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에세이: decide, rational
아이들의 가을옷이 필요하다며 아내는 쇼핑몰을 가자고 했다. 늦은 오후 아내와 나는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차를 타고 30분 정도 걸리는 쇼핑몰에 도착하였다. 예전 같으면 1층부터 꼭대기 층까지 붙어 다녔겠지만 언젠가부터 아내는 내가 졸졸 따라다니며 잔소리하는 게 귀찮은지 각자 필요한 걸 구경하다가 다시 만나자고 한다. 아내가 아이들 옷을 고르는 동안 나는 내가 입을 옷을 고르고 아내에게 전화하였다. 한참 후 아내는 왔고 우리는 아이들 저녁이 늦을까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부모가 되면 집안에서나 집 밖에서나 늘 아이들이 걸리기 마련인가 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까 그 노래가 다시 흘러나왔다.
“시간은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이걸 끝내고 싶지 않은데.”
(Where does the time go? I don’t want this to end.)
“시간은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가 있는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Where does the time go? Let’s hang on to the moment we’re in.)
화음이 아름다운 남성 듀엣곡. 아름다운 단풍이 든 한적한 공원에서 두 남자가 벤치에 앉아 <시간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라며 우리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뮤직비디오가 참으로 인상적인 곡이다. 마음에 드는 음악과 함께라면 길 위가 콘서트홀이다. 그렇게 두 부모는 멀리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사냥한 포획물을 만족스럽고 자랑스럽게 집으로 가져와서는 아이들에게 펼쳐 놓았다. 그러나 우리 삶에는 항상 돌발변수가 있다.
“엄마 사이즈가 작은데?”
딸은 말했고, 아내는 심장이 쿵 내려앉은 듯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또 가지 뭐.”
일부러 데이트를 더 하고 싶어서 밑밥을 깔아놓은 것도 아닌데 인생은 이렇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저녁을 차려 먹고 나니 더는 서두를 이유도 없어졌다. “시간은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가 있는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 또 노래를 들었다. 우리를 위한 노래인 것 같다며… 다시 간 김에 고장 난 전기 포트가 생각나서 전기 포트도 사서 오는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언제 우리에게 이런 여유로움이 있던 적이 있었을까? 집에 다시 도착하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아내는 교환한 옷을 담은 쇼핑백이 어디 있냐며 물었다. 내가 들고 있었던 기억은 나는데 물건은 없었다. 시간은 저녁 9시 50분. 쇼핑몰은 10시에 문을 닫는다. 순간 머리가 하얘지고 우리들의 머릿속 시간 순서는 뒤죽박죽이 되었다. 내 옷을 산 매장에 아이 옷을 두고 왔을 거라며 남성복 매장에 전화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교환한 아이 옷이 거기 있을 리가 없었다. 아내는 돌아다니다가 어딘가 두고 왔을 거라며, 지금 가도 문을 닫았을 테니 포기하자고 하였다. 하지만 실망하는 딸의 얼굴이 떠올랐고, 지금 가봐야 소용없을 거라는 아내의 말을 뒤로하고 급하게 혼자 차에 올랐다. 쇼핑몰이 닫히더라도 무슨 방법이 있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충동적인 결정을 했다. 부웅 ~. 나는 과연 그 순간 합리적인 결정(rational decision)을 한 걸까?
rational(합리적인, 이성적인)이라는 말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먼저 고대어 ‘re-’를 생각해 볼까?. ‘re-’는 생각하거나 계산한다는 뜻이다. read(읽다), reason(이유), riddle(수수께끼) 등 생각과 관련된 말이 모두 여기에서 나왔다. 계산한다는 뜻이 담긴 ratio(비율)도 여기에 어원을 두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와 고전주의 시대에는 이른바 황금비(golden ratio)에 대해 열광했는데, 이는 아마도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풍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ratio에 n을 더 붙인 ration은 흥미롭게도 전쟁 때 군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배급 식량이나 배급량을 뜻한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ration이 이런 뜻을 나타내게 되었는지 상상해 볼 수는 있다. 전쟁 시에는 식량이 턱없이 부족할 테고 그 많은 군인들이 불만 없이 음식을 먹으려면 일정한 비율(ratio)로 배급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만약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 있었다면 사람들은 욕심을 부리고 같은 편끼리 싸움이 났을지도 모른다. 사실 넓게 보면 국가의 한정된 자원을 국민에게 어떻게 정의롭게 분배하느냐와 같은 문제이다. 하지만 국가 전체로 확대할 때 나타나는 다양한 변수를 모두 생각하면 꽤 복잡한 문제이다. 그러니 ration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이 단어에 ‘-al’을 붙이면 ‘합리적인’이라는 뜻이 된다. 합리적인 것이 무엇인지 여기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한정된 음식을 욕심을 부리지 않고 일정 비율로 나누어 먹으면 갈등이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갈등이 없는 합리적인 상태가 되려면 우선 모두가 욕심을 잘라내야 한다. 개인의 심리적 수양도 중요하겠지만 시스템도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재미있게도 decide(결정하다)에도 자른다는 뜻이 담겨있다. ‘de-’는 중심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뜻이고, ‘cide-’는 고대어에서 ‘자르다’의 뜻이다. ‘cide’가 들어간 말을 보면 끔찍한 단어가 많다. 예를 들면 suicide(자살), genocide(대량학살) 등이 있다. 반면 세균(germ)을 죽이는 germicide(살균제), 해충(pest)를 죽이는 pesticide(살충제)도 있다. ‘cide-’가 조금 변형되어 생긴 단어가 가위(scissors)이다. 그러니 decide를 어원대로 해석해 보면 ‘잘라내어 떼어 버린다’라는 뜻이다. 어떤 것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많은 가능성들을 잘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모두 자르고 남은 핵심을 선택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decide라고 부른다.
