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운 길이란 무엇일까?
22살의 나는 문득 이런 발칙한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까지 남에게 끌려다니며 살아왔고 내가 진정으로 원해서 한 일이 없다. 심지어 원하지 않은 일은 무엇을 해봤냐 물으면 공부밖에 없다. 그러니 잘 하는 건 당연히 없으며 좋아하는 걸 찾았을 리가 만무하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초등학생과 다른 게 뭐지? 3살 아이와 다른 게 뭘까? 어쩌면 나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게 아닐까?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능력과 생각을 무시하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출발선에 서 있는 상황이 아닐까? 이제부터가 내 인생의 진짜 시작이 아닐까?
나는 22살이 아니다. 이제야 내 인생을 시작한 어린아이다. 나는 1살이다.’
항상 가진 능력과 지식을 바탕으로 미래를 판단하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도 못했다. 항상 같은 것만 붙잡고 있었지만 답이 나오지 않자 조급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조급해졌지만 막상 하는 일은 없으니 그만큼 더 여유로웠다. 조급하면서 여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매번 힘들다고 말은 했지만 생각해보면 쉬는 시간이 더 많았다. 분명 나는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바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하기도 민망했다. 나는 군 휴학을 했고 안 그래도 넘쳐 흐르던 여유가 더 생겼다.
입대하고 나니 사회에 있을 때의 여유로움과 질이 달랐다. 사회에서는 항상 여유로우면서도 조급했는데 군대에 있으니 마치 내 인생이 잠시 일시 정지한 느낌이 들었다. 일종의 보너스 게임처럼 느껴졌다. 일시 정지한 느낌 덕분에 나는 조급하지 않았다. 나는 보너스 게임을 알차게 보내고자 마음먹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미래에 대한 걱정이 줄었고 책을 읽으며 지식과 지혜를 쌓아나가자는 심적인 여유가 생겼다. 부대 내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에 책이 그렇게 잘 읽힐 수가 없었다.
핸드폰과 노트북, 그 외에 모든 것을 잠시 놔두고 책만 있는 곳으로 떠나보아라. 책밖에 없는 곳에서는 평생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책을 읽는다. 바쁘다는 핑계로 하지 못한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사색을 위해 모든 것을 집에 두고 떠나보아라.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의도치 않게 나에 대한 이해를 얻었다.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듯한 책들이 있었다. 과거의 뒤죽박죽 한 경험과 생각들이 작가의 깔끔한 표현으로 인해 명확하게 정리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책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스스로는 생각해보지 못한 지혜뿐만 아니라 내가 몸과 경험으로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말로 표현하지는 못했던 애매한 삶의 지혜들을 말끔히 정리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내 과거의 행적들에 대해 하나씩 이름표를 붙여나갈 수 있었다. 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말이다. 그때부터 독서가 의무보다는 즐거운 취미로 느껴졌다.
이때쯤 나는 철학 분야의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철학책을 우연히 접하고 나는 놀라움을 경험했다. 나보다 먼저 지구를 살다 간 수많은 철학자가 글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 철학을 알려주었다. 나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까지 사는가’라는 생각을 항상 마음속에 지니고 살았는데 철학자들도 똑같은 생각을 한 게 아닌가!
아, 그렇다! 내가 살면서 던진 모든 질문은 이미 누군가 던졌으리라. 그렇다면 그 질문을 던진 사람들을 찾아 나서라. 도서관에 없는 질문은 없다.
만약 내가 던진 질문을 이미 던진 사람만 찾을 수 있다면 나는 내가 한 질문에 대해 답한 수많은 명사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뇌와 가슴에서부터 반가움이 느껴졌다. 내가 궁금해한 질문을 발견할 때마다 안에서부터 웃음이 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당신의 생각이 그렇단 말이지?’
애초에 철학이라는 분야를 우연히 접했기 때문에 어떤 대답을 원해서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떤 대답을 듣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질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철학자들의 복잡하고 어려운 설명을 처음 읽을 때 나는 무엇이 맞고 틀렸는지 몰라서 무조건 다 수용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관을 갖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비판적’ 독서가 될 수 없었다. 반박할 수 있는 생각이라는 걸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면서 나를 가장 만족시키는 가치관과 철학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읽기만 하면 나중에 아무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웃풋을 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부터 책 옆에 글을 써가며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인생 질문만큼 고통스러운 질문이 없었는데 이제는 어떤 일보다 흥미로웠다. 지금까지 들어온 조언들이 그제야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에게 맞는’ 조언이 무엇인지, 그저 무의미한 조언은 무엇인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이해하고 발견하기 시작했다.
