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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림 Jan 12. 2024

너와 나의 관계

conceive, parallel

   어느 날 한 친구가 찾아왔다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차 있었고무슨 말은 하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한참을 망설였다내가 먼저 말을 걸면 생각을 흩트려 놓을 것 같아 가만히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리고 마침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선생님저는 요즘 불안하고 무서워요책상에 앉아 있으면 책상에서 큰 칼날이 떨어져 제 무릎과 발목이 잘려 나가는 생각이 들어요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서 창문을 깨고 들어와 제 목을 칭칭 감는 생각이 나요길거리를 가면서도친구와 함께 있어도 무서운 생각이 자꾸 들어요.” 친구와 나는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러나 그 친구의 마음이 평안해지기에는 그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우리는 매일 일과를 마칠 때쯤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였다이야기의 주제는 생각이었다.


오늘은 무슨 생각이 들었고무슨 생각을 했니?”


   심각하고 마음이 무거운 생각과 이야기도 있었지만간간이 버스 창밖을 보며 들었던 생각점심을 먹으며 들었던 생각무엇을 샀고무슨 책을 읽었는지 등등 가볍게 웃는 이야기도 있었다주제는 생각이지만 그로 인한 이야기는 무한하였다며칠이면 바닥이 드러날 것 같았던 이야기는 신기하게도 계속되었다생각이 끊임없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리라하루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도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들락날락하고 있다는 걸 그 친구도 나도 그제야 비로소 인지할 수 있었다.


   생각이란 게 무엇일까생각과 관련된 영어 단어 중에는 conceive라는 말이 있다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생각하다’, ‘상상하다라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그런데 이 단어에는 임신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인다이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는 왜 이런 뜻이 함께 담겨 있는지 그저 특이하네정도로 여기고 넘겼던 것 같다그런데 시간이 지나 결혼도 하고 아이를 갖게 되면서 다시금 이 단어의 뜻을 되돌아본 일이 있었다.


   아내가 아이를 뱃속에 품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무리를 했던지 배 속의 아이는 엄마에게 신호를 보냈다지금 되돌아보면 뱃속에서 아이는 엄마에게 무리하지 말고 쉬면서 편안하게 자기를 낳아달라고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아내는 예정일 보다 일찍 병원에 들어가서 안정을 취해야 했다의사는 절대 안정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고우리는 배 속의 아이를 토닥이며 수시로 괜찮아괜찮아걱정하지 마라.”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conceive는 함께라는 뜻의 ‘con-’과 가지다는 뜻의 ‘-ceive’가 합쳐진 말이다그래서 conceive는 서로를 함께 품고 있다는 속뜻이 있다그러니 임신이란 엄마가 아이를 일방적으로 품고 있다기보다는 엄마는 아이를아이는 엄마를 서로 안아 주고 있다는 말이다그러니 그때 아이는 엄마를 안아 주며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괜찮아요괜찮아요걱정하지 마세요.”


   그래서 conceive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conceive가 의미하는 생각하다라는 이미지는 내가 생각을생각이 나를 서로 안고 있는 모습이다.


   불안한 마음으로 찾아와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던 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약속이나 한 듯 자연스럽게생각날 때 가끔 찾아오는 행복한 청년이 되었다그 일이 있은 지 10년이 지나고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까마득히 잊고 있던 가을 어느 날그 친구가 나에게 10년 전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선생님이 그때 저에게 이런 말을 해 주셨잖아요무서운 생각이 들 때마다 그것을 창작의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고 그림으로 그려보라고요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림을 그렸어요그러던 중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무서운 생각이 그림이라는 출구로 흘러 나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어쩌면 그 생각을 버리려고 하는 마음이 더욱 강박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밀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강렬해지는 거 있죠그림을 그리면서 그 무섭고 싫었던 존재를 재밌는 아이디어라고 받아들이니 신기하게도 어느 틈엔가 괜찮아지더라고요.” 그 친구에게 그림은 그 생각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유용한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고요한 마음을 가지려고 하면 어느 틈엔가 모르는 사이에 무수한 생각의 꼬리가 이어진다마치 고요한 숲속어느 샘터에서 소리 없이 올라오는 샘물처럼막으려 하면 다른 곳으로 생각의 샘물은 솟아오른다그중에서는 너무나 매력적이고 신기하여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지는 생각도 있지만 나를 너무나 괴롭히는 생각도 있다어떤 생각은 왔다가 꿈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지만어떤 것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고여있기도 하다그것이 갖고 싶은 것이든 아니든버리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 생각이 있다이 생각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지왜 머물러 있는지 알 수도 없다그래서일까옛사람들은 생각의 속성을 기가 막히게 conceive라는 한 단어 속에 담아 놓았다나는 생각을생각은 나를 서로 안고 있다그러니 버리고 싶은 생각이 있어도 생각이 나를 꼭 안고 있으면 떼어 내기가 어려울 수밖에마치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처럼 ……만나고 싶을 때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사람만나고 싶지만 만날 수 없는 사람만나고 싶지 않아 헤어진 사람만나고 싶지 않은데 계속 볼 수밖에 없는 사람생각도 그런저런 사람과도 같다.