삶 전체가 선택의 연속이다. 아침에 언제 일어날지부터 잠을 언제 잘 것인지까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은 선택해야 할 것으로 넘쳐난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는 오늘날 정보의 홍수 시대에서만 유독 크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그 옛날 모든 역사와 이야기에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의 일화가 있고, 셰익스피어는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인간, 햄릿을 만들었다. 이제는 결정을 못 하는 사람을 햄릿 증후군(Hamlet Syndrome)에 걸렸다고까지 말할 정도가 되었다. 둘 중에 어느 하나가 더 좋으면 고민할 이유가 없다. 두 선택을 놓고 고민하는 이유는 가능성이 반반이거나 둘 모두를 가지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햄릿은 늘 선택을 놓고 고민했지만, 그런 숙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비극으로 몰아넣었다. 욕심을 잘라버리지 못한 탓은 아닐까?
무엇이 합리적인 결정인가에 대해 깨닫게 해준 작은 경험이 하나 있다. 어느 해, 연말 저녁이었다. 뭔가 활기찬 연말의 모습을 보고 싶었기에 늘 가던 길을 벗어나 처음 가보는 길을 무작정 가보았다. 연말이니 뭔가 색다른 거리의 풍경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전봇대 위에 설치된 먼지 낀 가로등이 드문드문 있었고, 그날따라 안개 같은 무언가가 뿌옇게 끼어 시야를 방해했다. 사람들은 편의점 앞 간이 의자에 앉아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간혹 술에 취한 아저씨가 비틀거리며 지나갔다. 가게들은 이미 문이 닫혔고, 고양이 몇 마리가 주인인 양 가게 앞을 지키고 있었다. 시간은 갑자기 물안개 이동하듯 느려졌고 사이 사이 좁은 골목길은 가는 시간을 붙들고 있는 듯했다. 더 갔다가는 괜히 알지도 못하는 길을 들어섰나 하는 후회가 들것 같았다. ‘재미는 무슨 재미….’ 나는 기대감을 내려놓고 원래 가려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탁탁 탁탁. 그때, 저 앞에서 빠른 박자의 발소리가 들렸다. 까만색 코트를 입은 50대 중반의 아주머니가 느려진 시간 속에서 마치 가속도가 붙은 듯 발걸음을 빨리 옮기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묵직한 장바구니를, 왼손에는 작은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멍하니 케이크를 쳐다보았다. 저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아이들, 남편, 노부모, 혹은 그저 아는 사람? 나는 그분이 케이크를 앞에 놓고, 촛불을 켜고, 후 바람을 불고, 웃음을 짓는 모습을 멍하니 서서 한참 동안 상상하고 있었다. 내 머릿속의 촛불이 그 적막한 골목길을 이미 환하게 밝히고 있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가 안 보일 때까지 서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조금 전, 모르는 길을 가보겠다고 한 결정은 정말 어리석었을까? 골목길은 색다른 재미를 찾았던 나를 위해 존재하지도 않았고, 케이크를 든 아주머니가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갑자기 나타났을 리도 없었다. 나는 이미 결정했고, 그 후 재미를 찾겠다는 욕심을 버렸을 뿐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결정이 합리적이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욕심을 잘라 버렸고, 그 아주머니를 보며 상상의 행복함을 느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는 어떤 갈등도 일어나지 않았다.
밤 10시에 문을 닫는 쇼핑몰에, 차로 30분이 걸리는 거리를, 잃어버린 물건을 찾겠다고 9시 50분에 출발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리석은 결정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작정 쇼핑몰로 가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쇼핑몰은 물건을 잃어버린 나를 위하여 절대 존재하지 않으니 물건을 반드시 찾겠다는 욕심은 일찌감치 잘라 버렸다. 쇼핑몰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20분. 그런데 깜깜할 거로 생각했던 정문이 훤히 밝혀져 있었다.
“문 안 닫았어요?”
“오늘은 토요일이라 11시까지 해요.”
쪼그라 들었던 마음이 펴지면서 여유가 생겼다. 여유가 생기니 생각도 다시 정리된다. 천천히 주차를 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까 주차장으로 내려오면서 가구점에 들렀던 일이 생각났다. 아, 그곳, 의자 위 테이블. 다시 가구점에 들렀다. 카운터에 고이 모셔져 있는 딸의 옷. 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집으로 옮겼다.
“시간은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이걸 끝내고 싶지 않은데.”
(Where does the time go? I don’t want this to end.)
노래 덕분일까? 그날 나는 1시간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너무 많은 고민은 경험할 시간을 빼앗아 버린다는 깨달음은 덤으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