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막막할 때 가장 먼저 찾는 것은 뭘까? 아마 도움의 손길 혹은 하늘에서 '툭'하고 떨어지는 천직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길러져 왔다. ‘뭘 해야 할지 알려줄 테니까 너는 하라는 걸 그냥 열심히 하기만 해’라는 교육 방식으로 길러져 왔다. 이런 교육에서 자란 성인들은 시간이 지나서도 ‘누군가 나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준다면 나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할 준비가 되어 있어’라는 생각을 한다. 다른 말로 누군가가 나 대신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해달라는 무의식적인 습관이다. 이런 무의식적인 생각의 배경은 다름 아닌 우리가 받아온 교육에 있다.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교육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는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고등학교 교육을 투박하고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줄 테니 너는 불만 갖지 말고 하기만 해.’라고 할 수 있다. 학생들이 무슨 공부를 해야 할지는 이미 다 정해져 있다. 심지어 무슨 문제를 풀어야 할지에 대한 문제 유형도 정해져 있다. 학생이 고를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학습지나 학원, 공부법 정도가 아닐까.
국어 과목에서 문학 지문을 풀더라도 답을 맞히는 핵심은 문학 감상이 아니다. 이 지문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 다섯 가지 선택지 중에서 하나만 골라야 한다. 절대 내 생각을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인정할법한’ 감상을 고르는 것이 답을 맞히는 핵심이다. 역사나 수학, 과학 등 어떤 교과서를 읽더라도 왜 이 개념이나 사실들을 공부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단지 이런 개념이 있고 이 개념은 시험에 나온다는 정도만 알 뿐이다.
수학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자신 있는 대한민국 고등학생이지만, 학생들은 가끔 수학을 잘 모르는데도 행복하게 사는 어른들을 볼 때마다 복잡한 생각이 든다. 게다가 우리나라 고등학생이 전 세계적으로 수학을 잘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접해 봤지만 과연 어른의 세계에서 역시 대한민국이 수학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가 하면 그것 역시 무수한 물음표로 남는다.
왜 우리는 이런 교육을 받고 있을까? 이미 몇 년 전에 대한민국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는 이렇게 통찰했다. “한국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교육이 정반대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학생들은 하루 10시간 이상을 학교와 학원에서 자신들이 살아갈 미래에 필요하지 않을 지식을 배우기 위해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는 직업을 위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아침 일찍 시작해 밤늦게 끝나는 지금 한국의 교육제도는 산업화 시대의 인력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 대한민국의 고등학생 그리고 대학생은 산업화 시대의 인력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있다. 다만 그 의도는 알아주어도 그 의도에 따라 생겨난 교육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 어떤 학생도 알 방법이 없다. 출제자의 의도에 맞는 답만을 골라야 하는 교육은 마치 산업화 시대의 인력이 ‘까라면 까’야 하는 인력인 것처럼만 보인다. 만약 그런 의도에서 생긴 교육이라면 지금의 교육은 그야말로 완벽한 교육법이다.
따라서 고등학생들은 공부를 억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으며 공부에 혐오감을 느낀다. 아무리 자발적이고 주도적으로 공부를 하는 학생이라 해도 막상 성인이 되면 “앞으로 뭘 해야 하지?”라는 질문에 허덕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당연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악착같이 해온 공부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대한 판단 능력을 길러 주는 교육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취업 전선에서 대학교 간판은 ‘하기 싫은 공부를 얼마나 꾸역꾸역 밤을 새워가면서 열심히 했느냐’의 지표가 된다. 따라서 학생들은 인정받고 가능성을 넓힐 수 있는 ‘좋은' 대학교에 가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사람들은 간판 한 줄만 보고 ‘얘는 열심히 하지 않는 애.’ 혹은 ‘얘는 시키면 말 안 들을 애’로 낙인찍는다. 학생들은 자신의 피나는 과정이 모조리 무시 받고 무너지는 꼴을 보기 싫어서라도 될 때까지 도전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학생들은 점점 공부를 시작한 진짜 목적은 잊고 어느새 경쟁에만 몰두하게 된다.
