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나무로 빚는 에세이
무작정 우회전을 했다. 에어컨을 틀긴 했지만, 한여름 차창 밖에서 들어오는 태양은 피부를 깊숙이 파고들 듯 따가웠다. 누군가 플래시를 갑자기 들이댄 것처럼 눈이 부시기도 했다. 마침 마트 옆을 지나가고 있었으니, 피서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툭 올라왔다. 특별히 살 것도 없었고, 별다른 계획도 없었다.
줄줄이 이어지는 일정을 다 소화하고 난 이후에는 갑자기 텅 빈 느낌이 몰려오곤 한다. 한바탕 일을 모두 마쳤으니 얼마나 편한가, 하고 마음을 내려놓아도 될법한데 어쩐 일인지 이 방 저 방 다니며 기웃거리거나, 누구랑 수다라도 떨어볼 양으로 핸드폰을 열어 주소록을 스크롤 한다. 물론 종종 역습을 받는다. “여보세요? 어, 나 지금 엄청 바쁘니까 이따가 전화할게.” “오랜만이네. 무슨 일 있어? 심심하다고? 야, 내가 뭐 심심풀이 땅콩이냐?” “여보세요? 잘 지내고 있지? 그래, 한번 봐야지. 그런데 어쩌지? 내가 지금 출장 중인데.”
세상은 확실히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긴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과도 시간 맞추기가 어려운 판에…. 사춘기 중학생은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대학생 딸은 세상 구경하러 다니기에 바쁘고,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하는 아내의 불규칙한 스케줄에 내 시간을 끼워 넣기는 더 어렵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오랜만에 전화한 친구에게 “너는 시간이 많아서 좋겠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내가 한가한 사람은 아닌데 말이다. 그러다 우연히 시간이 되는 사람을 찾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엄청난 속도로 우주를 날고 있는 지구 속에서 계획도 없이 갑자기 커피 한잔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누구나 그런 로망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무작정 찾아갈 수 있는 친구, 무작정 가면 늘 속마음을 꺼내 보여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 하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로망은 참으로 자기중심적이다.
행운이란 매번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이번엔 이도 저도 말고 무작정 우회전을 해본다. 계획이 갑자기 무계획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특히 공간의 변화라면 어떤 결과가 펼쳐질지 소심한 기대를 해 봐도 좋다. 마트 주차장은 한산했다. 평일 대낮, 이 시간대 마트 풍경은 흥미롭다. 이곳이 직장인 사람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산만한 카트에 물건을 싣고 옮기고 있었다. 하지만 장바구니를 든 손님들은 느릿느릿 여유롭다. 사냥하듯 재빨리 물건을 담는 사람도 없고, 반짝 세일에 줄 서는 풍경도 없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여유롭게 이 물건 저 물건 구경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장바구니는 무거워지고 지갑은 가벼워지는 쓴맛을 봐야 한다. 그래서 매장에 들어가기 전에 원칙을 하나 세워 보았다. “30프로 이상 세일 하지 않으면 절대 담지 않기. 조건에 맞는 게 없으면 더위 피한 것으로 만족할 것.”
없을 리가 없다. “1+1” 행사를 하는 비빔장이 눈에 띄었다. 집에 쌓여 있는 사리면이 생각났다. 사리면을 삶아 비빔장으로 비벼 먹으면 맛있겠다. “1+1”이니 50프로나 마찬가지. 두 개를 꺼내 장바구니에 담는다. 그 옆에 스파게티 소스는 두 개 사면 20프로 할인이란다. 이건 자동 탈락이다. 그다음에 있는 라면 코너. 두 봉지 사면 30프로 할인이라고 쓰여 있었다. 비록 두 봉지를 사야 하긴 하지만 이 녀석은 합격이다. 라면에 일가견이 있는 아들이 좋아하는 종류니까.
