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에세이: educate, teach, learn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 아들은 제법 학교에 잘 적응했다. 아이 걸음으로 삼십 분은 족히 걸리는 학교를 등교할 때도 첫날만 엄마가 따라갔고, 둘째 날부터는 혼자 가겠다고 길을 나섰다. 그렇게 조금씩 삶의 범위를 넓혀갈 무렵, 아이는 내 생일 저녁에 비닐 포장지로 감싼 무언가를 내밀었다.
“아빠, 선물이야.”
포장지 여기저기 이음새마다 꼼꼼하게도 테이프를 붙였다.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떼고 포장지를 벗긴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물건이 드러났다.
“어머, 돌돌이네?”
옆에 있던 아내는 나보다 먼저 아들을 향해 기쁜 표정을 지었다. 돌돌이! 우리 집에서는 테이프크리너를 그렇게 부른다. 아내 얼굴을 쳐다보던 나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와, 세상에 고마워라. 이걸로 우리 집을 예쁘게 청소할 수 있겠는걸?”
그렇게, 돌돌이는 내 생에 처음으로 아들에게 받은 생일 선물이 되었다. 아들은 내 생일 하루 전, 학교와는 정반대 쪽으로 삼십 분을 걸어서 마트에 다녀왔다고 했다. 며칠 동안 아빠가 뭘 좋아할지 고민했을 것이고, 마트에서도 이런저런 물건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터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돌돌이였을까?
아들이 사준 돌돌이는 일 년 내내 요긴하게 썼다. 리필용 테이프도 같이 사줬기에 떨어질 때마다 갈아 끼워서 옷과 이불, 바닥과 책상 위를 청소했다. 간단하게 머리카락과 먼지를 치우기에는 그만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돌돌이를 계속 쓰는 동안에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 돌돌이지?
의문은 어느 날 산책 하면서 풀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딸이 어릴 때 했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지금은 무슨 일 때문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내와 신경전을 벌이고 난 후 안방에 들어왔더니, 네 살 난 딸이 조용히 나에게 와서 이런 말을 했다. “아빠, 엄마가 화났나 봐. 아빠가 엄마한테 과자를 못 먹게 해서 그래?” 그 순간, 웃음이 나와서 쪼잔한 마음이 마법처럼 녹아버렸다. 그때 딸의 말을 다시금 생각해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좋아하는 것을 못 하게 할 때 화가 난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럼, 반대로 뭔가를 계속하면? 아, 그걸 좋아한다고 생각하겠구나.’
주말에 아내가 아침을 준비할 때면 나는 늘 집안 청소를 했다.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도 하고, 책장 위에 소복하니 앉은 먼지도 닦아 냈다. 아이들 방을 청소할 때는 아이들을 불렀다. 방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져 있는 책이며 물건을 제자리에 올려놓고, 쓰레기통도 비우고, 걸레질도 시켰다. 아이들의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자기들이 싫어하는 걸 아빠는 계속하고 있으니, 아마도 ‘아빠는 청소를 좋아하나 보다’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빠, 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좋은 청소기 사줄게.”
