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나무로 빚는 에세이
오전에 어머니 병원 진료를 마치고 나는 일이 있어서 점심은 간단하게 병원에 있는 식당에서 먹기로 하였다. 지난주부터 돌솥비빔밥을 드시고 싶어 하셨는데, 마침 식당 메뉴에 있었다. 나도 좋아하는지라 돌솥비빔밥 두 개를 시켰다. 반찬은 네 가지. 김치, 깍두기, 콩자반, 그리고 청포묵. 다른 반찬들은 자주 봤지만, 청포묵은 오랜만이다. 청포묵이란 것이 특별히 맛과 향이 나는 음식이 아니다 보니 그저 몽글몽글한 식감이 좋다. 금방 없어지고 바닥을 드러냈다. 어머니가 갑자기 접시를 들더니 마지막 하나 남은 묵을 내 돌솥에 부으신다. 그러고는 이내 종업원을 부르고 청포묵을 더 청하셨다. “하나 남은 거 너 먹어”라는 말이라도 하셨으면 덜 당황스러웠겠지만, 무작정 남은 걸 내 그릇에 쏟아 넣으시니 내 입에서는 대뜸, “아휴, 내가 애도 아니고 알아서 먹지”라는 짜증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며칠 전, 저녁을 먹는데 딸이 혼자 여행 좀 다녀오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친구였으면 얘기를 듣자마자 재미있겠다, 바쁘게 살았으니 여유 있게 여행하면 좋지, 어디로 가니, 거기 가면 맛있는 거 많겠네, 부럽다, 등등 손발 맞는 말을 먼저 했을 듯한데, 부모라 어쩔 수 없다. 위험하지 않겠냐는 말이 가장 먼저 나왔다. 친구랑 같이 가라, 해지고 돌아다니면 안 된다, 사람 없는 곳에 좋다고 다니지 말라, 등등 잔소리가 술술 나오기 시작한다. 예전 같으면 한숨을 쉬거나 짜증을 내며 방으로 쏙 들어갔을 테지만, 가만히 듣고 있는 걸 보면 많이 발전하긴 했다. 딸의 한마디에 열 마디 스무 마디를 늘어놓고 나니 말을 너무 많이 했나 싶다.
식당 아주머니가 청포묵을 하나 더 가져다주셨다. 병원 식당이라 그럴까. 아주머니들 얼굴에 미소가 담기셨다. 이쪽저쪽 테이블 사이를 분주히 계속 움직이면서도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부드럽고 친절하다. “네.” 이렇게 짧게 대답하는 법도 없었다. “네, 가져다드릴게요. 저희 반찬이 맛있죠?” 아프고 걱정 많고 어두운 표정의 사람들이 찾아와 밥 한 끼 먹는 곳,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다는 걸 그분들은 알고 있었다.
진료 예약을 하고 왔는데도 환자들이 많다 보니 30분 이상 기다려야 했다. 대기실에는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벤치가 10개는 있었는데, 아침인데도 두세 개 정도만 비어 있다. 앞에는 네 명 정도의 간호사 선생님들이 분주히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진료 접수, 수납과 예약, 처방전 배부, 주의 사항 안내, 검사실 안내, 혈압과 몸무게 측정 …. 어차피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나는 어머니 옆 앉아 눈을 감았다. 하나의 감각을 닫으니 다른 하나가 더 크게 열린다. 간호사 선생님들과 환자들의 대화가 더 또렷또렷 들리기 시작했다. 왜 처방전을 빨리 주지 않느냐, 10분만 기다리면 된다고 했는데 왜 10분이 지나도 이름을 부르지 않느냐, 이러려면 예약이 왜 필요하냐, 엑스레이는 어디에서 찍느냐, 엑스레이 찍는데 또 기다려야 하냐, 다음 주에 검사를 하기로 했는데 오늘 온 김에 하면 안 되겠냐, 혈압을 잘 못 잰 거 같은데 다시 재달라……. 환자와 보호자의 민원은 끊임이 없다. 그러나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모든 짜증에 간호사 선생님들은 놀랍도록 부드럽게 대응하고 계셨다. 단어, 말투, 목소리 하나하나가 혹여 환자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을까 하는 세심한 배려가 묻어난다.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 걸까.
“아휴, 내가 애도 아니고 알아서 먹지.” 붙잡고 있어야 할 말을 놓치는 순간이다. 다음 숟가락을 뜨며 괜한 말에 후회가 되었다. 세상 어느 누가 남은 청포묵 하나를 남이 먹는 그릇에 부을 수 있을까. 어머니니까 할 수 있는 일이다. 작은 밥상인데도 반찬 그릇을 옮겨 자식 앞에 놔주는 게 어머니의 마음이다. “나도 팔이 닿는데”라며 짜증을 내도 빙긋 웃는 게 어머니의 마음이다. “어머님이 청포묵을 좋아하시나 봐요. 넉넉히 담았어요.” 식당 아주머니는 더 큰 그릇에 듬뿍 담아 내오셨다.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 얼른 청포묵을 연달아 입에 넣었다.
대학생 딸이 오늘 아침 동해로 1박 여행을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기차 시간이 늦었다며 아침밥도 대충대충 먹고 짐을 싼다. 짐을 금방 싸는 걸 보니 정말 간단한 여행인가 보다. 아무리 간단해도 집 떠나서 하루 자고 오는 건데 손이라도 흔들어 주려고 문밖을 나갔다. “요즘 독감이 유행인데 마스크 잘 쓰고 다녀.” 또 잔소리가 튀어나온다. 재밌게 보내고 오라는 말을 먼저 해야 했나? 무슨 말이 더 나올 것 같았는지 딸은 얼른 자리를 떴다.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짜증을 잘 붙잡았나 보다. 나보다 낫다. 부모는 걱정을, 자식은 짜증을. 이 두 가지는 늘 기찻길처럼 평행선을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