‘성인이 되기 전에 다양한 직업을 경험해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좋지 않을까’하는 어른들의 의견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역시 어른들의 관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어른들은 지금까지 다양한 가능성을 가질 수 있도록 공부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양한 가능성을 맛볼 수 있게 교육을 바꾸라고 하고 있다.
물론 좋은 마음에서 비롯된 의견이다. 또 이미 어떤 직업과 가치관이 자리 잡은 어른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경험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다양하고 얕은 경험은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시식 코너에 불과하다.
다양한 경험을 누리도록 하는 체험은 생각보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학생들이 직업을 결정할 때 도움을 주고자 교육을 바꾼다면 다양한 경험을 하는 방식을 키우고 가능성을 넓히는 게임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는 훈련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활용해 그 질문에 대답해 나가는 시간을 더 늘려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스스로 다양한 경험을 누려보고 가치관을 탐색해보고자 노력하는 자발성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다양하고 얕은 경험이 아니다. 다양하지만 얕은 경험은 학생을 더 우유부단하게 만든다. 그보다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고자 하는 자발성을 길러 주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교육과 다양한 직업의 경험 그 자체만으로는 그 자발성을 길러주지 못한다. 다양한 직업의 경험은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렇게 열심히 달려와 도착한 대학교의 교육은 어떠한가? 대학교는 그야말로 산업화 시대의 인력을 만들어 내기 위한 교육의 대명사다. 대학교의 교육은 취업을 중심으로 커리큘럼이 맞춰진다. 취업률로 대학을 평가한다.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지, 취업은 했는지에 따라 학생을 평가한다.
대학교 강의의 현재는 어디쯤에 있는가. 중등교육을 마친 학생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해보고 싶은 공부가 있어서 대학교에 왔을까? 학문에 호기심이 있어서 다음 교육기관을 찾았을까? 그렇다면 학생들은 호기심 넘치는 질문을 하는가? 그 누구도 질문하지 않는다.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 왜냐하면 질문이 없기 때문이다.
질문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어렸을 때 항상 질문을 던졌다. 모든 게 새로운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모두 물어본다.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종종 어른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렇게 질문이 많았던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서 점점 질문을 잃는다. ‘그런 걸 왜 물어?’라는 말을 점점 들을수록 아이들은 의기소침해지고 다시는 마음이 아프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질문하지 않는다.
묻지 않고 따르는 복종의 습관이 있는 일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자신의 사고방식을 주입한다. 어린아이들은 점토와 같아서 조금만 충격을 주어도 쉽게 사고방식이 바뀌어 버린다. 그래서 아이들은 점점 질문과 자신만의 의견을 포기하고 잃어버린다. 질문하는 근육, 자신만의 의견을 가지는 근육이 도태된다.
학습의 방식도 문제가 있다. 어린아이일 때 교육은 우리가 질문한 것을 토대로 대답을 알아가는 방식의 학습이었다면 시간이 갈수록 이미 정해져 있는 답을 이해하고 외우는 방식의 학습이 주를 이룬다. 따라서 학생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궁금한 게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호기심을 가지고 시작한 공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기를 쓰고 궁금해하지 않는 이상 질문이 생기지 않는다.
어른들은 질문하지 않는 학생을 나무라지만 과연 그럴까? 현재 대학교에 개설된 많은 강의는 교수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질문이 생긴다면 내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생기는 질문 외에 별다른 질문이 없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질문하면 ‘나는 교수님이 말해준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인데, 나를 위해서 같이 듣고 있는 모든 학생의 시간을 버려가면서까지 다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가 되어버린다. 남들의 눈치를 모두 이겨내고 나의 무지를 드러낼 수 있는 용감함까지 감수해야 하니 질문을 할 수가 없다. 이런 게 현실이니 강의가 끝나고 질문을 하는 학생은 생각보다 많다. 만약 강의 중에 질문하면 눈치 밥 말아먹은 학생으로 낙인이 찍혀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보통 강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교수님에게 점수 따기는 보너스다.