   만나고 싶지 않은데 계속 볼 수밖에 없는 사람은 우리를 괴롭게 만든다그 사람이 내 삶을 침해하거나생명에 위협을 준다면 당연히 경찰의 도움을 받아 격리해야 하지만 그저 사이가 안 좋고 꼴 보기가 싫다는 이유로 내가 다니는 학교 친구나 내가 다니는 직장 상사를 멀리 쫓아낼 수는 없다그렇다고 내가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한들 그런 유형의 사람이 그곳에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다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기 때문이다그럴 때면 나는 저 친구와의 이야기를 생각한다그에게 그림은 존재를상황을현실을그리고 그 모든 생각을 그의 방식대로 받아들이고 놓아주는 통로였다내가 너를 그려줄 테니 여기서 잠시 놀다가 가렴 …….


   만나고 싶지만 만날 수 없는 사람은 어떨까이런 경우는 우리를 괴롭힌다기보다는 안타깝게 만든다. parallel은 이런 상황에 딱 맞는 단어이다이 단어는 평행한의 뜻인데기찻길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금방 이해가 간다사랑하는 두 사람이 각각 기찻길의 한 레일 위로만 다닐 수 있다고 상상해 보자항상 옆에 있는 걸 알지만 서로가 만날 수 없는 관계혹은 (conceive의 의미를 빌자면서로를 안아 줄 수 없는 관계이다. ‘para-’는 그리스어에서 옆에’ 혹은 반대쪽에 있는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옆에 있지만성격은 서로 반대라서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옆에 있으면 서로 닮기 마련인데옆에 항상 있으면서도 성격이 반대라니 ……우리는 이런 상황을 역설이라고 하는데역설이라는 단어에도 ‘para-’가 들어가 있다. paradox이다. ‘-dox’는 의견이라는 뜻이므로 paradox는 논리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의견이 공존하고 있는 상황을 말한다. ‘para-’가 들어가 있는 또 다른 단어는 parasite(기생충)이다숙주와 기생충은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닌데 서로 가까이에 있다이 경우 만나고 싶은데 만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입장은 숙주가 아니라 기생충이다둘 사이는 서로 상극이라 하나가 될 수 없지만기생충 입장에서는 어떻게 하든 목숨을 걸고 숙주 옆에 있으려고 하니 이 또한 평행한 기찻길 위의 상황이 된다.


   나는 지금껏 살면서 이런저런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종류의 고만고만한 고민을 꽤 많이 해왔다철이 없을 때는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에게 가서 짜증을 냈던 것 같고고독한 사색이라는 그럴듯한 치장을 하고 생각의 늪에 빠져 살 때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선과 악은 무엇인가 등등의 주제를 놓고 옛날 사람들의 생각에 내 상황을 빗대며 복잡한 수식어로 내 상황을 해석했더랬다운이 좋아 좋은 사람을 만났다 싶으면 운명 어쩌고 등등을 들이댔고그 반대의 경우에는 원망도 하고 자책도 늘어놓았다그런데 어느 날 parasite라는 단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숙주와 기생충의 관계는 공생(symbiosis) 관계와는 완전히 다르다공생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여 서로 도와주며 살아가는 관계이다여기에는 숙주도기생충도 없다이유는 아주 간단하다서로가 서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하지만 기생충은 숙주에게 이렇게 말을 할 것이다.


나는 너를 좋아하는데너는 왜 나를 안 좋아하니?”


   이런저런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말은 내 마음대로 상대방이 움직이지 않아서 고민이라는 말과 같다아마도 기생충은 평생 이런 고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하지만 내 마음대로 상대방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내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게 로봇이 아니고서야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그러니 대부분 너와 나의 관계에서 오는 갈등과 고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비상식적이고 불가능한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해괴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오늘도 생각의 샘물이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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