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일러 더든은 편의점으로 들어가 아르바이트 직원을 끌고 나온다. 직원의 이름은 레이몬드. 테일러는 레이몬드를 편의점 뒤편으로 데리고 나와 무릎을 꿇렸다. 레이몬드의 지갑을 빼앗고 머리에 총을 갖다 대며 말한다.
“넌 이제 죽는다. 대학 학생증이라. 뭘 배웠어?”
레이몬드는 벌벌 떨며 처음에 “그냥”이라고 대답하지만 이내 자신이 생물학을 공부했다고 말한다. 왜 생물학을 공부했냐고 테일러가 묻자 레이몬드는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테일러가 반복적으로 무엇을 하고 싶었냐고 협박하듯 묻자 레이몬드는 “수의사. 수의사가 하고 싶었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럼 공부를 더 해야겠네”
레이몬드가 울면서 대답한다. “그건 너무 길어요” 그의 말을 들은 테일러가 총을 더 깊게 들이대며 말한다. “그럼 그냥 여기서 죽을래? 공부보다 편의점 뒤에서 죽는 게 낫다는 거야?” 테일러는 레이몬드에게 6주 안에 수의사 공부를 시작하지 않으면 찾아가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그리고 테일러는 레이몬드에게 집으로 달려가라고 소리친다. 레이몬드는 세상 누구보다 빨리 집으로 도망간다. 레이몬드가 보이지 않자 테일러가 말한다. “내일은 그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이 될거야. 아침 식사도 그 어느 때보다 맛있을걸?”
영화 <파이트클럽>의 한 장면이다. 꿈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잔인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꿈을 일깨워준다. 나는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레이몬드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어땠을까?’라고 말이다. 아마 테일러가 나에게 총을 대고 무엇을 하고 싶었냐고 물었다면 21살의 나는 이렇게 말하다 총을 맞고 죽었을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요!”
지금 세상은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진로가 수만 가지가 넘는 세상이다. 바야흐로 ‘자유’의 시대다. 이전보다 더 많은 선택지를 누리고 있는 ‘축복받은 세대’다. 모든 사회인의 목표는 자유다. 게다가 개인주의로 불리우는 지금 사회의 트렌드는 개개인이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을 할 수 있다고 부추긴다. 꿈이 없는 사람은 바보처럼 느껴진다. 꿈이 있는지 없는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열심히 살아서 당신의 꿈을 쟁취하라고 말한다.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당신의 죄가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것은 당신의 탓이다.’라는 말을 진리로 따르는 사회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바로 그 자유에서 허덕이고 있다. 어른들은 젊은이들이 뭘 해야 할지 감을 잡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렇게 살지 말고 이렇게 살아’라고 조언하지만 ‘그렇게 산다’는 것도 아직 젊은이들에게는 없다.
학생 때는 자유를 위해 달렸다. 성인이 되면 자유를 얻을 것이라 굳게 믿어왔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달랐다. 달콤한 캔디인 줄만 알았던 자유는 사실 그 어떤 것보다 냉혹하고 쓴 한약이었다. 한약이 내 몸에 맞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마시고 있다. 우리는 고생 끝에 자유를 얻었지만 이 자유를 어디에 쓰고 어떻게 쓰는지 전혀 모른다. 주변 친구들과 같은 곳을 바라보며 달려오다가 이제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며 미래를 선택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오자 견딜 수 없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마주한 것이다. 무엇을 할지 고르는 것도 자유, 포기하는 것도 자유였다.
인간은 고독한 것을 참지 못한다. 그리고 자유의 대가는 고독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얻은 수동적 자유의 대가는 고독이다. 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느낌을 받는다. 나만의 싸움이다. 게다가 교육의 허점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허둥지둥 댄다. 젊은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다시 나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줘’라고 외친다. 이들은 자유에 깔려 숨도 쉬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본능이 있다. 그래서 불안한 상태를 회피하려고 한다. 자유는 우리에게 불안을 가져다주었고 끝내 불안감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우리는 모두가 따르는 길에 합류한다. 세속적 성공이라 불리는 그 길이 나의 성공이 맞다고 믿으며 모두가 말하는 바로 그 미래를 향해 달려나간다.