질문은 누가 하는가? 바로 우리가 배우고 있는 이론들을 정리한 사람들이다. ‘전공’이라는 하나의 학문은 누군가가 궁금해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연구 결과를 적어 놓은 하나의 이론이기 때문에 그 연구를 둘러싼 수많은 이해관계를 알아야 질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왜 이 이론이 탄생했으며 그들이 던진 질문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질문을 던지게 된 배경은 무엇이며 그들이 대답을 내놓기까지의 발자취는 어떠했는지를 알게 되면 질문은 계속해서 터져 나올 것이다. 물론 그 분야에 관심이 있다는 전제에 한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취업을 위해 선택했기 때문에 이론의 배경이 궁금할 틈이 없다. 게다가 교수들은 자신이 말하는 내용을 마치 절대적 진리처럼 가르치기 때문에 그대로 생각하면 정답이고 아니면 오답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따라서 질문이 생길 수가 없다.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학생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교수님의 말 하나하나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받아적는 것이다. 심지어 농담마저도 말이다. 강의에서 절대 ‘왜?’라는 카드는 꺼내 드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왜라는 카드를 꺼낼 때마다 학점은 바닥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다 받아적고 그저 흡수해야 한다. 이는 나의 경험적인 이야기이지만 대학생 모두가 느끼고 있는 공통적인 고민이자 심지어 EBS에서 실제로 서울대학교 학생 중 학점이 4점대가 넘는 학생들을 선발하여 인터뷰한 결과이기도 하다.
대학교 역시 고등학교와 다르지 않았다. 산업화 시대에 맞추어 훌륭하게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인력을 기르는 커리큘럼이다. 대학교에 와서도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는 판단력을 길러주는 교육은 없었다. 대학교는 심지어 고등학교보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어서 모든 책임을 학생에게 묻는다.
학생들은 대학교를 반년만 다녀 보아도 학교가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남은 학기 동안 학교가 나에게 뭘 해줄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학 진학률이 7~80%를 넘어가니 우리나라가 여전히 대학교를 졸업했는지 아닌지에 따라 사람을 구별하는 분위기와 실제 평가시스템이 존재한다는 방증이 될 수 있다. 또한 ‘대학교는 일단 가야 돼’라는 어른들의 가치관이 여전히 학생들에게 주입되고 있다.
재밌는 사실은 원래 대학교는 연구 중심의 기관이 아니었다. 원래의 대학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교육기관이었다. 1800년대에는 말이다. 물론 지금 우리나라 대학의 대부분은 그때 생기지도 않았다. 그럼 우리나라의 대학은 어디서 영향을 받았을까? <어떻게 나답게 살 것인가?>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 남북전쟁이 끝난 뒤 미국 교육계에 연구 중심 대학이 최초로 등장했다. 독일 대학을 모델로 한 연구 대학들의 최우선 과제는 학문 개발이었다. 그런 학문을 활성화하기 위해 고유한 학문 분야가 생기고, 각 학문에는 나름의 엄격하고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이 있었다. 교수들은 이러한 학문 분야 안에서 고도로 전문화된 분야를 연구했으며, 학생들 역시 집중 분야 즉 전공을 선택해 대학 졸업 후 취업을 준비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의미 있게 사는 방법을 교육기관에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을 바꿔놓았다. 교수들은 학생들이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을 찾도록 이끄는 일이 자기 권한과 지식을 벗어난다고 믿었다.”
독일과 미국의 대학 시스템을 가져온 우리나라 대학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본 경험이 거의 없다. 이미 그 시작부터 연구와 학문 개발을 목적으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구를 목적으로 탄생했다는 말이 부끄럽게 독일의 대학 시스템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자본주의 세계에 지배를 받고 있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능동적인 자세를 갖추는 교육을 제공하지 않고 인생 전반에 대한 실존적 고민을 겪는 학생들과 대학을 별개로 생각한다. 몇몇 교수들만이 강의 시간에 조언을 던져줄 뿐이다.
학생들이 자신만의 의견과 통찰을 가지는 과정은 자신이 진정으로 궁금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공부하는 데 있다. 하지만 이미 누군가가 다 정리해놓은 결론을 외우기만 하니 통찰이 생길 수 없다. 이들은 ‘나는 왜 이 공부를 하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데, 학교는 ‘이 개념은 말이다’라고 말한다.
