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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림 Jan 19. 2024

사기꾼의 물고기,
마음속을 헤엄치다

swindler, illusion

   어느 날 혼자 집에 있는데 계세요?”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얼른 마당에 있는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뛰쳐나가 대문을 빼꼼히 열어보니 어떤 아주머니가 상냥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혹시 엄마가 집에 계시냐며 물어본다.


안 계시는데요.”

그러니어디 잠깐 나가셨나 보구나?

그럼엄마가 오실 때까지 잠깐 들어가서 기다려도 될까?”


   순간 엄마 친구분 정도 되는 줄 알고 나는 문을 열어 드렸다아주머니는 마당에 있는 평상에 앉으셨다따뜻한 봄이었다우리 집 앞마당에는 아버지가 취미 삼아 가꾸시는 이름 모를 꽃들이 많이 피어있었고그날따라 날이 따뜻해서 평상에 앉아 있기에는 꽤 좋았던 것 같다아주머니는 정원이 참 예쁘다며 이런저런 말을 친절하게 건네셨다.


   사실 그 분이 우리 집에 오시기 몇 주 전에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그때는 내가 너무나도 좋아했던 선생님이 손님이셨다마침 어머니가 선생님이 오신다고 뭘 사러 가셨는데 그때 선생님이 집으로 들어오셨다어려서 그랬는지 손님을 대접할 줄 몰랐던 나는 선생님이 오셨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하게 그냥 있었고선생님은 마당이 예쁘다며 평상에 앉으셨다잠시 후에 어머니가 돌아오셨는데 어머니는 평상에 앉아계신 선생님들 보시고는 당황해하시면서 나에게 한마디 하셨다.


아니너는 선생님이 오셨는데물이라도 대접해 드려야지뭐 하고 있었어?”


   아그런가 싶어서 나는 얼른 물 한 잔을 가지고 왔다그런데 어머니는 또 황망해하시면서 물 잔만 가지고 오면 어떻게 하냐며 쟁반에 받쳐서 내오라고 하셨다.


애가 뭘 잘 몰라서 죄송해요선생님.”


   이런 일이 있었기에 나는 평상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아주머니께 물잔을 준비하고 정성스럽게 쟁반에 받쳐서 내왔다아주머니 입에서 연신 감탄과 칭찬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어머니가 대문을 열고 들어오셨다나는 배운 대로 잘했다는 칭찬을 잔뜩 기대했다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상황은 아주 험악해졌다어머니의 표정은 금방 어두워졌고아주머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어머니는 정중하게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셨고아주머니는 죄송하다며 대문 밖을 황급히 나가셨다알고 보니 뭔가를 팔러 오신 분이었다초등학교 시절내가 살고 있던 작은 동네에서는 누가 어디에 살고뭐 하는 사람인지 정도는 다 알고 지냈던 터라 낯선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다그래서 그런지 그날 어머니는 나에게 아주 엄하게 말씀하셨다내용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바로 그런 내용이었지만다른 사람을 잘 대접하려고 했던 어린 마음에는 큰 상처를 남긴 일이었다.


   나름대로는 억울하다고 생각했나 보다낯선 사람을 조심하라는 어머니의 엄한 말씀은 억울한 감정과 뒤섞여 내 마음에 그다지 깊게 새겨지지 않았던 것 같다스무 살이 갓 넘어서야 그 말씀이 무슨 말인지 정신을 차리게 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저녁거리를 걸어가고 있는데건장한 체격의 한 남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저기요제가 여기가 처음 왔는데요죄송한데요혹시요뭐 좀 물어봐도 되나요?”


   남자는 얼굴이 분명 한국 사람처럼 생겼지만억양은 외국인 같았다어눌하고이 단어를 말했다가 저 단어를 말했다가 무슨 말이 옳은지 헷갈린 듯 자기 머리를 때려가며 죄송하다는 말을 연발했다자세히 들어 보니 요지는 이랬다울산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오늘 처음 서울에 왔다고 했다그런데 울산을 다시 내려가려고 고속버스터미널로 가려고 했는데버스를 잘 못 타서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도 없고이 사람 저 사람한테 물어보다가 지갑까지 털렸다고 했다이제 울산에 내려갈 차비도 없고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나는 불쌍한 마음이 들기 시작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주었는데자기는 한국말이 서툴러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며 계속 어떡해요어떡해요를 반복했다.


   나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종이에 고속버스터미널로 가는 방법을 자세히 적어서 주면서 버스표를 사라고 3만 원을 건네주었다그러고는 연신 서툰 말로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는 남자를 뒤로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20미터쯤 갔을까갑자기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건물 뒤로 몸을 살짝 숨기고그쪽을 한참 동안 살펴보았다남자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여유 있게 담배를 입에 물고 피고 있었다담배 한 대를 다 피우더니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또다시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나는 그렇게 눈뜨고 돈 3만 원을 날렸다.


