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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로미의 김정훈 Apr 15. 2024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한 번은 공자가 장자의 스승인 노자를 만나러 왔다. 공자는 형식적인 예절의 상징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형식주의자였다. (...) 그런 그가 정반대의 극, 노자를 만나러 온 것이다. (...) 


공자는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종교적인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노자가 말했다. 

"어떻게가 있을 때 그곳에 종교는 없다. 어떻게는 종교적인 사람에 대한 물음이 아니다. 어떻게는 그대가 종교적이지 않다는 것을, 다만 종교적인 사람처럼 행동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는 다만 사랑할 뿐이다. 나중에서야 그는 자신이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오로지 사랑이 가버렸을 때뿐이다. 그는 그냥 사랑할 뿐이다. 그 일이 일어날 뿐이다. 일어나는 것이지 행하는 것이 아니다. 


- <삶의 길 흰 구름의 길> 中



몇 년 전만 해도 꽤나 유행했던 농담이 있었다. '사는 법도 못 배우고 태어났다.' 하지만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들은 사는 법을 묻지 않는다. 삶이 베베 꼬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사람만이 사는 법을 묻는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절망했던 지난날이었다. 나는 내 천직이 찾아오는 그 순간이 인생의 시작점이라 믿었다.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 깨달은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평생 삶의 결정적 순간을 찍으려 발버둥 쳤으나,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인간은 습관의 집합체라고 불린다. 일상의 95% 이상이 습관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나는 운동이 습관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매일 1시간 이상 운동을 했다. '왜', '어떻게'라는 건 없었다. 그런데 가끔 지인들이 어떻게 매일 운동을 하냐는 질문을 했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게, 나는 어떻게 매일 운동하지? 왜 운동을 하지?' 자꾸만 스스로에게 매일 운동하는 이유와 방법을 묻다 보니 습관이 사라져 있었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여우가 지네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그 많은 발들을 다루는가? 한 발 다음에 어느 발이 뒤따라야 하는가를 어떻게 아는가? 백 개의 다리라니? 그런데도 넌 매우 자연스럽게 걷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다. 과연 어떻게 이런 조화가 일어날 수 있는가?"


지네가 말했다. 

"난 나의 온 생애 동안 걸어다녔다. 그러나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내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 

지네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 그는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어려웠고, 거의 불가능했다. 지네는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백 개의 다리를 어떻게 다루는가하는 질문 때문이었다. 


세계적인 인간 행동 연구 전문가 웬디 우드는 이미 자신의 저서 <해빗>에서 습관에 대한 지혜로운 통찰을 내보였다. 습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목표나 목적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저 '자극'이 오면 바로 습관처럼 행한다. 예를 들면, 매일 달리는 운동장을 걷고 있으면 갑자기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매일 아침 듣는 알람이 저녁에 울리면 마치 아침에 일어나는 것처럼 짜증을 느끼는 것과 같다. 


습관처럼 행하는 사람은, '아, 오늘도 열심히 살을 빼기 위해 운동해야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운동을 하러 가는 게 아니다. '이렇게 해야 매일 운동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면서 방식을 정해놓지 않는다. 모두는 그들 나름의 신호탄만 있을 뿐이다. 웬디 우드는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습관은 목표에 집착하느라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리고 습관에 관해 이렇게 결론짓는다. 

"습관은 결코 애쓰지 않는다." 


반대로 습관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 애쓰는 사람들은 항상 '목표'나 '태도'를 운운한다. 그런데 습관처럼 행하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당신의 목표가 무엇이오.'라거나 목표와 방법을 물으면 지네처럼 비틀거리며 넘어진다. 




목표 없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목표 없이 사는 법'이랄게 존재할까? 아니다. 오히려 '목표를 가지고 사는 법' 만큼은 형식이 정해져 있다. 공자처럼 '어떻게'를 따지고 들고 '태도'를 운운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하지만 '어떻게'가 있을 때 그곳에 삶은 없다. 우리 모두 어떤 일이나 사람에 진심으로 사랑에 빠져 몰입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사랑에 빠져야 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냥 사랑할 뿐이다. 이런 사건은 우리가 행하는 게 아니라, 일어나는 것이다. 목표 없이 사는 사람은 애쓰지 않는다. 


우리가 애쓰면서 사는 이유는 자꾸만 목표를 생각하고 계획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애쓰는 이유는 자꾸만 태도와 원칙,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목표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목표를 가지고 사는 법을 잊는 법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메커니즘을 하나씩 놓아버릴 때 조금씩 목표 없이 사는 법을 알게 된다. 아니, 잊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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