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날 밤, 나는 사진 6장을 고르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다. 다음날이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앞에서 직접 찍은 사진으로 자기소개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규모가 큰 것도 아니고 참석한 사람 모두가 발표를 하는 자리였지만, 나는 모임이 처음일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 오랜만이라 아무래도 긴장이 됐다. 생각도 잠시, 숨을 크게 내쉬고 그동안 찍은 사진이 담긴 폴더를 열었다.
화면에는 평소에 좋아하거나 스스로 잘 찍었다고 생각하던 사진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나를 소개할 수 있는 사진은 생각해본 적도 없던 터라 고르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3시간쯤 지났을까. 모든 목록을 몇 번이나 훑고 또 거른 뒤에야 나는 비로소 6장의 사진을 고를 수 있었다. 발표 연습까지 마쳤을 땐, 시계는 이미 자정을 넘어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나는 스스로에게 고생했다고 이야기하는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크게 기지개를 켠 뒤, 벌떡 일어나 불을 껐다. 빛이 사라지니 달빛이 서린 어둠이 창을 넘어 방으로 들어왔다. 지친 몸은 푹신한 침대를 향해 쓰러졌고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나 피곤한데도 기분이 좋은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잠이 들었다. 꿈도 없이 잠든 밤이었다.
다음날 오후, 참석자들은 커다랗고 반질반질한 원형 나무 탁자에 둘러앉았다. 다들 힐끔 돌아보며 서로를 확인하는 눈치였다. 간간이 옆자리에 앉은 참석자에게 조용히 말을 거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앉아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얼굴 전체에 어색함이 감돌았다. 정각이 되자 주최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간단한 인사를 마치자 곧바로 자기소개가 시작됐다. 사람들은 발표자에게 집중했다. 나 역시 어제 했던 고민만큼이나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어 집중해서 들었다. 그러다 발표와 발표 사이에 시간이 날 때면 머릿속으로 곧 있을 내 발표 내용을 되짚었다. 마침내 차례가 왔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발표를 시작했다.
내가 고른 6장의 사진, 분명 어젯밤부터 발표 직전까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생각한 사진들이었다. 하지만 긴장한 탓인지 머리에서 입으로 옮겨간 생각은 새삼스러웠다. 때문에 내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 자신에게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발표에 집중하려 했지만 입 밖으로 나온 선명한 말들이 집착하듯 벽을 타고 다시 되돌아와 귀에 박혔다. 마치 나에게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시선은 갈 곳을 잃고 흰 벽만 이리저리 훑었다. 그렇게 발표는 끝났고 나도 내 발표를 끝까지 들었다. 발표 후에도 내가 뱉은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다른 사람들의 사진과는 다르게, 내 사진에는 혼자 있는 사람이 전부였다. ‘혼자’를 찍고 있었던 거다.
#2
어린 시절, 밤에 혼자 자는 것이 무서웠던 이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둠을 두려운 상상으로 채웠기 때문이다. 정작 두려운 것은 내 머릿속에 있음에도 끊임없이 어둠을 탓하며 빛이 비치기를 바랐다. 그래도 견딜 수 없을 땐, 부모님 방으로 쪼르르 달려가 좁은 침대를 비집고 들어갔다.
#3
사진모임을 할 때보다도 몇 년 전쯤의 이야기다. 삶이라는 이유로 혼자가 되는 순간은 찾아왔다. 그 순간은 어떻게 왔는지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주 혼자가 되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사실이 내 상황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세상과 나는 이렇듯 머나먼 거리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은 매우 작다는 것을 알기에 저항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그저 익숙해지기를 바랐고 어쩌면 나는 그때 정말로 무너져 내렸는지도 모른다.
혼자가 돼 버린 세상은 밤처럼 어두웠다. 밤은 꽤 길었고 나는 그 밤이 무서워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매일을 지나치듯 살았다.
#4
사소한 것에도 생각이 많아지다 보니, 걷는 날이 잦았다. 걸으면서 특별히 무언가를 하거나 생각을 덜어내려 노력한 것은 아니다. 그저 걸으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좀 나아졌다. 주로 집 근처 산책로를 걸었고 가끔은 똑같은 풍경이 지루해 여행을 가기도 했다. 사진을 좋아해서 여행을 갈 때에는 꼭 카메라를 챙겼다. 디지털카메라도 있었지만, 그럴 때면 꼭 필름 카메라를 챙겼다. 아무 때나 셔터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마음에 드는 순간에 카메라를 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혼자’를 찍은 건 아마 그때부터였다. 의도한 건 아니고 단지 혼자인 그들이 익숙하고 편했다. 홀로 아침 장사를 준비하는 점원, 공항에서 외롭게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 나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풍경까지. 그들은 조용했지만, 어쩐지 아무 말도 건네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말을 했다. 같은 아픔을 가진 것들의 위로일지도 모르는 침묵. 나는 그들이 혼자 일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하염없이 그 침묵을 들었다. 그러다 정말로 그들이 혼자인 순간이라고 느껴질 때, 가만히 숨을 멈추고 셔터를 눌렀다. ‘찰칵!’ 소리가 크지 않아 다행이었다.
#5
발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탔다. 버스는 한산했고 나는 중간쯤에 앉았다. 창 밖으로 하얀 가로등이 하나씩 눈 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지난날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돌아보면 사실 혼자인 것을 본 일은 수두룩했다. 혼자 밥을 먹던 같은 반 친구, 길에서 만난 외톨이 고양이, 혼자 서있는 나무까지. 그러나 그것에 대해 고민해본 적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외면했다. 나는 늘 누군가와 함께라고 생각했고 또 그러기를 바랐으니까. 그랬던 내가 혼자가 되어버리자, 어느새 혼자인 것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흔적들은 변명조차 무색하게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발표를 하던 그 날, 어쩌면 나는 한참을 외면했던 ‘나’를 사진을 통해 마치 새로운 듯이 봤는지도 모른다.
#6
그리고 지금, 어느덧 혼자가 익숙한 나이가 됐다. 어둠이 무섭다고 도망칠 수 없는 나이. 단단해 본 적 없는 살에 몇 번이고 난 상처는 아물어 굳은살이 됐다. 알고 보면, 아침 장사를 준비하며 홀로 식탁보를 정리하는 점원은 콧노래를 불렀고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여자는 혼자가 편해 보였다. 나는 여태 무엇을 보고 혼자가 슬프다고 생각했을까? 어쩌면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아니,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대신 오만한 상상으로 지레짐작했다. 혼자는 그래서 무서웠다.
이제야 두 눈 부릅뜨고 세상을 본다. 혼자가 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게 콧노래를 부르기 위해,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을 편하게 보내기 위해,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생각하기 위해 필요했다.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혼자가 될 수 있으며 여전히 혼자인 것을 본다. 혼자는 괜찮다. 그래서 필요하다.
photo by Dohyun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