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의 봄이 왔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다행히 원하는 대학교에 한번에 합격해서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상경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순간이 행복했고 마음에 여유가 넘쳤다. 드디어 3년간 꿈꿔온 로망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감에 비현실적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나에게 절망이 찾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입학식을 마치고 일주일이 지났을까? 나는 5시 45분에 강의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날은 구름이 하나도 없는 깨끗한 하늘과 캠퍼스의 설레는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말로만 들어왔던 캠퍼스의 봄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씨였다. 인상적인 하늘과 함께 캠퍼스를 걸어 내려가는데 어떤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대학은 결말이 아니고 시작이었구나. 내가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죽을 듯이 달려야 하는구나. 또다시 공부해야 하는구나. 그런데 왜 공부해야 하지? 공부를 안 하면 나는 뭘 해야 하지?”
갑자기 왜 이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불청객 같은 생각을 시작으로 끝없이 추락했다. 그 생각 이후로 나는 공부에 회의감이 들어서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다.공부는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미래를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고등학생 때 잠깐 꿈꿔보았던 공무원을 해볼까 생각도 해봤다. 공무원은 아무래도 뭘 공부해야 할지 다 정해져 있으니까. 공무원이 목표라는 친구와 설명회도 다녀봤다. 해야 할 일이 다 정해진 상태에서 노력을 얼마나 하느냐로 승부를 가르는 세계는 두렵지 않았다.
시간만 나면 내일은 뭐하지하고 걱정했다. 살면서 외롭다는 느낌을 이토록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상경을 한 지방 사람의 애환인지, 아니면 나 혼자 고통받고 있다고 느껴서 생긴 외로움인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외로움에 시달렸다. 그런 와중에도 외로운 티를 내기 싫어서 친구들의 연락을 마냥 기다렸다. ‘나만 외롭나? 왜 나만 외롭지?’ 친구를 만나지 않는 날이면 가슴이 답답해서 참기 힘들었다. 나만 빼고 모두가 행복할 거라는 착각 때문이었다. 도저히 참기 힘들 때는 어디든지 나가서 걸었다. 뭐라도 하고 싶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니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강의를 들으러 갈 때마다 친구들이 나만 빼고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내 주변 친구들은 학점 챙기느라 바쁘고 정신없는데 나만 매일 여유로워 보였다. 그럴수록 더 여유로운 척했다. 그게 나름대로 나의 차별점이라 생각했다. 친구들은 모두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지만 나는 하기 싫은 공부를 과감하게 포기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괜한 시기심과 질투심만 키웠다. 괜히 남들의 노력을 깎아내렸다.
하지만 막상 공부를 포기하고 무엇을 하고 있냐 물으면 할 대답은 없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내 상태가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이런 생활도 몇 달을 하니 더 이상은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과 혐오감을 이겨낼 수 없었다. 이제는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싶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한 해가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뭘 해야 할지 몰랐고 이제는 찾아 나서기로 했다. 나는 노트북을 챙기고 카페로 갔다. 노트북을 열고 유튜브를 켜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를 검색했다. 놀랍게도 영상이 있었다. 바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방법을 알려준다는 영상이 나왔다. 영상을 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기대감이 벅차올랐다. 이대로라면 기대보다 더 일찍 내 인생을 걸만한 일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안심했다.
하지만 시작과 동시에 내 기대는 무너졌다. 영상은 나에게 하고 싶은 것과 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10가지를 노트에 적으라고 주문했다. ‘10개를 언제 다 적어?’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없는데 어떻게 내가 10개를 적으란 말인가. 시작부터 막막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싶어서 찾아왔는데 영상은 나에게 반대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말해보라고 명령했다.
방법론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준다는 방법론들은 다시 나에게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묻는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은 방법을 애초에 찾지 않을 텐데 말이다.
이밖에 다른 방법론들은 너무 어렵고 혼자 접근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다른 사람이 내 옆에 꼭 붙어서 ‘당신은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직업이 당신과 잘 어울린다’라는 이야기를 해줘야 진행할 수 있는 방법론들 같았다. 그래서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처음 방법론으로 돌아갔다. 거의 한 달에 걸쳐서 각각의 10가지를 적었다.
나는 병이라고 느낄 만큼 우유부단했다. 되고 싶은 것은 많지만 없었고, 갖고 싶은 것은 없지만 많았다. 아니, 갖고 싶은 것은 많았다. 비싼 자동차와 명예를 가지고 싶었다. 명성을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갖고 싶은 것’ 칸에 적은 어떤 것보다 내 인생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그 일’을 갖고 싶었다. 그리고 되고 싶은 것 중 무엇을 정말로 하고 싶은지 몰랐다. 나는 회의감이 들지 않게 만드는 바로 그 일을 하고 싶었다. 포기한 공부를 대체할 일이 필요했다.
결국 나는 내가 적은 어떤 항목도 실천에 옮기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깨달았다. 나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갖고 싶은 게 뭔지 아무것도 몰랐다. 나라는 사람은 누구이기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되고 싶다고 적은 항목들이나 갖고 싶은 것들은 이전부터 내가 꿈꿔온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수단들이었다. 나는 그 이상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게 무엇인지는 몰랐다.
나같은 사람을 위한 영상이나 글을 찾다 보니 ‘사람은 모두 재능이 있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이라는 조언을 자주 접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속으로 울부짖었다. 여기 예외가 있다고. 나는 재능이 전혀 없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주장을 진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내가 잘못 태어났다고 느꼈다.
물론 의식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무의식중에 그 주장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나를 갉아먹었다. 내가 무의식중에 이 이야기를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2년이 넘게 걸렸다.
