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에세이: manner, mannerism
아침은 늘 바쁘다.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나면 스트레칭을 한 후, 침구 정리, 면도, 머리감기, 양치질, 커피 내리기, 옷 갈아입기, 아침 식사 등등 모든 것을 30분 내로 마쳐야 한다. 바쁘다. 모든 일이 기계 돌 듯 무의식적으로(혹은 자동으로) 돌아간다. 그러다 문득 어느 날 여유로운 아침, 거울 속에서 이를 닦고 있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누구니? 뭘 하고 있어?” 손은 짧은 막대를 입 속에 넣고 왔다 갔다 하고, 입은 부글부글 새어나오는 거품을 억지로 머금고 있는 사람. 매일 보았지만 매일 본 기억이 없는 낯선 모습. 순간 멍해졌다.
생각해 보면 그런 일은 꽤 많다. 늘 다니던 길이 처음 온 것처럼 느껴지고, 늘 보던 사람이 딴 사람처럼 느껴지고, 잘려나간 내 손톱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신문지 위를 굴러다닐 때. 그리고 퇴근 후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늘 누르던 2층 버튼을 백화점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에서 아무 생각 없이 눌렀을 때.
“2층에서 뭐 사려고?”
아내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본 빨간불이 켜진 2층 버튼. 낯섦과 당황스러움. 그리고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 있는 내 모습을 직면하는 순간의 창피함. 그 순간 난 4살 난 꼬마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아빠, 피라미드는 누가 만들었어?”
“사람이 만들었지.”
“한 사람이 만들었어?”
“아니, 수천 명이 만들었지. 노예가 만든 거야.”
“노예가 뭐야? 왕을 좋아하는 사람이야? 피라미드도 만들어주고.”
웃음이 났지만 당황스러웠다. 노예? 나는 한 번도 노예가 왕을 싫어할지, 좋아할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노예라는 단어에 대한 나의 매너리즘과 이 단어를 처음 듣는 꼬마의 ‘매너리즘 없음’이 충돌하는 순간이다. 충돌 순간, 그제야 나는 나의 틀에 박힌 고정 관념을 보았다. 낯섦과 당황스러움과 창피함. ‘노예가 뭐지? 노예는 정말 왕을 좋아했을까?’
매너리즘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매너(manner)에서 나왔다. manner는 어떤 일을 하는 방식 혹은 관습이나 예의를 뜻하는데, ‘man-’은 고대어에서 손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니 ‘man-’이 들어가는 단어에는 손과 관련된 뜻이 많다. manicure(손톱손질), manage(관리하다), manipulate(조작하다), manufacture(만들다), manuscript(필사본), manual(손으로 하는/설명서), maintain(유지하다) 등이 그렇다. 우리말도 보면 수공업, 수동, 수제품처럼 ‘수(手)’는 만든다는 말과 잘 어울려 쓰인다. 그러고 보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손은 만든다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손은 뭔가를 다룬다는 상징성이 있어서 manner는 어떤 일을 하는 방식을 뜻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방식이 사회적으로 굳어지면 관습이 되고 예의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매너가 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관습을 잘 따른다는 뜻이다. 우리말에도 뭔가를 하는 방식을 뜻하는 말 중에 ‘수단(手段)’이 있는데, 이 또한 손(手)이 들어간 걸 보면 참 재미있다.
그런데 매너가 어떻게 매너리즘이 되었을까? 서양 미술사에서는 매너리즘을 16세기 유럽에 널리 퍼진 예술 양식을 일컫는데, 이 시기 유럽은 극도로 복잡하고 어지러운 기교와 부자연스러운 색채를 쓴 그림이 유행하였다. 정확한 인체의 비율과 자연의 질서를 균형감 있게 담으려는 르네상스의 고전주의 작품들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이런 풍의 그림을 두고 비평가들은 “16세기 유럽의 정신적 위기”, 혹은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 등 혹독한 평을 쏟아 냈다. 이러한 예술적 흐름은 르네상스 시대의 조화미와 균형미라는 틀을 깨 보려는 시도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매너리즘 예술은 기존의 예술에게 이런 질문을 했을 것이다.
“당신들은 관습(manners)에 푹 젖어 있어.”
“우리가 그 틀에 박힌 것을 낯설게 해주마.”
“어때 당황스럽지?”
르네상스가 신에 대한 도전에서 탄생했듯이 매너리즘은 르네상스에 대한 도전에서 탄생한 셈이다. 그렇게 역사는 돌고 돈다. 조화와 균형이라는 르네상스 철학의 답답함에 대한 반발! 그들은 최소한 그림 속에서만이라도 손으로 자유롭게,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기존 관습을 깨려는 시도에서 등장한 16세기 매너리즘은 오늘날 ‘틀에 박힌 습관이나 타성에 젖어 있음’을 뜻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너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어.”라고 말한다면 내가 타성에 젖어 있으니 그걸 좀 깨우치라고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너무 틀에 박혀서 아예 틀 속에 갇혀 있다는 의식조차 못 하는 상태, 그러니 그걸 좀 의식해 보라는 말이다.
우리는 과거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관습을 끊임없이 깨려고 하지만 결국은 그 관습의 틀 속에 있다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것 같다. 그러니 늘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 마치 언어의 틀을 언어로 깰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관습과 타성은 깨지기 마련일까? 우리의 아이들이 과감히 그 전면에 나선다. “아빠, 노예가 뭐야? 왕을 좋아하는 사람이야? 피라미드도 만들어주고.” 아이들은 길을 만들고 어른들은 길을 열어준다. 역사가 돌고 돌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