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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배송을 떠나는 사람들>

(feat. 오멜라스, BTS)

1.

어제 단골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주문했다. 야간배송주문 옵션이 생겨 있었다. 얼마 전 오전에 주문하면 당일 저녁 받아볼 수 있는 옵션도 생겼는데, 정작 받아보는 것은 다음 날인 경우가 허다했다.


경험치를 대입하니 "옵션 선택시 '내일 아침 눈 뜨면 문 앞에' 있진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퇴근 후엔 도착해 있겠다?" 싶어 주문을 완료했다.


눈 뜨고 보니 배송이 와 있었다. 배송완료 시간을 보니 새벽 2:45분쯤이었다.



2.

마음이 불편했다.


이걸 이렇게 빨리 받아볼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도대체 어디까지 빨라지길 원하는 걸까?


주문하면 1분도 안 걸려 수도관을 통해 수도가 공급되듯 택배관을 통해 택배가 집안 천장 어딘가에서 '퐁' 하고 떨어질 때까지? 혹은 우주 최초 '양자'배송 기술이 개발되어 [구매] 버튼을 클릭하는 순간 집 안 송신기에서 양자조립으로 물건이 나오는 순간까지?


차라리 저런 방식이면 괜찮을 것 같다. 사람을 갈아넣는 시스템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자리는 사라지겠지만 이라는 단점이 있긴 하다)



3.

눈 뜨고 일어나면 도착해있는 배송 서비스, 'ㅇㅇ배송'에 붙는 명칭은 다 제각각이지만, 본질은 '야간'이다. 무슨 말로 포장해도 야간이다. 야간이라 함은 남들 자는 시간에 일해야 함을 말한다. 야근이 아니다.


사전에서는: '해가 진 뒤부터 먼동이 트기 전까지의 동안.' 이라 정의하고 있으며, 반댓말은 '주간'이다.



4.

남들 자는 시간에 1달이라도 일해본 적 있는가? 나는 딱 한 달 있다. 대학 첫 학기에 야간 편의점 알바를 했다. 8시에 인수인계하고 출발해서 학교를 갔다. 그때는 정말 집이 어려워서 그렇게 해서 생활비를 벌어서 썼다. (등록금을 벌어 쓰는 것은 불가능했음)


잠은 틈틈이 잤다. 등하교 버스에서 자고, 재미없는 수업에서 자고, 공강시간에 자고, 귀가 후 일하러 나가기 전까지 자고. 8시간 풀로 자는 건 못했어도 다 합쳐서 8시간은 잤을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도 아니고, 편의점 야간이란 것이 과로하는 업무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신체적으로 건강할 때였는데도 보름이 넘어가면서부터 정상 상태를 잃어갔다. 수십만년 동안 형성되온 인간으로서의 생체리듬은 내 상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배송경쟁이 심화되고 서비스를 누리면 누릴수록, 이 일을 하며 갈려나가다 못해 죽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를 찌르기 시작했다.



5.

신선식품의 경우 전날 저녁에 주문하고 다음날 아침에 받아볼 수 있는 것은 중요할 수 있다. 책도 급하게 내일 아침부터 필요한데 주변에 서점이 없거나, 서점은 있어도 재고가 없다면 유용할 수 있겠다. 혹은 야근 배송이 되는만큼 택배기사님에게 그만한 댓가가 돌아간다면 그것도 괜찮을 수 있겠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 택배업의 처우를 보아 그럴 확률은 희박하다. 고객인 내가 이 배송옵션을 선택하며 지불한 추가금이 없기에 이 심증은 더욱 굳어져간다. 하물며 오늘 책은 당장 오늘 아침부터 필요한 책이 아니었다.



6.

꽤 많이 전해져서 이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소설이 있다.


오멜라스라는 도시 지하에 한 아이가 고통받고 있는데, 이 아이만 고통받으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기에 다들 알면서 외면한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쯤 그 사실을 다 '듣게' 되지만, 다수가 행복하기 위해 '한 명만' 희생되면 되니까 더 알려고 하지 않는다.


고통받는 모습을 알려고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실제 현장을 봐버린 사람들 중에서는, 도저히 마음이 좋지 못해 그 도시를 떠난다는 내용이다.



7.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오멜라스 중에 하나가 택배현장인 것 같다.


착한 척 할 생각은 없다. 많이 써왔고 편하다고 느꼈고 앞으로도 정말 당장 아침부터 급하게 손에 쥐어야만 하는 책이 있다면 이 서비스를 이용할 것이다.


하지만 최대한 그럴 일이 없게 미리미리 준비할 것이다. 왠만하면 이 옵션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느린 배송' 서비스를 시행하는 업체가 있다면 그곳을 이용할 것이고, '공정 배송' 옵션이 있어서 야간에 배송하는 건에 대해서는 충분한 수당이 지급되고 있다면 그것을 선택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착한 척은 하지 말아야겠다. 공정 배송 옵션이 있는데 고객 부담으로 지급된다면 그때는 자신없다.

한 달에 한두번 주문하는 거면 모르겠는데 2천원씩 열번만 되도 2만원이니까.


그래도 사람을 갈아서 만들어지는 내 편의에 익숙하지 않아지도록, 저항선은 만들어놔야겠다.



8.

아예 야간배송 시리즈 옵션이 사라지는 세상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있으면 더 편하다고 느끼는 것이지, 느려지면 느려진대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으니까.



9.

아까 했던 질문을 다시 던져보며 글을 마친다.


"이걸 이렇게 빨리 받아볼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도대체 어디까지 빨라지길 원하는 걸까?"


-


추가로 두 개의 질문을 더한다.


"얼마나 빨라져야 만족할텐가?"

"사람은 갈아넣어져도 상관 없는가?"



(사족)

나머지 모든 사람에겐 천국일지라도, 내가 고통받는 그 한 사람이라면 "이따위 세상 철저하게 멸망되어도 아무 상관없는, 아니 그렇게 되길 영혼 깊이 바라는" 지옥일 수밖에 없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고통받는 사람 입장에선 족까는 소리다.


이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의 삶도 불안해진다.


정말 심성이 착한 사람은 자신을 괴롭힌다. 나아가 자신을 죽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타인을 괴롭히고 타인을 죽인다. 그런 식으로 일어나는 범죄는 그 사람만의 몫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달라붙어 그런 류의 범죄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고 실행해야 한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8307497&memberNo=4226828




고자아님 공자인 공짜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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