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살의 안식년
"마치 영원한 생명을 타고난 것처럼 분노를 드러내어 그나마 짧은 삶을 낭비하는 일이 유익할 것이 무엇이냐?"
- 세네카
안식년에 나는 세 가지 감정에 압도당했다.
공허함,
불안함,
조급함.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안식년이 끝나가는데 아직도 이런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것을 해결하기로 했다. 다시 내가 읽어온 책 그리고 경험을 떠올려봤다. 바로 떠오른 경험이 있었다. 4년 전으로 돌아가본다.
22살, 군대에 들어가서 꼭 바꾸고 싶은 성격이 하나 있었다. 화가 많은 성격이었다. 화로 인해 인간관계를 망쳤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가 싫었다. '다혈질'이라고 하는 그런.
나는 그전까지 '사람은 안 변해'라는 신념이 있었다. 그런 나에게 처음으로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준 책은 <세네카의 대화: 인생에 관하여>였다. 세네카는 분노를 처음 화가 났을 때의 느낌과 그 뒤에 일어나는 일로 구분한다.
"뜻하지 않게 마음을 흔드는 것들 중 어느 것도 정념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마음이 행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마음이 겪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정념이란, 겪는 사태의 인상에 따라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인상을 받은 후에 이런 뜻밖의 동요에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불의의 인상이 일으키는 마음의 첫 번째 동요는 불의의 인상 자체와 마찬가지로 분노라 할 수 없습니다. 불의의 인상을 단지 받아들일 뿐 아니라 나아가 이에 동의하여 뒤따라오는 충동이 바로 분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지와 결심을 통해 복수하려는 마음의 격동이 분노라 하겠습니다."
말이 어려우니 잠시 세네카가 설명하는 스토아 철학 이론을 이해해 보자. 세네카는 처음에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감정 반응을 피하거나 없앨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다만 우리가 연습을 하면 감정에 대한 '반응'은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정념을 피할 수 없지만, 극복할 수는 있다."는 말을 남겼다.
출처: <스토아적 삶의 권유>, 마르코스 바스케스
즉, 처음에 화가 났을 때의 느낌은 나의 의지가 아니다. 그냥 나에게 찾아오는 인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느낌을 붙잡고 그걸 가지고 뭔가를 하려고 하면, 세네카 표현대로 말해서 '의지와 결심을 통해' 생각과 행동을 일으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분노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다."
- 에픽테토스, 스토아 철학자
나한테 이 개념은 충격 그 자체였다. 한 번도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세네카가 말하길, 처음 분노의 느낌이 찾아왔을 때 그것은 뭐랄까, 피할 수 없는 녀석이다. 따라서 그저 '알아차리고' '놓아주면' 저절로 분노의 느낌은 사라진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그걸 가지고 생각이나 행동으로 옮기려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내 분노는 점차 가라앉는다.
나는 믿고 움직였다. 세네카의 말이 사실이었다. 나는 분노의 인상이 찾아올 때마다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올 게 왔구나.' 마치 감정 알아차리기 게임 같았다. 화 날 일이 많은 날은, '아, 철학하기 좋은 날이구나'하며 웃고 넘겼다. 처음엔 좀 어려웠지만 나중에는 점점 수월해졌다. 뭐랄까, 점점 화를 낼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실제로 분노라는 감정의 절대적인 양도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뭐든 '그럴 수 있지'하는 그런 경지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훗날 샤우나 샤피로의 <마음챙김>을 읽으며 뇌과학적으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뭐든 실천할수록 강화됩니다."
승려는 당시 신경과학자들이 막 발견하기 시작한 뇌의 근본 원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우리가 순간순간 실천하는 것은 뭐가 됐든 우리 뇌를 물리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우리가 명상할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 늘 뭔가를 수행한다고 강조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뭔가를 계속해서 강화한다는 뜻이다."
20세기 뇌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인 신경가소성은 우리 뇌가 일생 동안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 나아가 우리는 긍정적 시냅스 연결을 생성하고 강화하면서, 다시 말해 뇌 구조를 건강한 방식으로 빚어내면서 허술한 경로를 쳐낸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신경 가지치기'라고 부른다.
그렇다. 내 뇌의 구조가 바뀌었다. 원래는 분노와 관련된 뉴런들이 아주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지만, 내가 분노를 잘 쓰지 않자 그와 관련한 구조가 약해져 버렸다. 반대로 평온한 마음은 강화되어서 어떤 일이 생겨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제 내가 왜 안식년동안 점점 더 강한 불안감과 공허함을 느꼈는지 이해했다. 안식년동안 나는 매 순간 조급함과 불안함, 그리고 공허함을 수행했다. 불안감이 찾아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걸 잡고 계속 생각과 행동을 일으켰다.
그 덕분에 불안함과 관련한 시냅스 연결이 강화되었다. 가끔 나를 평온하게 만들어주는 글을 읽으며 마음을 다잡곤 했지만 그건 일시적일 뿐이었다. 나는 그런 반창고를 찾기보다 매 순간 떠오르는 감정에 집중해야 했다. 22살의 그때처럼 감정이 찾아오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냥 놓아주어야 했다.
그러려면 먼저 감정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감정을 두려워한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두려워한다. 공허함이라는 감정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런 감정이 들지 않도록 사람이나 사건을 통제하려 한다. 또는 감정을 마주하기가 싫어서 자꾸만 다른 곳으로 도망친다. 예컨대, 공허함이라는 감정을 마주하기 싫어서 계속 핸드폰으로 도망치려고 하는 꼴이다.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우리는 사실 내 감정과 싸우다가 대부분의 인생을 허비한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유는 단 한 번도 감정에 대해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정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있을까? 나는 감정에 대해 배울수록 이 사실이 참 부조리하다고 느꼈다.
삶은 B(birth)와 D(death) 사이에 C(choice)라고 하던가. 그렇다. 지금 당장 내가 행복을 선택할지 아니면 불행을 선택할지에 따라 삶은 바뀌기 시작한다. 지금 내가 공허함을 선택할지 충만함을 선택할지에 따라 내 뇌 구조는 달라진다.
그러니 내 불안함을 단 번에 씻겨줄, 내 공허함을 단번에 치료해 줄 어떤 사건을 기대하지 말자. 대단한 영화, 아름다운 문장, 황홀한 여행, 운명적인 사람이 날 바꿔주길 기다리기보다 매 순간 충만함을 수행하는 편이 낫다. 이게 바로 행복을 외부에서 찾기보다 내부에서 찾으라는 의미다.
샤우나 샤피로의 말처럼 외적인 변화는 우리의 행복 기준선을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내적 변화는 그걸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게 가장 위대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안식년은 기준선을 바닥부터 끌어올리는 훌륭한 시간이 되어야만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릴까? 다행히 <전념>의 저자 피트 데이비스가 말하듯, "전념하기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처음엔 좀 어색할지 몰라도 나중엔 불안해할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훗날 묻게 된다.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