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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림 Feb 18. 2024

새치기의 경고

line, cut

   평소 같으면 5분 이내에 도착하는 지하철이 10분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았다. 시간만큼이나 줄도 길어졌다. 내 앞에는 대여섯 명이, 뒤로는 그보다 서너 배는 족히 되는 긴 줄이 생겼다. 이내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내방송이 나왔다. 예상대로 열차 고장으로 운행이 잠시 중단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버스 운운하며 한숨을 쉬었고, 머리 위에 달린 운행정보 화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더 기다리니 드디어 화면에 열차 그림이 나타났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번 열차를 포기하고 있었다. 분명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을 것이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도착한 열차는 타려는 사람들을 밀어내려는 듯 문밖으로 후끈한 열기를 내뿜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면서 억지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내 차례. 과연 들어갈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하는 순간, 내 뒤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나를 옆으로 밀치고 돌진한다. 그러자 그 뒤에 있던 학생도 나를 제쳤다. 스크린도어에 백팩이 끼었고 학생은 순식간에 가방을 빼냈다.


   와, 저런 놀라운 순발력이라니. 순간 나는 판단력과 순발력이 없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또 줄을 섰다. 이번엔 열차 그림이 금방 화면에 나타났다. 그런데 내 뒤에 있던 분이, 그러니까 원래대로 하자면 내 뒤로 세 번째에 서 있었던 분이 슬금슬금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내 옆에 나란히 서 있는 게 아닌가. 보통 두 줄로 서는데, 이분이 세 줄을 만들어 버렸다. “아니 왜 줄을 그렇게 서세요?” 뒤에서 비난의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곧 열차가 도착하자 이분과 그의 추종자들은 재빨리 나를 앞질러 지하철에 입성했다.


   뒤늦게 나도 성공하긴 했지만 두 번이나 새치기를 당하고 나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속으로 욕을 한창 퍼붓고 있는데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백발의 할머니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엿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워낙 목소리가 맑고 힘이 있어서 안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 설 명절은 잘 보냈어? 나? 나야 뭐 혼자 잘 지냈지. 걔네 집엔 뭐 하러 가. 지들끼리 재밌게 지내면 됐지 뭐. 늙은이 가봤자 방해만 되잖아. 괜찮아. 사는 게 원래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슬픈 얘기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도 유쾌하게 말씀하실까? 사는 게 원래 다 그런 건가? 모르는 할머니께 위로받으니 화가 났던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새치기는 영어로 ‘cut in line’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해석하자면 줄을 잘라 버린다는 말이다. 라인(line)이라는 단어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까? 이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로 ‘linea’이다. 한해살이풀인 아마(亞麻)로 만든 섬유를 뜻한다. 아마 섬유를 린넨(linen)이라고 하는데, 린넨으로 만든 침대 시트나 가방을 종종 볼 수 있다. 얼마 전 박물관에서 이집트 문명전을 한다길래 보러 갔었는데, 이집트에서 공수해 온 미라 몇 점을 볼 수 있었다. 모든 미라는 베 같은 섬유로 꽁꽁 싸여 있는데 시티(CT) 촬영으로 미라 안을 찍은 영상을 함께 보여주었다. 미라를 꽁꽁 싸맨 저 천이 무엇일까 궁금하여 읽어보니 바로 린넨이었다.


   린넨은 인류가 옷을 지어 입기 시작할 때 최초로 사용한 섬유라고 한다. 그만큼 역사가 오래되었으니 라인(line)의 어원이 될 만도 하다. 그 당시에는 섬유의 종류가 많지 않았으므로 실이라고 하면 무조건 린넨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니, 라인, 곧 줄은 실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삶에 가장 필요한 요소인 의식주 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의’(依)에 해당하는 말이니 그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영어에서 라인은 매우 광범위한 뜻으로 쓰인다. 시나 노래의 가사도 라인이라고 하고, 연극이나 영화의 대사도 라인이라고 한다. 기찻길도 라인이고, 현대인의 필수품인 전선과 전화도 라인이다. 제품의 종류도 라인이라고 한다. 예부터 내려오는 계통도 라인이고, 심지어는 어떤 행동이나 사고방식도 라인이라고 한다. 지하철 노선도 라인이고, 그 지하철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도 라인이다. 그러므로 라인은 ‘이동과 소통’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라인이 컷(cut) 된다면? 예를 들어 전 세계 인터넷이나 전화 통신 선이 '컷'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세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혼란 속에 빠질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컷(cut)도 좀 살펴보자. 자른다는 말인데, 이 말에는 아주 중요한 점이 숨어 있다. 바로 cut은 도구를 품고 있다는 점이다. 그냥 도구가 아니라 아주 날카롭게 날이 선 도구, 바로 칼이다. cut은 칼(knife)을 뜻하는 고대 프랑스어나 게르만어에서 유래되었다. 어원만 보면 cut, 그 자체가 칼이다. 손으로 찢는 것은 cut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새치기는 인류 문명에서 가장 중요한 ‘이동과 소통’을 날카로운 칼로 무참히 잘라버리는 행위이다. 대학 후배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제가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했단 말이에요. 금요일 저녁인가? 유명한 맛집이 있다고, 가자고 하더라고요.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예약도 안 받는 데 있잖아요. 가니까 벌써 대기 줄이 엄청나게 긴 거죠. 사람들이 지루하니까 스마트폰만 보고 있는 거예요. 남자친구가 저보고 잠깐 와보라며 슬쩍 앞쪽으로 새치기하는 거 있죠. 근데 당한 사람은 모르고 폰만 보고 있더라고요. 남친이 귓속말로 저한테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우리 시간 엄청나게 벌었다 …. 다음 날 남친을 다시 만났어요. 그리고 말했죠. 우리 헤어지자. 하하하.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이랑 결혼이라도 했으면 어쨌을까 싶어요. 그날 맛집을 간 건 정말 신의 한 수였다니까요.”


   후배의 남자친구는 새치기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자기가 새치기할 때 썼던 칼이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자를 줄 누가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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