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에세이: make, create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보니 ‘창조적’, ‘창의적’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있다. 아이들을 창의적으로 키워야 한다느니, 창의적인 활동을 시켜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너무 많이 듣다 보니 도대체 무엇이 창조이고 무엇이 창의인가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많은 학과 공부를 따라가느라 지쳐버린 우리 아이들이 창조까지 해야 하는 것인가? 창조가 그리 쉬운가? 그리고 우리가 모두 다 창조적이어야 할까? 강요 아닌 강요에 대한 반항심이 올라온다. 공급과잉으로 가치가 떨어지면 어쩌려고? 심통과 심란한 마음으로 사전을 뒤졌다.
“창조: 전에 없던 것을 처음 만듦”
“창의: 새로운 의견을 생각해 냄”
사전적 의미를 확인했으나 또 드는 삐딱한 마음을 어쩔 수 없다. “참 나… 세상에 새로운 게 얼마나 많기에 …” 그러니 이름하여 퓨전! 전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들기보다, 있던 것을 합쳐 놓으면 새로워 보이기 때문일까? 융합이 이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사실 융합이란 것도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고대에는 이미 모든 지적 영역이 융합되어 있었다. 농부는 음악가였고 축제기획자였으며 천문학자였다. 미술가, 과학자, 음악가, 건축가 등 많은 타이틀이 붙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심지어 요리사로 일하기도 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로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는 x축과 y축으로 이루어진 좌표를 만들어낸 천재적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였다. 그러나 산업의 발달과 함께 세상의 모든 것은 지식이라는 이름 아래 세분화 되었다. 분류는 효율적이었지만 좋음과 나쁨, 우수함과 열등함 등 차별을 강화했다. 하위 개체들은 극심한 경쟁에 시달려야 했고, 상위 개체들은 통제와 억압으로 스스로를 지키려 했다. 한 분야에는 뛰어나지만 이를 확장할 수 있는 응용력도 떨어졌다. 그러니 오늘날 창조를 매개로 다시 융합이 돌아온 것을 삐딱하게만 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것을 만들든, 있던 것을 합치든 사람들이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은 분명하다. 아니 좋아하는 차원이 아니라 인간은 곧 만드는 존재이고 인간의 오감은 만들기를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반박할 수는 없다. 사실 make는 반죽하다는 뜻의 고대어 ‘mag-’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만들기의 기본 재료가 흙이었기 때문이다. mass(덩어리), magma(마그마) 등도 모두 여기에서 나왔다. 그러면 창조(creation)는 만들기(making)와 뭐가 다를까? 예를 들어 인간이나 우주는 ‘창조’와 잘 어울리고, 책상이나 컵은 ‘만들기’와 잘 어울린다. 어떤 단어와는 잘 어울리고 어떤 단어와는 어색하다. 이는 영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 그럴까?
‘create’는 고대어 ‘ker-’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자라다’를 뜻하였다. create는 만들다가 아닌 자란다는 뜻에서 생겨난 것이다. 만들고(making) 나서 더 이상 자라지 않으면 create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어느 날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만들기와 창조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창조라는 말은 특별하고 탁월한 것에 쓰지 않을까요?”
“‘요리를 만들다’라고 하면 평범한 음식이 생각나지만
‘요리를 창조했다’라고 하면 특별한 요리를 상상하게 돼요.”
특별하고 탁월한 것? 무엇이 create를 그렇게 특별하고 탁월하게 만들까? 어원에서 힌트를 얻자면 그것은 아마도 자라게 하는 힘, 곧 생명력이 아닐까? 성경의 창세기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Then the Lord God formed a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Genesis 2:7)
“the dust of the ground”는 곧 make의 어원인 흙덩어리(mass)이다. 이곳에 생명력(life)을 불어넣으니 흙으로 만든 형상이 곧 살아있는 존재(living being)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는 영어단어 create의 의미를 집약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만들고(make) 생명력을 부여한다면 우리는 create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창조된 요리”는 살아있는 요리이다. 이 음식에는 요리사의 정성과 혼신의 노력이 살아있을 것이고 그것을 보고 싶고 먹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들의 고동치는 심장 소리가 살아있을 것이다.
‘자라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고대어 ‘ker-’는 오늘날 ‘cre-, cru-, cer-’ 등의 변형된 형태로 남아있다. 생명체를 뜻하는 creature, 새끼를 낳는다는 뜻의 procreate와 같은 단어도 이제는 쉽게 이해가 된다. 소리가 점점 커진다는 뜻의 crescendo, 둥근 달로 자라기를 기다리는 초승달 모양을 뜻하는 crescent, 수가 증가하는 increase, 수가 줄어드는 decrease, 축 처져서 기운이 없을 때 흥을 불러일으켜 주는 recreation, 사람이 없어서 일 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recruit도 있다. 모두 생명을 품고 커졌다가 작아졌다 한다. 아침에 간편식으로 자주 먹는 시리얼(cereal)도 있다. 이 말은 이탈리아의 농업의 신인 세레스(Ceres)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이름은 곡식을 ‘자라게 하는 신’라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변화하는 모든 것은 생명력이 있고 생명력은 곧 탁월함이다. 사람들이 창조라는 말에 특별하고 탁월함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함을 최상의 행동과 상태를 뜻하는 아레떼(Arete)라고 했다. 그리고 아레떼, 곧 탁월함이란 “그 어떤 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그 무엇”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창조란 없던 것을 새로 만들거나, 있던 것을 합치는 거창하고 어려운 것일 필요도 없다. 그저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공동체답게 만든 것, 사회를 사회답게 만들고, 우리를 둘러싼 자연을 자연답게 만드는 것, 그것이 곧 창조요, 창의가 아닐까?
또다시 그 삐딱한 질문이 올라온다.
“우리 아이들이 창조까지 해야 하는 것인가?”
“창조가 그리 쉬운가? 그리고 우리가 모두 다 창조적이어야 할까?”
그리고 이제 나의 반성 어린 답.
“네. 그럼요. 그러면 정말 좋죠. 누구나 나를 나답게 만들어갈 권리가 있어요. 그게 생명력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