만약 정말로 내가 재능이 있다면 과연 죽을 때까지 그 재능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막막함도 들었다. SNS에는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고 멋지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과 나의 처지를 비교하면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었다. 재능이 없다는 사실이 초라하고 고통스러웠다.
방법론을 따르는 과정에서 방법론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파괴했다. 나는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는 바보로 받아들였고 그 방법론을 포기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그 방법론에 대답할 수 있을 때까지 그것에 의존했다.
방법론을 자칫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병든다. 방법론은 타인의 가치관과 지혜에서 비롯된 도구이기 때문에 나에게 맞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방법론이 아름다운 포장으로 덮여 있다면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진리이자 정답이라고 믿을 수 있다. 방법론은 모두 나에게 맞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나에게 맞지 않는 방법을 무작정 따라가면 자신이 가치가 없고 구제 불능이라고 느끼기 쉽다. 젊은이들은 나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나에게 맞는 방법론을 판단하기 어렵다. 즉, 나에게 맞는 방법이 무엇인지 찾는 일은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보다 어렵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그저 조심해서 방법론을 다룰 수 밖에 없다.
방법론은 누구에게나 통하는 방법이자 그 누구에게도 통하지 않는 방법이다. 묻는 질문에 대답만 하면 내일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 방법론은 없다. 방법론은 사회초년생에게 던지는 잔인한 농담이다.
방법론만 붙들고 산 지 5개월이 지났지만. 정작 하는 일은 없었고 그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을 때까지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만 적었다. 사실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핑계로 애초에 삶 자체를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모든 의사결정이 가벼웠다.
나는 그저 카페에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찾고 있는 시간이 생산적이라고 믿었다. 처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그 시간이 너무 길어지니 점점 나보다 비생산적인 사람은 없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5개월 동안 항상 어떤 행동을 하라고 요구받았지만 소모적인 노력이었다. 어떤 방법론도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세월의 허망함과 무기력함과 함께 알게 되었다. 마치 쳇바퀴를 도는 느낌이었다.
어느 한 곳에 머물러서 나를 돌아보는 건 모순적인 행위다. 나에 대한 이해는 목적이 될 수 없다. 언제나 나에 대한 이해는 어떤 행동과 생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얻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 눈을 돌리지 않고 나만 보고 있으니 그 안에서 무의미한 순환을 돌 뿐이다.
무의미한 순환은 삶에 대한 무의미함으로 변한다. 방법론에 의존하면 시간은 시간대로 쓰지만 막상 어떠한 실질적인 얻음은 없다. 마치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공부법만 찾으면 성적은 떨어지고 자신의 공부법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어떠한 대답도 내리지 못한 채 휴학을 하고 입대했다. 막상 입대하고 나니 조급함이나 불안함은 사라졌다. 아니, 초반에는 잠시 조급했다. 군대에 와서야 나만 빼고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조급함은 ‘세상은 당신의 생각만큼 급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사라졌다.
나는 조급하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아서 무엇을 해야 할지 찾은 줄 알았다. 이미 답을 내린 줄만 알았다. 착각이었다. 전역하고 사회로 나오니 다시 조급해졌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나는 군대에 있을 때 책을 읽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며 나에 대한 이해를 쌓아나갔다. 불필요한 사고방식이나 태도, 성격들을 하나하나 고쳐나갔다.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나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 긴 시간 동안 분명 변했다.
그래서일까? 한 달의 조급한 시기를 지나 나는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때 나는 깨달았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답하려고만 하면 대답의 재료가 쌓이지 않지만 이 질문을 잠시 잊고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그때 비로소 답할 재료가 생긴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버린 사고방식 중 하나는 노예근성이다. 나는 군대에서 은연중에 이런 말을 내뱉었다. “만약 누군가 내가 뭘 해야 할지 알려줄 수 있다면 나는 진짜 열심히 할 자신이 있는데 말이야.”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다. 나는 이 말을 곱씹어보며 내가 노예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역하고 나서야 깨달았고 그때부터 이 사고방식을 고쳐먹기로 했다. 그리고 그제야 무엇을 해야 할지 찾는 자들은 방법론을 찾고 있는 사고방식을 가장 먼저 고쳐야 한다는 사실을 간절하게 깨달았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주체성과 자발성이 없다면 대답하지 못한다.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인생을 살아보고자 던지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법론을 찾는 이들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당장 알려달라는 사고방식이 내재되어 있다. 즉 누군가 나에게 정답을 알려주었으면 하는 수동적인 사람은 애초에 이 질문의 주인이 아니다. 자신에게 진정으로 의미를 가져다주는 삶의 요소는 그 누구도 알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을 해야 할지 찾는 이들이 가장 먼저 버려야 할 사고방식은 ‘남의 정답에 의존하는 사고방식’이다. 다른 말로, ‘시키는 대로만 하겠습니다’ 사고방식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찾고자 하는 사람이 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시간만큼 답을 발견하는 시간이 늦춰진다.
방법론은 나라는 사람은 그대로 놔둔 채로 행동만 바꾸려고 한다. 또는 혼란스러운 나를 그대로 놔두고 그 혼란 속에서 무언가 꺼내려 든다. 잠시 삶의 공허함 때문에 사치스러운 습관을 지닌 사람은 당연히 사치스럽거나 남들에게 인정받으려는 물건을 가지고 싶다고 말한다. 방법론은 그저 이 대답에서 어떤 결론을 도출한다. 이 결론을 믿고 달려간다면 후에 그 물건을 가지고 나서야 사실 내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이게 아니었음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가치관을 점검하지 않고 행동만 바꾸려 하면 되려 먼 길을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