즉 대학생들은 내가 이 전공에서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는 알지만 왜 공부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지루하고 딱딱한 내용들이 무엇을 해결하고자 탄생했는지, 이 전공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은 상황을 로버트스타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교육에서 ‘무엇’과 ‘어떻게’의 결별은 곧 어떤 것을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이 분리되는 결과로 나타난다. 학생들은 이해함으로써 앎에 이르는 게 아니라 외움으로써 알게 된다. 그들의 지식은 실로 허약하며 쓸모없다. 이 교육적 실패의 결과물은 겉만 번지르르한 ‘학문적 성취’의 외장일 뿐이다.”
이런 교육 속에서 자라난 학생들은 졸업장이라는 ‘학문적 성취의 외장’은 있지만 이걸 가지고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허약한 존재로 사회에 덩그러니 놓여진다. 분명히 공부는 했는데 앞으로 뭘 할 수 있는지 막막할 뿐이다. 실제로 현장에 들어가도 무용지물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학생들을 더 초라하게 만든다.
자신이 정말 궁금해서 시작한 공부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진정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공부는 어떤 커리큘럼이나 전공을 뛰어넘기 시작한다. 하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던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분야의 학문을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고 그 이전에 그것을 감당할만한 호기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질문을 기피하는 사고방식을 가졌으며 어떻게 질문을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태도를 연습하지 못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교육은 학생들에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전혀 단서를 주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학생들은 이미 그 교육에 깊이 길들여졌기 때문에 사회에 나가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 사람과 기업을 찾는다.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경제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살아온 길을 무작정 선택한다.
또다시 경쟁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른다. 그 누구보다 더 절실하게 사회의 톱니바퀴가 되기 원한다. 대한민국 학생들은 그 누구보다 산업의 일원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 열심히만 하면 돈도 주고 지위도 준다는 데,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게 해주겠다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기업에서 특히 중요한 자질은 ‘팔로우십’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팔로우십을 훈련받았기 때문에 자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 교육이 팔로우십에 특화된 인재를 기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질문을 던지지 않고 주체성을 가지지 못한 팔로우십은 그저 '복종'에 불과하지 않을까.
우리는 분명 행복하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과제와 시험은 우리를 그 성공이 무엇인지 행복이 정확히 무엇인지 질문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목적은 이미 잊어버리고 눈앞의 놓인 현실만이 남아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나에 대한 이해’와 ‘상황과 일에 대한 판단력’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이해하기 쉽게 질문 형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지금 가진 것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이를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대답을 내릴 수 있는 연습을 지향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은 지금 내가 가진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지적인 판단력을 길러주지 못한다. 남의 통찰을 외우기 바쁘고 언제 쓰일지도 모르는 공부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방황하고 있으며 우리 스스로 능력을 가꿔나가야 한다.
진정한 배움이란 누군가의 대답을 외우는 게 아니라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데에서 시작한다.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호기심이 필요하다. 어떤 주제에 대해 진심으로 궁금한 마음이 들어야 한다. 그리고 대답을 내리기 위해 여러 분야의 공부가 필요하다. 또는 한 가지 분야에 있어 깊은 공부를 필요로 한다. 이렇게 탄생한 이론과 대답들이 지금 대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전공 중 하나의 강의다. 우리는 남들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통찰한 결과물을 고민도 없이 외우고 있다. 따라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는 죽어버린 호기심을 되살리고 먼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해져 왔던 삶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해야 하는 삶에 도착했다. 많은 학생들은 이를 ‘자유’라고 부른다.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어른들 역시 과거에는 사회가 혼란스러웠으며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로 인해 자유롭게 진로를 선택하지 못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자유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어른들도 성인이 되면 자유로울 수 있다고 우리를 유혹했다. 젊은이들의 부모세대는 소위 X세대라 불렸다. 개성파 세대라고 불린 X세대가 주창한 개인주의라는 이념의 꽃은 자유다. 우리는 그런 어른들의 가치관을 배우고 자라왔고 따라서 자유를 꿈꿔왔다. 하지만 막상 자유가 주어지자 우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20대는 자유에 깔려 숨도 못 쉬고 있다.
자유를 갈망해온 학생들이 이제는 세상에 이렇게 소리친다. “내 자유를 가져가도 좋으니 확실한 미래만 주세요!”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그들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