천천히 고기 코너 쪽으로 가보았다. 특별히 세일 기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정상 가격이 붙어 있었다. 여기는 통과해야겠다.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걸어가려고 하는데, 직원 한 분이 내게 말을 걸었다. “손님, 이거 30프로에 가져가세요.” 의아해하는 내 눈빛에 그녀는 설명을 덧붙였다. “불고기용 앞다리에요. 오늘 아침 나온 건데 요거 딱 하나 남았어요.” “아, 감사합니다.” 거부할 이유가 없다. 직원은 할인된 가격표를 새로 붙여주면서 맛있게 드시라며 친절까지 담아주셨다. 아마 이분은 멀리서 나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손님도 별로 없는 큰 매장에서 반바지 차림에 파란색 모자를 쓴 사람이 여기저기 둘러보며 두리번거리고 있었으니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했을 것이다. 그런 내가 마침 고기 코너에 왔으니 응당 뭐라도 담을 줄 알았는데…. 어라, 그냥 지나간다? 30프로는 계획된 숫자였을까? 아니면 충동적으로 나온 말이었을까. 판매 경력 10년 이상의 노련하신 분인 듯했다. 그러니 아마 계획된 숫자였을 거라며 나는 슬며시 웃고는 채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여름이라 채솟값은 저렴했다. 하지만 아무리 저렴해도 원칙을 잊을 수는 없다. 마침 저쪽에 빨간딱지가 보였다. 40%. 보통 채소는 며칠 지나면 물러져서 마트에서는 경계에 있는 채소에 빨간색 할인 딱지를 붙이는 것 같다. 신선함이 생명인 채소는 웬만하면 딱지가 없는 걸 고르는 편이다. 그런데 이 봉지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전부 40프로가 붙었다. 자세히 보니 금방 판매대에 나온 듯 신선하다. 이름하여 참나물. 내가 좋아하는 닭요리 전문점에 가면 늘 나오는 반찬이다. 며칠 전에도 그곳에서 닭백숙을 먹으며 참나물무침을 세 번이나 리필해 먹었다. 느끼한 맛을 이렇게 깔끔하게 잡아주다니. 배보다 배꼽이라고, 그 집을 닭집이 아닌 참나물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이번 기회에 나도 참나물을 무쳐볼까. 좋은 선택이다. 맞은 편에 있는 방울토마토도 담았다. 여기도 기분 좋게 “1+1” 행사를 하고 있었다.
여행하듯 마트를 천천히 돌고 나니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원칙을 지킨, 무작정 우회전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각종 먹거리를 잔뜩 구경하고 나온 탓인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출출하다. 비빔장, 라면, 돼지고기 앞다릿살, 참나물, 방울토마토…. 차 안에서 나는 저녁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고는 은근히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요리법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계획적인 요리’와 ‘무작정 요리’ 정도가 될 것이다. 그냥 내가 붙인 말이다. 전통적인 요리 프로그램을 보면 대부분 계획적인 요리다. 무엇을 만들지 먼저 정하고, 필요한 재료를 준비한 다음, 순서에 맞춰 조리해 간다. 무작정 요리는 순서가 반대이다. 있는 재료를 먼저 보고 재료에 맞춰 즉흥적으로 만들다 보면 뭐라도 먹을 게 하나쯤 나오는 식이다. 굳이 창의적인 음식이라고 한다면 후자 쪽이겠다. 실패할 확률은 높지만, 결말을 알 수 없는 스토리처럼 흥미진진하다. 이런 요리 스토리를 잘 짜는 사람이 있다.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요리 프로그램에 고정 패널로 나오는 김풍 작가이다. 남의 집 냉장고를 뒤져 나오는 재료로 즉석에서 요리하는 경연 프로그램이다. 처음엔 웹툰 작가로 이름을 알린 김풍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일약 스타 셰프가 되었다. 그야말로 무작정 요리의 대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그의 요리는 매번 내로라하는 상대 셰프를 제압하면서 재미를 줬다.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성공 확률까지 높다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자, 이제 김풍의 기발한 요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저녁 밥상을 차려 본다. 돼지고기 앞다릿살을 듬성듬성 자른 후 팬에 넣는다. 고기가 익어가며 생긴 물기는 제거한다. 이제 비빔장을 쓸 차례. 큰 스푼 가득 담아 네 번 투하했다. 골고루 섞었는데 양념이 조금 모자란 느낌이 들어 냉장고에서 고추장을 꺼내 한 스푼 떠 넣었다. 정량은 없다. 대충 눈대중으로 한다. 고기가 익을 동안 양파와 파를 썰고, 베란다에 있는 매실청도 적당히 떠 왔다. 고기가 익었다 싶으면 채소와 매실청을 넣고 볶다가 고춧가루와 볶은 참깨를 솔솔 뿌려 마무리한다. 제육볶음 완성. 비빔장이 한몫 단단히 했다.
이번에는 참나물무침을 해본다. 참나물을 잘라 물에 씻으니 코 밑으로 올라오는 향이 너무나 진하고 신선하다. 닭집에서 먹었던 맛을 떠올리며 양념 재료를 생각해 봤다. 참나물의 맛을 한껏 살려주는 참기름, 새콤달콤한 맛을 내주는 식초와 설탕, 그리고 매실청. 마지막으로 빨간 고춧가루를 넣고 버무려 주니 색도 예쁘다. 마침 방울토마토도 사 왔으니 넣어 보자.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고 반을 잘라 적당히 넣어 섞었다. 참나물토마토무침 완성. 이런 초록색과 빨간색의 조화라니, 보는 눈이 즐겁다.
이 정도면 오늘 무작정 우회전은 꽤 성공적이다. 세상은 내가 알 수 없는, 정교하고 세밀한 원칙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그래서 어떤 물리학자는 세상엔 우연이란 없다고 말하지만, 나의 거친 인식 수준에서는 계획하지 않은 우연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까 싶다. 그러니 계획과 무계획, 삶의 이 두 바퀴 중에서 나는 무계획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제육볶음에 참나물토마토무침. 환상적인 조합은 늘 우연에서 만들어지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