 얻고자 나무에 과도한 비료를 주어 빨리 꽃을 피우고빨리 열매를 맺게 하면그 나무는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진하고 금방 시들어 버릴 것이라고 했다시간이 하는 일을 재촉하지 말라는 경고였지만아이를 기르고 있는 나에게는 충격적인 말이었다최소한 아이를 재촉하지 말 것그러니 기다리고 또 기다릴 것이것이 쇼펜하우어에게 배운 교육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한 가지 덧붙이자면그저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하고 응원하는 것그래서 먼 훗날아이가 내 나이가 되었을 때, “그때 우리 엄마가우리 아빠가 나와 함께 이런 것을 했지.” 하며 미소를 지을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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