자유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다시 대2병 이야기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대학생이 3학년이 되어서 대2병이 묻히는 이유 중 하나는 자유가 무겁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민해도 나에게 맞는 길을 모르니 일단 남들 다 하는 것을 좇는다. 남들은 이미 다 궤도에 올랐기 때문에 조급해지는 마음은 달랠 수가 없다. 결국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포기하고 사람들이 맞다고 여기거나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길, 누군가 정해준 길을 무작정 따라 간다.
우리가 느끼는 이 사회 보편적인 우울감은 왜 생겨났을까?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은 다음과 같이 통찰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충동과 본능을 ‘반드시 해야 할 일’로 훈육되지 않는다. 그리고 과거와 달리 더 이상 전통이나 전통적 가치의 준수를 요구받지도 않는다. 현대인들은 이런 지향성의 결핍으로,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모를 때가 있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거나(체제순응주의),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을 한다(전체주의).”
어릴 때부터 시작해, 20대에 막 들어선 성인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기 때문에 부모님이나 사회가 기대하는 것을 한다. 사회가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말하자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고연봉의 전문직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고 속삭이자 그럴듯한 전문직을 갖기 위해 로스쿨에 들어가거나 자격증 시험을 준비한다. 공대가 취업이 잘 된다는 말을 들어서 공대에 들어간다. 왜 대학교에 가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재수를 선택한다. 스타트업 열풍이 불었다고 하니 ‘창업이나’ 좀 해볼까하고 생각한다. 머리 아프게 고민할 바에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모두 정해져 있는 공무원을 하겠다고 결심한다.
불안한 상황에 가장 유혹적인 선택지는 가장 안정적이고 명확한 직업이다. 게다가 주변 친구들 모두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면 남들과 다르지도 않겠다, 이건 고민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드디어 나의 위태로움을 끝내줄 최고의 선택이다.
선택하고 보니 그 세계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있다. 드디어 안심한다. 내가 선택한 길을 좇으면 앞으로 어떤 미래가 찾아올지 보여주는 산증인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또한 나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과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소속감에 포근하다. 미래에 대한 불안정성은 이제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다. 드디어 내가 부러워했던 진로가 뚜렷한 사람이 된다.
이런 현상은 보통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에게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어느 정도 경제적인 안정을 보장받고 있는 부모님의 밑에서 자라면서 자녀들 역시 보고 배운 게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쟁 구도를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생각한다. 학생 때부터 경쟁해왔기 때문에 사회에 나가서도 경쟁의 연속이다. 지금껏 남들과 같은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수많은 경쟁자들이 놓인 전쟁터에 익숙하다. 이들은 다른 인력들보다 더 훌륭한 인재라고 자신을 어필한다.
친구에게 말한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친구는 대답한다. “우리는 어쩜 이리도 닮았냐.” 역시 죽이 잘 맞는 친구다. 하지만 그 둘은 같을 수밖에 없다. ‘산업화 시대를 위한 훌륭한 톱니바퀴 1, 2’이기 때문이다.
빅터 프랭클이 말하는 전통적 가치의 준수를 요구한 과거란 무엇일까? 바로 중세 시대다. 중세 시대는 지금과 어떻게 달랐을까?