사실, 이 이야기는 나에게 가볍게 웃고 지나갈 수만은 없는 숙제를 던져주었다. 생각의 출발점은 아이가 어릴수록 ‘좋아하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었다. 청소를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해야 하니까 한다는 것, 그리고 세상에는 해야 하는 일이 더 많다는 걸 아이에게 본격적으로 가르쳐야 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청소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집에서 특별히 청소는 ‘해야 하는 것’이라는 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 옆에 붙어 있다가 어머니가 하는 일을 우두커니 지켜보는 게 삶의 재미였던 나이에, 어머니가 청소하면 장난치듯 옆에서 깔깔거리며 걸레질을 했고, 아버지가 정원에 꽃 심는 걸 멍하니 구경하다가 “심심하면 여기 와서 흙이나 쓸어 담아라.”라고 말씀하시면 얼른 가서 빗자루질을 했다. 아버지는 가끔 지저분한 내 책상을 보시면서 “저렇게 책상이 더러운데 공부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는데, 그렇다고 혼을 내지도 않으셨다. 청소하라고 잔소리를 한 적도 없으셨고, ‘세상에는 해야 하는 일이 더 많다’라는 설교도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나는 어릴 때 청소 교육이란 걸 받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그런 교육 없이도 오늘날 아들에게 청소용품을 선물 받을 정도가 됐는데, 굳이 아이에게 그런 걸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런 사소한 생각이 머리를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교육이라는 영어 단어, educate는 밖이라는 뜻의 접두사 ‘e’와 이끈다는 뜻의 고대어 ‘duek’가 합쳐진 말이다. ‘duek’는 ‘duct’, ‘duce’ 등으로 변형되어 오늘날 conduct(행동하다), introduce(소개하다), produce(생산하다) 등에서 볼 수 있다. educate는 그러므로 ‘밖으로 끌어내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무엇을 끌어낼까? 흔히 우리가 말하는 내면의 잠재력이겠다. 잠재력은 영어로 potential이라고 하는데, 강력하다는 뜻의 고대어 ‘poti-’에서 나왔다. power(힘), possible(가능한)과도 어원이 같다. 그러니 잠재력이란 마음속에서 강하게 일어나는 힘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좋아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실현하게 해주는 것, 그것이 educate의 속뜻이다. ‘해야 하는 것’을 가르친다는 뜻은 없다.
그러면, 가르치고(teach) 배운다(learn)는 말은 어떨까? teach는 고대어 ‘deik-’에서 나왔다. 이 고대어는 ‘보여준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어떤 것을 보여주는 징표를 토큰(token)이라고 하는데, teach와 token의 어원이 서로 같다. 우리는 보통 무엇을 가르친다고 할 때, ‘해야 하는’ 규칙과 의무를 생각하기 쉬우나,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는 다름 아닌 보여주기이다. learn은 고대어 ‘lois-’에서 나왔다. 이 고대어의 의미는 ‘길’이고, learn은 ‘길을 따라간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가르치고 배운다는 말은 ‘길을 보여주고 그 길을 따라간다’라는 말이 되겠다. 그러니 이 말에도 역시 ‘해야 하는 것’을 하게 한다는 의미는 없다.
고민은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내가 아들에게 그런 선물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훌륭한 educate와 teach 덕분이 아니었을까?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버지는 나에게 손수 만드신 입학선물을 주셨다. 두툼한 한 묶음의 그림 일기장이었다. 아버지는 A4 크기의 종이 위에 자를 대고 한 줄, 한 줄, 줄을 그어 일기장을 만드셨다. 맨 위에는 날짜를 쓸 수 있도록 연월일을 쓰고, 오늘의 날씨를 쓰는 칸도 예쁘게 만들어 놓으셨다. 요즘 같으면 컴퓨터로 한 장 만들어서 수십 장 복사하면 그만이지만, 그때는 컴퓨터도, 복사기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퇴근 전, 아들에게 일기장을 만들어 주려고 한 장, 한 장 종이 위에 줄을 긋고 글씨를 쓰고 계셨을 아버지의 마음을. 이미 오래전 돌아가셨지만, 아버지의 마음이 지금도 늘 나와 함께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라는 백 마디 말보다 더 강력한 교육이었다.
언젠가 쇼펜하우어의 에세이 <Counsels and Maxims>를 읽다가 따끔한 충고를 받은 적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시간이란 이 세상의 그 어떤 고리대금업자보다 더 지독한 존재라고 했다. 시간을 독촉해서 일을 빨리 이루려고 하면 시간은 지독한 이자를 청구한다는 것이다. 일찍 열매를 얻고자 나무에 과도한 비료를 주어 빨리 꽃을 피우고, 빨리 열매를 맺게 하면, 그 나무는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진하고 금방 시들어 버릴 것이라고 했다. 시간이 하는 일을 재촉하지 말라는 경고였지만, 아이를 기르고 있는 나에게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최소한 아이를 재촉하지 말 것, 그러니 기다리고 또 기다릴 것. 이것이 쇼펜하우어에게 배운 교육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저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하고 응원하는 것. 그래서 먼 훗날, 아이가 내 나이가 되었을 때, “그때 우리 엄마가, 우리 아빠가 나와 함께 이런 것을 했지.” 하며 미소를 지을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