   사실 사기꾼은 내 것을 강제로 가져가지도몰래 가져가지도 않는다내 손으로 내 돈을 기꺼이 내준다이런 이상하고도 이해되지 않는 독특한 행동이 있을까사기를 친다는 말은 swindle, 사기꾼은 swindler라고 하는데그 행위만큼이나 독특한 뜻이 숨어 있다이걸 들춰 보면 이런 말을 만든 인류의 지혜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swindler(사기꾼)는 우리에게 친숙한 swim, 곧 수영한다는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바로 고대어 ‘swem-’이다사기와 수영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swem-’이라는 이 고대어는 원래 움직이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었다처음에는 뭔가가 움직이는 물리적인 상태를 나타냈지만이 말이 심리상태를 이르는 말로 확대되면서 마음이 붕 떠 있는 상태혹은 들떠있는 상태를 나타내게 된다사기의 종류도 많고 사기꾼의 유형도 많지만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든 사기의 공통점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사기꾼은 내 마음속 고요한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를 넣어 놓는다는 점이다물고기는 내 마음속 바다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수영(swim)을 한다마음의 바다는 이리저리 일렁이고출렁출렁 물결이 일어나면서 내 마음 여기저기를 간지럽힌다.


   사기를 당하지 않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내 손으로 내 안의 물고기를 밖으로 내보내는 것그런데 사기꾼은 나에게 절대 물고기를 꺼내는 시간을 주지 않는다꺼내는 것은 만무하고 물고기는 수많은 알을 낳고 부화까지 한다바다는 더 출렁이고 마음은 부풀어 올라 급기야 해일이 일어날 지경이 되면 내 돈은 홀라당 날아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내 마음이 다시 잔잔해지는 데는 단 20미터를 걸어가는 시간밖에 걸리지 않지만그 남자와 대화하는 동안 나에게는 그 잠시의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내 안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물고기와 비슷한 이미지가 있는 말이 하나 더 있다바로 환상이라는 뜻의 illusion이다사람들이 어떤 웅장한 것을 보면 환상적이라고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사람들은 이 단어에 대해 좀 환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이 말의 한자어를 풀어봐도 헛된 생각이라는 말인데이 말이 처음부터 그렇게 긍정적으로 쓰이지는 않았을 것이다영어에서 illusion은 라틴어로 놀린다는 뜻의 말에서 유래한다. ‘il-’은 안에서’(in)의 뜻이고 뒤에 있는 ‘-lusion’은 동사형 ‘-lude’가 명사형이 되면서 변형된 것인데, ‘-lude’는 가지고 논다라는 뜻이다그러니까 이 말은 안에서 가지고 놀다’ 정도가 된다. ‘lud-’가 들어가는 말 중에 ludicrous라는 단어가 있다. ‘놀다라는 말이 나쁜 말은 아니지만 우리말에도 놀고 있네라고 하면 터무니없다는 뜻이 되듯이, ludicrous는 터무니없는’, 다시 말해 놀고 있다는 뜻이다.


   사기를 치는 사람은 환상(illusion)이라는 놀잇감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종류도 여러 가지고 크기도 천차만별이다물고기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적당히 심심해 보이는 사람에게 적당한 놀잇감을 던져주면그걸 받은 사람은 마음 안에서(il-) 그걸 가지고 재미있게 놀고(-lusioin) 있다옆에 있는 사람이 놀고 있네라고 말을 한들이 사람은 그 말이 들리지 않는다술에 취했다고 말을 해줘도 안 취했다고 화를 내는 사람이나해가 지고 저녁밥 먹을 시간이 지나도 집에 갈 생각을 까맣게 잊고 노는 놀이터의 아이들처럼놀잇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환상에 사로잡혀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얼마 전 모르는 외국 사람이 SNS로 연락을 해왔다한국에 관심이 많아서 한국을 몇 번 다녀왔고 한국어를 배운다고 했다올해 말 서울에 갈 일이 있는데 서울에 있는 눈 덮인 산을 올라 보고 싶다며 이런저런 것을 물어봤다요즘 우리나라가 문화적으로 외국에 많이 알려지다 보니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외국인이 부쩍 많은 듯하여 반가운 마음에 몇 번 메시지를 주고받았다며칠 뒤이 사람은 자기가 금융 전문가라며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자기가 다니는 회사는 오전에만 근무하고 오후부터는 여가를 즐긴다며한국 사람들은 하루 종일 일만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예전에 예방주사를 맞아서일까저 사람이 놀잇감을 던져주는 듯한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뻔한 시나리오가 펼쳐진다그렇게 바쁘게 일해서 삶을 즐기지도 못하면 되겠느냐나처럼 이렇게 투자하면 조금 일하고도 인생을 즐길 수 있다내가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다등등의 이야기어머니가 하셨던 것처럼 정중하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돈이 없어요버는 돈은 모두 은행이 가져갑니다.”


   그제야 이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분명히 했다아무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나 버렸다나한테 붙어봤자 시간만 낭비할 것 같으니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사람을 물색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나 보다한동안 가짜 이메일을 발송하거나 무료 쿠폰을 준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서 사기를 치는이른바 피싱(phishing)이니 스미싱(smishing)이니 하는 말이 유행처럼 돌아다녔다사기도 너무나 빨리 진화하다 보니 요즘도 수많은 관련 뉴스가 올라온다저 사람이 나한테 던진 게 놀잇감인지 아닌지 구별하기도 정말 쉽지 않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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