중세 시대에 태어난 한 인간은 자유롭지 않았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다. 태어나자마자 해야 할 직업은 정해져 있었고 가치관과 종교마저도 그들이 직접 정하지 않았다.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졌다. 태어났을 때 이미 어느 정도 경제적인 지위가 정해지고 죽을 때까지 그 범위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런 그들을 보며 자유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다고 자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미리 정해져 있는 것 내에서 자유로웠다. 우리는 이런 중세 시대를 바라보면서 말한다. ‘이건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잖아!’ 하지만 철학자 에리히 프롬이 말하길 “중세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지 않았다. 그때는 ‘개인’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즐겨 쓰는 개인이라는 개념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중세 시대의 사회 구조는 점점 허물어졌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가 도래했다. 처음으로 그들은 ‘개인’이라는 개념을 창조하고 받아들였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자유를 온전히 누린 계층은 일부 부유층이었다. 경제적으로 불안한 계층은 오히려 그 자유로 인해 안정을 잃었다.
더 이상 전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주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자유다. 지금까지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지만 시대가 바뀌고 나서는 내가 어떤 가치관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스스로 정해야 한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더 이상은 없다. 지금까지는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뒤바뀐 사회는 말한다.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당신의 죄가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것은 당신의 탓이다.’
자유를 맞이한 그 당시의 개인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지금 우리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금방 미래에 대한 불안정과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자신이 하나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외롭지 않았지만 이제 개인을 대변해주는 사회나 그룹은 사라졌다. 그들은 안정감과 소속감을 얻기 위해 남들이 하는 그대로를 따라 하기 시작한다. 사회가 제시한 성공을 좇고, 사회가 제시하는 인간상을 좇는다.
이제 내 옆 친구와 나는 다르지 않다. 너도나도 내 자유를 집어 던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의 한가지 예시가 빅터 프랭클 박사가 말한 ‘전체주의’다. 전체주의는 20세기를 뒤흔들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1900년대 초중반에 전체주의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한 글이 많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자유가 무섭고 냉혹하다는 사실은 자유에 내동댕이쳐진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안다. 그리고 자유를 포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아를 포기하면 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은 자아를 던져 버린다. 자신이 자아를 버린지도 모른 채 그저 꾸역꾸역 살아간다. 그러다 언젠가 이들은 눈치챈다. 나의 성공을 위해 달려왔다고 믿었지만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던 성공이 아니었음을. 완성을 위해 살아온 개인적 커리어의 끝에 완성 대신 공허함만이 남아있음을 눈치챈다. 이를 뒤늦게 깨닫고 다시 자유로 돌아온 이들은 묻는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지만 모두가 용감하게 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이 부정당하는 감정을 느낀 이들은 이 감정을 꽁꽁 묻어둔다. 애써 부정한다. 갑작스럽게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도 우리는 한번 경험한 자유의 무서움을 알기 때문에 애써 무시한다. 다시 자유로 돌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이 일이 남들의 가치관에 따라 선택한 길임을 인정하는 순간 그 무서웠던 자유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자기 자신에게 관대하다. 그런 한편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아 한다. 따라서 내가 자아를 포기했다는 사실은 나를 실망하게 만드는 믿을 수 없는 충격이기 때문에 애써 무시한다. 만약 지금까지 내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견딜 수 없는 회의감에 시달릴 게 뻔하지 않은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인생을 부정당하는 느낌. 그건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자유는 단순히 커리어 세상에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마트에서도 자유를 경험한다. 마트에 가서 과자를 고를 때면 소비자들은 당황스러움을 경치 못한다. 과자 종류는 어찌나 그렇게 많은지 내 입에 꼭 맞는 과자가 무엇인지 찾기도 어렵다. 서점도 마찬가지다. 내가 읽은 책은 없는데 서점은 책이 넘쳐 흐르고 있다. 도대체가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다. 백화점에서 역시 수많은 종류의 옷이 우리를 기다린다. 나에게 맞는 옷이 무엇인지 찾느라 하루가 다 간다. 맛집도 마찬가지다. 메뉴판에 먹고 싶은 음식은 산더미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소비자는 한 가지 음식을 선택한다. 그리고 식당을 나가며 생각한다. “이것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분명히 있었을텐데."