살아오면서 나답게 살라는 조언을 심심치 않게 접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화를 참지 못했다. ‘이보다 더 무책임하고 쓸모없는 조언이 있을까? 나답게 살라는 말은 도대체 뭘 의미하는가.’ ‘나답게’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나로서는 이런 조언을 하는 사람들만큼 무책임해 보이는 어른이 없었다. 최소한 열심히 살라는 조언을 듣는다면 어떻게 살라는지는 알겠지만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나답게 살라’고 하면 도대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모르니 그렇게 무기력한 조언도 없었다. 애초에 나다운 게 뭔지 아는 사람은 알아서 ‘나답게’ 살 텐데 뭘 또 피곤하게 한 번 더 말하는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는 본인들은 얼마나 ‘나답게’ 사는지 궁금해서 기가 찰 지경이었다. 나는 나중에서야 나다운 걸 어렴풋이 알면서도 포기하며 사는 어른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꿈과 나 자신을 일찍 발견하고 그만큼 일찍 포기한다.
나는 나를 몰랐다. 아니 여전히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나를 정의하는 게 뭔지도 몰랐고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 알기 위해서 어디서부터 무엇을 건드려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너무 포괄적이라 잘못되었다. 마치 ‘이상하다’라는 말이 몸 컨디션이 이상하다는 말인지 지금 상황이 이상하다는 말인지, 기분이 이상하다는 말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갑자기 대뜸 ‘너 이상해’라고 말하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다. ‘이상하다’라는 말에는 너무 많은 의미가 담겨 있어서 말의 상황과 맥락을 알아야지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대답 역시 각각의 상황과 맥락에 맞는 대답이 있다.
미국의 투자가 레이 달리오는 그의 저서 <원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생 여정에 있어 필수적인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이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나는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이때 상황과 맥락은 내가 레이 달리오의 문장을 읽고 난 다음이었다. 따라서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는 ‘나는 어떤 특성을 가졌는가?’였다. 레이 달리오는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도구 중 하나로 MBTI를 소개했는데 이때 마침 친구들 사이에서 MBTI 검사가 유행한다고 하니 참으로 신기했다.
나는 MBTI 하나만 파악했는데 나에 대한 많은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내 성격을 보다 더 깔끔하게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반가웠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구나. 나와 같은 사람이 많구나’ 나의 특성을 하나라도 알게 되니 더 알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내 과거와 현재에 관해 설명해주는 글을 찾아다녔고 더 많은 이름표를 붙여나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점점 나를 알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나를 알기 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안경이 생겼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생겼다는 말이다. 나에 대한 이해와 나의 관점이 생겼기 때문에 그 관점을 토대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이해하지 못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몰랐던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나의 주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그 전보다 더 아름다웠지만 단점도 있었다. 나는 종종 ‘나는 원래 이래.’라고 말했고, ‘저건 어쩔 수 없이 저런 거야’라고 말했다. 종종 고정관념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배우면 배울수록 내 생각을 깨는 지식을 발견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송두리째 뒤집혔다. 내가 확신하는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생각으로 대체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해를 믿되, 새로운 이해에 언제든 열려 있어야 한다. 자기 생각에 과한 확신을 가지면 자만심이 생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무언가를 볼 때, 우리는 내 생각을 비워야 한다. 그동안 배운 것을 잊어야 한다. 마치 처음 가는 여행지의 식사예절 문화가 자국 문화와 다를 때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식사예절이나 제스처를 잊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세상에 갇히게 된다.
나를 이해하고자 할 때 어려웠던 고민은 어디까지가 나의 가치관이고 어디까지가 남의 가치관인지 판단하는 문제였다. 나에게 이 고민의 시작은 대학이었다. 나는 20살 초반까지 대학을 성공의 징표라고 여겼다. 내가 선택한 나의 꿈, 나의 진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 들어가니 대학에 대한 환상과 동경을 모조리 잃었다. 나는 그때서야 잠시 내가 남들의 입김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이런 경험을 단시간 내에 숱하게 했다. 처음에는 남의 가치관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뿌듯하고 기뻤지만 여러 번 반복되니 도대체 어디까지가 나의 가치관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과연 나의 가치관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할까라는 생각도 했다. 가장 나를 힘들게 만든 것은 행복과 불행이었다. 행복하다고 믿은 일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불행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처음 이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 행복이 두려웠다. 과연 이 상황이 정말 행복한 건지, 아니면 잠시 뇌가 혼란을 일으키는 건지 어려웠다.