단순하게 생각하면 선택지가 늘어날수록 소비자는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는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긍정적이다. 소비자의 유형은 셀 수 없이 많으므로 만약 선택지를 늘린다면 그 수많은 선택지 중에 하나는 꼭 자신의 것이 있을 터이다. 만족감은 분명히 오르리라.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시장의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소비자의 만족도는 떨어진다. 내가 고른 상품보다 더 나은 상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기대치가 커진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커진다.
맛집에 가더라도 메뉴가 수십 가지인 곳보다 한 가지 메뉴밖에 없는 맛집이 소비자에게 안정감을 준다. 왜냐하면 이 메뉴가 실패면 식당의 실패이고 이 메뉴가 성공이면 손님의 성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십 가지의 메뉴가 있는 맛집에서 만약 한 가지 음식을 정했는데 맛이 없다고 느낀다면 손님은 식당의 탓을 하기보다 내가 고르지 않은 메뉴 중에 진짜 맛있는 메뉴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너무 많은 선택지가 오히려 소비자의 소비 경험을 저하시킨다.
어딘가에 더 좋은 선택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에게 혼란을 가중한다. 이는 미래 설계의 세계, 진로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진로를 선택하더라도 만족스럽지 않다. 지금 하는 일보다 나를 더 가슴 뛰게 할 일이 어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 하는 일은 나에게 고통만 안겨주지만 나에게 꼭 맞는 직업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와 달리 현실은 팍팍하기만 하다. 자유는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자유는 우리를 우유부단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무엇 하나 제대로 고르기도 힘들다. 간신히 하나의 길을 선택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좋은 선택지가 있다며 주변에서 속삭인다. 또다시 선택지를 변경한다.
자유의 무게를 견디는 것은 만만하지 않다. 다시 한 번 대2병으로 예시를 들어보자. 대2병에 걸린 대학생은 1년간 자유를 만끽한다. 수많은 생각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를 누린다. 하지만 도저히 답은 나오지 않는다. 막상 답을 찾았다고 생각해도 우유부단한 탓에 금방 포기한다. 그렇게 자유의 막막함을 느끼다가 자유를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수만 가지의 선택지 중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은 끝이 보이질 않는데 현실은 이미 코앞까지 찾아왔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자유를 포기하고 모두가 쫓는 성공의 표본이 되기로 한다.
자유를 던져 버린 사람은 더이상 불안하지 않다. 지금 당장은 아무런 보상이 없더라도 이 일이 기대한 시점부터 분명히 결과물을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 있으므로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자유를 포기하면서 우리는 자아를 잃었다. 에리히 프롬은 우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포착한다.
“개인은 자기 자신이기를 그만둔다. 그리고 문화적 유형이 그에게 제시한 성격을 그대로 수용한다. 따라서 그는 모든 타인과 똑같아지고, 타인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모습과 똑같아진다. ‘나’와 외부 세계의 차이는 사라지고, 그와 더불어 외로움과 무력함을 두려워하는 의식도 사라진다. 이 메커니즘은 일부 동물에게서 볼 수 있는 보호색에 견줄 수 있다. 이런 동물들은 주위 환경과 너무 비슷해 보여서 거의 구별할 수가 없다. 다시는 고독과 불안을 느낄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가 치르는 대가는 비싸다. 그것은 자아의 상실이다.”
어떻게 다시 자아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바로 질문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내 인생에 능동적인 책임을 지고 내 자아를 되돌려 놓겠다는 강력한 의지다.
우리는 자유 때문에 조급함을 느낀다. 성급한 결론을 내려서 불안하고 외로운 나를 구원하려고 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자라왔지만 당장 선택해야만 하는 압박에 시달려 왔으며, 미래의 불확실성이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인생의 회의감에 시달리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 당장 미래를 위한 선택을 해야 하는 부조리한 시기에 놓여 있다.
이제 자기 자신을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볼 수 있다. 내가 조급하다는 사실과 불안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만 해도 그 불안함과 악수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용기를 가지겠다는 의지를 스스로 가질 때 비로소 필요한 조언들이 들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