이는 패턴이 있다. 나는 스포츠카를 나의 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흥미를 잃었다. 23살이 되어서야 내가 잠시 인생에 대한 공허감때문에 쾌락과 기호를 좇는 소비에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포츠카’라는 하나의 상품군이 남의 가치관이었다는 사실로 시작해 다른 가치관역시 역시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추구하는 상품군이 아닐 수 있다는 의문을 가졌다. 패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내 내면의 목소리를 방해하는 수많은 장애물 가치관이 내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며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한다. 내 안에 있는 목소리는 내 가치관과 남의 가치관을 정확히 알고 있다.
나는 지독하게 낙관적이었다. 친구들이 하나같이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을 때 나는 도저히 말릴 수 없는 낙관주의에 빠져 있었다. 내일 뭘 할지도 모르면서 5년 뒤의 미래는 장밋빛이라 생각했다. 아무튼 10년 뒤의 나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의 주인공이었다. 19살에도 그러더니 아직도 낙관주의는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내일이 막막한 와중에도 항상 미래에 대한 기대감은 있었다. 기대감과 희망으로 살아온 나날이었다. 나는 내가 잘 될 거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방법론을 5개월 내내 붙들고 살아도 아무런 삶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으니 점점 희망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내일이 기대되지 않았다. 내일 굳이 살아야 하냐는 생각도 들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완전히 잃었고 낙관주의와 맞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아무래도 우울증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나는 정말 이렇게까지 살아야 할 만큼 인생이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시작했다.
근거 없는 낙관주의자는 그 누구보다 비관주의에 빠질 위험이 높다. 근거가 얄팍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쉽게 무너질 수 있다. 따라서 이성적인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이성적인 낙관주의자는 미래에 대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근거는 바로 현재에 있다.
나 자신에 대한 이해는 점점 세상에 대한 판단력을 발달시킨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어디인지, 나는 어떤 가치관이나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내 가치관이나 신념이 생기면 남들에게 헌신할 수 있는 ‘무엇’이 감이 잡히기 시작한다. 그것을 나의 정체성과 나의 비전, 행동으로 세상에 발산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찾는 ‘무엇’이 아닐까? 따라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이제 막 인생 여정을 시작한 사람은 가장 먼저 자신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장자는 꿈을 꿨다. 장자는 꿈에서 나비가 되어 세상을 활보하는 꿈을 꿨다. 그러다 그는 꿈에서 깼다. 문득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나는 ‘장자’일까? 아니면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 것일까? 그는 나비 꿈을 후대에 전파하면서 장자와 나비는 분명히 다른 존재지만 그 차이를 구분하는 것은 헛되고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는 지혜를 주었다.
나는 진정으로 나다운 일이 무엇인지 찾을 때 나답지 않다고 판단한 일들을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으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나답지 않은 일’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분명 ‘나다운 일’과 ‘나답지 않은 일’은 구분할 수 있었지만 나답지 않은 삶을 살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답지 않은 삶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나답지 않은 삶이 나를 만들었다고?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장자는 나비 꿈을 꾸고 나서 제자에게 꿈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들은 제자는 말했다. “스승님의 이야기를 그럴듯하지만 너무 황당해서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자 장자는 “너는 쓸모 있음과 없음을 구분한다. 그럼 네가 서 있는 땅을 한 번 보아라. 네게 쓸모 있는 땅은 지금 네가 딛고 있는 땅이다. 그것을 제외한 땅은 쓸모가 없다. 그러나 만약 네가 딛고 있는 그 부분을 뺀 나머지 땅을 없애버린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그 땅 위에 서 있을 수 있겠느냐?”
장자는 이어서 말했다.
“너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땅은 네가 딛고 있는 땅이 아니라, 네가 쓸모없다고 여기는 나머지 부분이다.”
나다운 길을 걷기 위해 진정 필요한 경험은 나답지 않은 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정말 이를 구분할 수 있을까? 그리고 굳이 애써서 구분한 뒤에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이러한 구분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아직 내 지혜가 부족해서 답은 모른다. 여전히 모호하지만 한편으로 분명한 것은 내가 ‘나답지 않은 삶’이었다고 말할 만한 판단력이 생겼다는 사실이었다.